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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돌교회
6/13/2021 열왕기상 8:1-66 본문
말씀: 왕상 8:1-66
제목: 솔로몬의 성전 낙성식 (2)-포기하지 말자
숲이 우거진 산의 정상을 향하여 끝까지 올라가 본적이 있나요? 우리들의 신앙생활이 너무나 똑같기에 그렇습니다. 산행을 하다가 보면, 어떤가요? 꼭대기까지 도달하기 전까지는 다들 엄청난 땀을 흘리게 됩니다. 그러나 도중에 중턱에서 휴식을 취하려고 잠시 올라온 지점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많이 올라왔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다시 정상을 향하여 올라가다가보면, 가는 그 도중은 어떤가요? 다시 처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죽을 맛입니다. 높은 산일수록 지금 올라가고 있나? 라는 의심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다시 올라온 자리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시작한 기점이 아주 까맣게 보입니다. 그 뜻은 힘들어서 자기의 자리를 확인해 보면, 힘든 만큼 자신이 올라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을 정상에 오를 때까지 반복을 해야 합니다. 만약에 힘들다고 하여 도중에 포기하게 된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산을 오르는 등산객들이 쩔쩔매면서 올라가다가 보면 결국 정상에 도달하여 큰 휴식을 누리게 됩니다. 신앙생활도 똑같다는 말씀입니다. 힘들다고 포기하는 것만큼 손해 보는 것이 있을까요? 그래서 옛 노래에서도 보면 ‘가다가 아니 가면, 아니 가는 것보다 못하다’라고 하지 않던가요?
그래서 끝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시작은 못난 자였지만 그러나 끝까지 지켜낼 때, 정상에서 오른 모든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동일한 기쁨과 쉼을 갖게 됩니다. 다 갖고도 실패한 솔로몬을 통하여서 무엇을 깨닫게 합니까? 인간의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는데 있다는 것을 온 세상을 향하여 선포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갖고서도 솔로몬이 무너지고 무너뜨렸지만 끝까지 솔로몬을, 솔로몬은 포기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그래서 포기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들이 왜 포기하지 말아야 되는지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솔로몬에 대한 큰 실망을 한 독자들은 오늘 왕상8장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욥 정도의 신앙인이 성전봉헌식과 기도를 드렸으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데, 우상 숭배로 나라를 쪼갤 솔로몬의 성전봉헌식과 그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망가지고 망가뜨릴 사람이 드리는 기도라 어색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아무 자격이 없는 솔로몬이 드리는 그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너나 잘하지” 라는 생각이 먼저 들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러나 우상숭배로 무너지고 무너뜨린 솔로몬을 통하여 ‘모든 인간의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명령을 지키는데 있다’고 고백하고, 열조와 함께 잠들어 다윗의 성에 장사된 솔로몬을 보면서, 느끼는 그 느낌을 굳이 표현 한다면, 마치 불이 타는 장작 위에 온갖 양식들이 꽉 차 있는 큰 가마솥에 계속해서 불을 지폈더니, 부글부글 끊어대면서 결국 모두가 즐겁게 먹을 수 있는 보양식이 되는 것과 같다. 라는 느낌을 저는 느꼈습니다. 질문을 합니다. 여러분들은 만약에 솔로몬과 욥 중에 택하라고 하신다면 어느 쪽을 원하십니까? 솔로몬은 하나님의 은혜로 최고의 태평성대를 누리다가 나라까지도 다 망해 먹고 단지 회개로 부끄럽게 인생을 마감한 자라면, 욥은 당대의 의인으로써 전혀 부족함이 없다가 별안간 완전하게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모두에게 오해를 받으면서, 좌절 그 자체로 있다가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존귀한지를 깨닫고, 듣기만 하던 하나님을 이젠, 하나님을 뵙게 되면서 예전보다 갑절의 형통을 누리게 된, 그 욥하고, 그 둘 중에 누구를 택하라고 하시면 여러분들은 어느 쪽을 택하시렵니까? 아마도 다들, 모든 것을 다 가져보고 원 없이 살아본 솔로몬의 길을 택할 것입니다. 아주 이기적인 선택을 당연히 할 것입니다. 끝까지 그 정상을 피땀 흘려가면서 오르고 싶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남이야 나라야 어떻게 되든지 나만 해 볼 것을 다 해보게 된다면, 다 해보면서 최고로 인생을 마감하게 된다면, 바랄 것이 없다는 이기적인 생각 때문에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된 우린, 있을 수 없는 그 억울한 길을 힘겹게 경험한 욥의 그 길을 선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요? 솔로몬이 모든 것을 다 받고도 우상숭배로 다 망가져 갈 때, 솔로몬의 마음이 편했을까요? 지옥이었을까요? 역시나 지옥이었다는 것이 아닙니까? 도둑놈, 거짓말쟁이 사기꾼들이 편하게 잘 수 있던가요? 바람을 핀, 배우자가 자기 배우자 곁에서 편한 잠을 잘 수 있을까요? 북한 김 정은이가 편한 잠을 잘 수 있을까요? 양심에 화인을 맞은 사람이라면 몰라도, 양심을 조금이라도 가진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편할 수 없는 법입니다.
하물며 용서받은 성도가 죄를 짓고 도망친다면, 어떤 느낌을 갖게 되냐면, 그 누구보다도 더욱 두려움에 떨게 되는 것입니다. 주일만 범해도 마음이 어떤가요? ~ 저는 솔로몬이 얼마나 마음의 큰 고통을 갖고 산 그의 인생인지를 느꼈습니다. 솔로몬의 삶은 보기에는 최고이었지만, 그래서 모두의 부러움을 받게 되는지는 몰라도, 우상 숭배로 계속해서 찾아오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그의 마음은 생지옥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삶의 진정한 가치는 정상적인 길을 포기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학생이 땡땡이를 쳐 봐야 편하지 않습니다. 하지 말라는 것을 해 봐야 즐겁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타락했던 솔로몬을 결국 완전한 항복을 시켜, 지금까지도 기억되게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무너지고 무너뜨렸던 솔로몬이 결국 놀라운 그 고백을 하는 것을 볼 때, 그렇다면, 자기 인생에서 자기가 중심이 되어야 할까요? 아니 자기가 중심이 될 수 있을까요? ~ 의인이요 위대한 믿음의 증인인 욥을 보세요! 멀쩡한 욥, 항상 경건한 욥을, 믿음의 본이 되는 욥, 참 잘하고 있는 그 욥을, 그 자리에서 뽑아 완전 뭉개버리게 하시는 것 같더니, 그 와중에 결국 더욱 성장케 하시고 자라게 하셔서 욥을 예전보다 더 영원히 빛나게 하시는 것을 보면, 욥도 믿음이 더 큰 욥이 되게 하시는 그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과정이었지만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욥을 더 위대한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태평성대를 누리던 솔로몬이 성전낙성식에서 드린 그의 기도내용을 보면서 놀라운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1)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아니하시면 그 누구도 태평성대를 끝까지 유지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주의 음성입니다. (2) 너희들의 마음 상태는 혼돈, 흑암 그 자체였지만 그럴지라도 너희들의 그 모든 소원들을 그대로 만군의 하나님인 내가 다 응답하여 주겠다는 하나님의 그 의지를 느끼게 합니다. 비록 솔로몬은 심히 타락하여 지옥의 삶을 살아야 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의 그 기도대로, 아니 그 이상으로 응답을 하여 주시고 있으시더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비록 우리들도 솔로몬보다 더 하면 더 했었지만 그러나 지금 성전된 우리 자신을 보세요! 응답하지 않은 것이 있나요? 아니 기도하지 않은 것까지도 다 이루어주시고 계신다는 것을 느끼고 있지 않나요? 우리의 현실은 비록 지옥을 방불하여 쩔쩔맬 수밖에 없었지만, 돌아보면 어느새, 더 나아진 자리에 가 있더라는 것이 아닙니까? 마치 산행에서 느끼듯이 말입니다. 비록 힘들어 죽을 맛이지만, 그러나 그분이 쩔쩔매고 있는 우리들을 앉고 엎고 권능의 오른손으로 꽉~잡아주시고 계시기에,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까?
다 주니까 멋대로 살던 솔로몬이 결국 어떤 고백을 했던가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을 지키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솔로몬은 왕상8:26을 보면, “내 아비 다윗에게 하신 말씀이 확실하게 해 달라고” 당당하게 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온갖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잘못한 것에 대하여 회개를 이 성전을 향하여 하면, 다 용서해 주셔야 한다고 합니다. 모든 해결이 다 하나님에게 있다는 기도의 내용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도움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솔로몬은 어떤 위기와 환란의 시기가 아니라 최대의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을 때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기도 내용은 당시 상황하고 너무나 거리가 먼 기도를 드립니다. 마치 망할 것을 알았던 것 같았습니다. 결국 우상숭배를 한 솔로몬에 의하여 나라가 분열이 되고 나라가 망합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드린 그 기도, 그대로 다 응답하십니다. 율법과 은혜가 이루어낸 결과입니다. 약속하신대로 순종하는 이스라엘을 통하여서가 아니라 배신과 배반과 불순종하는 타락한 이스라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인 구원을 이루어내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자녀들의 타락보다 더 크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은혜를 입은 성도가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것이 능사요 지혜일까요? 웃기는 노릇입니다. 도망간다고 숨을 수 있을까요? ~ 은혜를 입은 성도가 힘들다고 포기하는 것과 끝까지 책임을 다하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능사요 지혜일까요? 솔로몬이 얼마나 멀리 도망을 쳤나요? 그러나 그는 결국 은혜와 율법으로 항복합니다. 타락한 이스라엘을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죄 값으로 바벨론의 노예로 70년간을 고생케 하신 후에, 그 이스라엘을 통하여 구원을 다 이루어버리신 것을 잊지 마세요!
하나님의 선하심은 인간의 최악까지도 선으로 회복케 하십니다. 이스라엘과 솔로몬은 하나님의 율법과 은혜 속에서 큰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자기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불순종으로 망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멋대로 행하므로 무너진 이스라엘이 부르짖으면 오셔서 또 세워주시면서, 또 불순종하여 깨어져서 죽을 지경에 이르면 그때에도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또 가셔서 회복시켜 주시면서 하나님의 뜻을 계속해서 이루어가시더라는 것입니다. 포기를 모르시더라는 것입니다.
한 사건인 왕하25:27-30을 보세요!
25:27 유다의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 곧 바벨론의 왕 에월므로닥이 즉위한 원년 십 이월 그 달 이십 칠일에 유다의 왕 여호야긴을 옥에서 내놓아 그 머리를 들게 하고
25:28 그에게 좋게 말하고 그의 지위를 바벨론에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왕의 지위보다 높이고
25:29 그 죄수의 의복을 벗게 하고 그의 일평생에 항상 왕의 앞에서 양식을 먹게 하였고
25:30 그가 쓸 것은 날마다 왕에게서 받는 양이 있어서 종신토록 끊이지 아니하였더라
37년만의 회복이 됩니다. 약속을 결국 이루고 마십니다. 그러나 이 정도가 아닙니다. 렘29:10-14입니다.
29:10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돌보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성취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29:11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29:12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29:13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29:14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나는 너희들을 만날 것이며 너희들을 포로된 중에서 다시 돌아오게 하되 내가 쫓아 보내었던 나라들과 모든 곳에서 모아 사로 잡혀 떠났던 그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이것은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남은자들이 돌아와서 스룹바벨 성전을 세웁니다. 게다가 예수님을 죽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기하셨나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망가진 이스라엘을 가지고 이방인의 구원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고 있더라는 것이 아닙니까? ~ 상상할 수 없는 기적 그 자체가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기적입니다. 보이지 않게, 들리지 않게 일을 하시면서 기적을 보여주십니다. 하루하루, 일초일초가 흐르는 그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하여, 그 능력으로 땅 끝까지 복음이 소리 없이 전달되고 있는 가운데,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에 교회를 핍박하던 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기적입니다. 이 기적은 천사도 모르는 구원이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약속의 성취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철저한 준비를 하셨던 것입니다.
모든 자녀들의 거룩함을 위한 천지 창조이셨고, 구원을 위하여 미리 준비하셨음을 출3:20-22과 출11:3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말씀을 봅니다.
3:20 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 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 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
3:21 내가 애굽 사람으로 이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할지라 너희가 나갈 때에 빈손으로 가지 아니하리니
3:22 여인들은 모두 그 이웃 사람과 및 자기 집에 거류하는 여인에게 은 패물과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여 너희의 자녀를 꾸미라 너희는 애굽 사람들의 물품을 취하리라
왜 이런 패물을 갖고 나오라고 하셨는지 아십니까? 네, 성막을 짓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래서 시편 105:37에서도 보면, “그들을 인도하여 은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니 그 지파 중에 약한 자가 하나도 없었도다” 다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모든 일들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솔로몬의 성전을 세우기 위하여 어떤 준비를 하게 하셨나요?
왕상5:2-5입니다.
5:2 이에 솔로몬이 히람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5:3 당신도 알거니와 내 아버지 다윗이 사방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의 원수들을 그의 발바닥 밑에 두시기를 기다렸나이다
5:4 이제 내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게 사방의 태평을 주시매 원수도 없고 재앙도 없도다
5:5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 다윗에게 하신 말씀에 내가 너를 이어 네 자리에 오르게 할 네 아들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리라 하신 대로 내가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려 하오니
다윗이 천하를 지배하도록 하신 다음에 솔로몬을 통하여 성전을 짓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한 곳만 더 봅니다.
겔20:6입니다.
20:6 그 날에 내가 내 손을 들어 그들에게 맹세하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그들을 위하여 찾아 두었던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요 모든 땅 중의 아름다운 곳에 이르게 하리라 하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땅까지도 이미 만세 전에 찾아 두었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냥 대충, 생각나는 대로 하나님의 일을 진행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그 약속을 이루시려고 어떤 준비를 얼마나 철저하게 시작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이신지를 보세요! 그렇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들을 위하여 어떤 준비를 하셨을까요?
상상이 됩니까? 모든 남녀의 만남으로 가정을 주시고 자녀까지도 낳도록 그런 준비까지도 다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평생을 지켜 주시므로 지금까지도 이렇게 우리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이 감정과 자유의지를 갖고 있었지만, 그 분의 섭리, 계획안에서 결국은 주님의 뜻을 따르는 자가 되게 하신 것을 보세요! 자녀들을 복되게 하시려고 철저한 준비 속에서 일을 이루어 가시는 그 하나님을 보세요! 이러하신 능력과 신실함을 가지신 하나님이 또 어디에 계실까요?
결코 없습니다. 유일무이하신 분이십니다. 유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결론과 확신과 믿음은 지금 구원을 받아 지면을 새롭게 하고 있는 우리들을 보면서, 그리고 여전히 그 구원이 우리 주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서, 내릴 수 있는 결론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 구원을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고 계십니까? 우리들이 멋대로 살아도 되는구나?~ 그럴 수 없습니다. 안 됩니다. 사람짐승에 불과한 우리를 귀한 존재로 회복시켜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알고, 하나님만이 자기중심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너 스스로 선한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진리에 대하여서는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던 사람짐승인 나를,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언제나 도와주셔서 말씀을 듣고 순종하려고 고민하는 자신을 보면, 더 이상 세상의 즐거움, 성공, 자랑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짐하고 또 다짐을 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그 은혜를 알게 된 성도라면 땅 속으로부터 마그마가 봇물 터져 나오듯이, 어떤 고백이 터져 나와야 될까요? 딤전1:12-17입니다.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 지어다 아멘
이 바울의 고백은 우리의 고백,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영원히 부끄러움으로 남고 불구덩이 속으로 버려져야 했는데, 겨우겨우 힘겹게 회복이 되어가는 자신을 보면서 철저히 자신을 부인하게 되지 않을까요? ~ 말씀을 떠나지 말아야 된다는 굳은 결심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태어나는 모든 인생들마다 자기는 태어나지 말아야 되었다고 그 깊은 하소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서서히 달라져가는, 책임을 조금씩 지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다 내려놓고자, 욕심과 정에 묶인 옛 자신과 늘 싸우자! ~나름 결심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버려져야 될 옛 자신이 이젠, 아니기에, 이젠, 능력의 하나님께서 보호하여 주시고 계심을 믿고 있기에, ‘멋대로’ 하려는 더러운 마음을 결코 용납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특히 버려질 나 때문에 고난을 당하여 주신 분, 죽어 주신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보내주신 하나님 아버지 때문에 우린,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기에 순종하지 말라고 해도 당연히 순종하게 될 것입니다. 성전된 이의 그 거룩한 아픔, 자녀들을 살리시려고 당하신 이 아픔과 고통이 없었더라면, 모든 인생들은 태어나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그 아픔이 있었기에 우리의 태어남은 완전한 반전을 이루게 됩니다. 그래서 주신 것이 솔로몬 성전이요 봉헌식입니다. 솔로몬 성전봉헌은 하나님 아버지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의 작품인 이 성전은 죽은 자를 살려 지면을 새롭게 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거룩하신 손길입니다. 늘 일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욥도 갑절의 복을 누리게 되고 망가져 버린 솔로몬도 결국 어떤 고백을 했습니까?
인간의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말씀을 지키는데 있다고 결론을 내리게 합니다. 때문에 솔로몬이 성전 앞에서 두 손을 들고 드리는 오늘 본문의 기도의 내용도 보세요! 택함을 받은 자녀들이 저지른 죄악으로 오는 모든 문제들을 성전을 향하여 기도를 드린다면 다 해결하여 주셔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모든 자녀들의 모든 기도의 간구들이 100% 응답이 됩니다. 아닌가요? 아니 그 이상으로 응답하고 계십니다. 그 증거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전이 되었기에 어떤 아픔이 있나요? 엄마가 아이를 낳고 기를 때의 그 아픔처럼, 성전된 우리들도 섬겨야 되는 그 새 생명들을 위하여, 엄마만이 아플 수 있고 엄마만이 당할 수 있는 그 거룩한 고통을 얻게 된 것입니다. 갈4:19, 살전2:7-9입니다.
갈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살전 2:7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마땅히 권위를 주장할 수 있으나 도리어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가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살전 2:8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뿐 아니라 우리의 목숨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
살전 2: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
우린 어떤 아픔이 있나요? 어떤 아픔이 나를 괴롭히고 있나요? 살리기 위한 아픔인가요? 무너뜨리기 위한 아픔인가요? ~ 우리가 부족하고 미련하여 늘 형편없는 행보로 약점과 허물이 들통이 나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겠지만, 그럼에도 그 결과는 언제나 반전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사람짐승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계속해서 새롭게 회복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워주신 하나님의 작품 성전은 자랑 그 자체인데, 그 평가를 신약에 와서 확인이 됩니다. 그 과정은 참 고달프고 힘이 들 수밖에 없지만, 그러나 정상에 올라가서 본 그 아래 풍경은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우린 성전이신 예수님을 보면서 그리고 우리들을 성전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면서, 그 손길로 사람짐승들이 새로워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일하심은 영원히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무 응답도 없는 것 같기에, 말씀에 대한 의심과 불평도 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의심하고 불평하고 있는 사이에도, 이미 하나님의 뜻은 진행이 되어, 어떤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질문합니다. 선악과가 복일까요? 저주일까요? 복입니다. 선악과는 우리의 안전장치가 되기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인정하고 순종하는 한, 물론 불편하고 무슨 통제로 여기면서 제압을 받는 느낌이 들어 늘 불평하게 되지만, 그러나 선악과를 따 먹지 않는 한, 우리의 안전은 100% 보장이 됩니다. 우리의 승리도 보장이 됩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 먹어보세요! 세상은 혼돈 그 자체가 되고 맙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불편을 주는 선악과만 보더라도 무엇을 알게 합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의 불편과 고통이 될지언정, 그 결과를 보면, 따 먹지 말아야 되는 선악과로 인한 불편과 고통이 따르지만 그러나 순종의 고통으로 비교할 수 없는 풍성함을 얻게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하지 말아야 되기에 그래서 받게 되는 고통은 복일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선악과가 없이는 복을 받을 수 없기에 그래서 선악과를 주셨지만 불순종으로 결국은 버려지면서, 그 누구도 고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고 고난 없는 인생이 되고 말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 속에서 무엇을 알게 하시는지 아십니까? 우리의 고난은 우리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를 알게 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흔드심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된 것을 알게 합니다.
코로나 19만이라도 생각 해 보세요! 코로나 19가 자기에게 어떤 기회가 되게 하던가요? 코로나 19로 하나님이 감염되지 않으시려고, 백신 준비될 때까지 다른 별나라로 잠시 여행하고 돌아 오셨나요? 아닙니다. 욥이 죽을 고통을 지나면서 더 믿음이 자랐듯이, 하나님의 자녀들도 이 코로나 19로 자신의 믿음이 자라는 그 기회가 되게 하시지 않았나요? ~ 여러분의 믿음이 자라나지 않았나요? 아니면 오히려 더 나태해지고 게을러지고 주변 눈치만 보다가 말았나요? 스스로 판단해 보세요~
우린 솔로몬 왕의 성전 완성과 하나님의 단 앞에서 드리는 기도를 통하여 무엇을 기억해야 합니까? 왕상6:11-13입니다.
6:11 여호와의 말씀이 솔로몬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6:12 네가 지금 이 성전을 건축하니 네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내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 내가 네 아버지 다윗에게 한 말을 네게 확실히 이룰 것이요
6:13 내가 또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거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더라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는 “하나님에게 순종하라”입니다. 특히 신앙은 끝까지 최선을 다 하셔야 합니다. 왜요? 무너져 버린 솔로몬이 회복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은혜로 회복이 되었지만, 돌이키는 시간은 어떠했을까요?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는 그 시간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오죽하셨으면, 70년의 포로 된 삶을 허용하셨을까요?
그냥 쉽게 돌이켜 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기간 중에서도 은혜를 놓치지 않았던 자녀들은 포기가 아니라 약속을 믿으면서 강한 믿음을 준비했던 것입니다. 시137편입니다.
137: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137:2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137:3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137:4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137:5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137:6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 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 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137:7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137:8 멸망한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137:9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시온을 사모하다가 결국 70년 후에, 돌아올 자들은 결국 돌아와서 성경학자 에스라와 함께 제 2차 스룹바벨 성전을 건축합니다. 하신 약속을 이루어주시려고 한순간도 구원의 흐름이 멈춘 적이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실패로 포기하거나 낙심하여 좌절하면 안 됩니다. 울면서라도 말씀을 따라가야 합니다. 기어서라도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면 그 결과는 망한 솔로몬이 어떤 인물로 둔갑하던가요? 결국 하나님만을 경외하라는 복된 결론을 내리게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왕하25:27-30의 말씀에서도 확인이 되었습니다. 여호야긴 왕이 37 년간의 감옥에서 벗어나 날마다 일평생 바벨론 왕과 식사하며 왕으로써의 모든 공급을 끝까지 받게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지금은 부족하여 제 구실을 못할 수 있지만, 포기하지 않는 자녀들에게는 동일한 결과를 주십니다. 물론 이런 말씀을 듣고도 포기한다면, 시드기야 왕처럼 두 눈을 뽑히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후회와 탄식 속에서 더 힘든 남은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그리스도의 남은 영광스러운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자녀들에게 채워 주십니다. 도움을 멈추지 않고 계십니다. 그 안에서의 우리들은 어떤 길을 선택하셔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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