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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021 사무엘하18:1-33 본문

주일 설교 말씀

3/7/2021 사무엘하18:1-33

PastorYK 2021. 3. 8. 15:34

말씀: 삼하 18:1-33                                           

제목: 마음이 심히 아파 우는 다윗

                     

 

성경 안에는 이해할 수 없는 부끄러운 사건들로 가득합니다. 그것이 성경이지, 사람들이 생각하는 무슨 특별한 어떤 신비한 마치 마술과 같은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특히 오늘 말씀을 보시면, 그렇지 않던가요? 왜 다윗이 압살롬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서는 그렇게 심히 괴로워합니까? 이해가 되시나요? 아들이 단 한명이었나요? 그리고 왕이 될 압살롬이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 전사하였나요? 아니지 않습니까? 반역과 간음으로 인한 죄악으로 응당 심판 받아서 죽었는데, 그런 아들이 죽었다고 그렇게 심하게 우는 가족이 있을까요? 

 

민폐가 심하여 아마도 부모까지도 외면할 것입니다. 게다가 왕이 전쟁에서 왕자가 죽으면, 괴로워 견디지 못하여 우는 왕이 있을까요? 물론 괴로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슬픔도 실은 왕으로써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기 아들만 죽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전쟁에 나가서 죽은 자기의 군사들도 자기의 백성이요 아들들입니다. 어찌 왕자가 죽었다고 그래서 왕이 그렇게 슬퍼한다면, 자기 군사요 백성들이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 전사한 그들의 죽음은 무엇인가요? 왕자의 죽음만 안타까워하고 자기 군사들이 죽은 것은 슬퍼하지 않는다면, 말이 됩니까? 

 

그래서 왕의 역할은 개인적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왕은 다릅니다. 다르기에 여러 왕자들 중에서 한 왕자가 전쟁에서 싸우다가 죽었다고 하더라도, 슬퍼할 것이 아니라 칭찬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왕이 왕자의 전사로 심히 슬퍼한다면? 그것도 안 되는데, 오늘 죽은 압살롬은 다르지 않습니까? 반역자였기에 받은 심판인데, 슬퍼하여 왕이 아무 것도 못한다면, 요압의 말대로 그날 목숨을 걸고 싸워 승리한 군사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 다윗 왕을 왕으로 인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울고 있었습니다

 

오늘 준비한 말씀은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말씀을 드렸고, 다들 잘 알고 계시지만, 권력의 세계는 아들도 아버지도 아내도 남편도 없는 법입니다. 걸리적거리면 권력이 있는 왕에게 누구든지 죽임을 당하더라는 것입니다. 기억나십니까? 대하21장에 등장하는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면서 남동생 모두를 다 죽였다는 것이 아닙니까?~이런 역사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모든 나라에 통상 일어나는 일반적인 사건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죽은 압살롬은 다릅니다. 반란을 일으킨 장본인이었습니다. 아버지를 죽이고 왕이 되려고 반란을 일으켰고 그리고 아버지의 후궁들까지도 대낮에 취했던 아들 이전에 역적이었습니다. 그 아들이 죽었다고 마음이 심히 아파서 운다? 이해를 누가 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다윗입니다. 다윗의 슬픔은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비합리적입니다. 그럼 이 반응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할까요? 여러분들은 다윗의 이 깊은 슬픔을 이해할 수 있나요? 

 

우린 다윗의 이 슬픔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사65:17-25입니다.

 

(사 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사 65:18)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
(사 65:19)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에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사 65:20)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어린이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를 젊은이라 하겠고 백 세가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자이리라
(사 65:21)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 안에 살겠고 포도나무를 심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사 65:22) 그들이 건축한 데에 타인이 살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이 심은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내가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이며 
(사 65:23)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이 생산한 것이 재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들의 후손도 그들과 같을 것임이라
(사 65: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사 65:25)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전혀 다릅니다. 인간의 머리로는 보면 사기를 치고 거짓말을 하는 세상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무엇이라고 하던가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된 자요,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아름다운 이름과 악한 이름을 가진 자요 그리고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는 자들이라고 고후6장에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비합리적이고 비상식적인 세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기본원칙보다 더 나은 비교할 수 없는 새 원리로 세워진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좀 더 이해를 위하여 마20:1-16입니다.

(마 20: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마 20:2) 그가 하루 한 데나리온씩 품꾼들과 약속하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
(마 20:3)  제삼시에 나가 보니 장터에 놀고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마 20:4)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하니 그들이 가고
(마 20:5) 제육시와 제구시에 또 나가 그와 같이 하고
(마 20:6) 제십일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마 20:7)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마 20:8)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꾼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마 20:9) 제십일시에 온 자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거늘
(마 20:10)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마 20:11) 받은 후 집 주인을 원망하여 이르되
(마 20: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을 종일 수고하며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마 20: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마 20: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마 20: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마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하나님의 방법, 기준과 원리를 보면, 자기의 실력과 자격만큼 받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과 전혀 다릅니다. 물론 노력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백수건달이 되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개인의 수고도 허탕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마20장의 말씀은 세상에서의 힘의 원리와 보응원리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가진 나라라는 것입니다. 즉 “은혜의 원리가 세상의 힘과 상식의 원리보다 크다, 높다,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시편103편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1-17절입니다.

 

(시 103: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시 103:2)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시 103:3)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시 103:4)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시 103: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시 103:6)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
(시 103:7) 그의 행위를 모세에게, 그의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시 103:8)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시 103:9)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103:10)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시 103:11)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시 103: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시 103: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시 103: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시 103: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시 103:16)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시 103:17)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행한 대로, 생겨 먹은 대로, 처벌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받았지만 놀랍게도 그 본질이 참 저질에 불과한 존재들이었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불쌍하게 여겨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심지에 불과한 존재들이지만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형편없이 무너진, 전혀 소망 없는 자녀들을 제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완전 수리로 새롭게 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일반원칙인 보상의 기준에서 살던 일반인들로써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원리입니다. 특히 마20:16도 보세요.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써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써 나중 되리라” 아니 어떻게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 있단 말입니까? 비상식적이요 비논리적인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다윗 왕이 심히 슬퍼한다는 그 뜻은 왕권을 우선으로 하는 세상에서는 이해 될 수 없는 슬픔이지만, 그 반대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어떻다는 것입니까? 왕권, 즉 힘이 아닌 부권인 사랑을 말씀하시고 싶은 것입니다

 

때문에 사65장에서의 상황도 보면 상식적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이리가 어린 양과 놀고 사자가 풀을 먹는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 이치와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르다는 것의 의미를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이 세상의 원리와 기준하고는 전혀 비교할 수 없는, 불의가 존재할 수 없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오직 하나님의 기준만이 통하는 완전한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20장의 포도원에서의 보상 문제도 보세요! 상식적이지 않았기에 일군들에겐 문제가 될 수 있었지만 그러나 포도원 주인인 하나님이 불평하는 종들을 향하여 어떤 설명을 하던가요? 주인 뜻대로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럼 문제는 주인 뜻대로 하는 것이 일군들에게는 손해일까요? 득이 될까요? 깊이 생각해 보세요! 수고로 판단하지 않는 나라입니다. 수고로 판단하지 않기에 어떤 나라일까요? 자기의 자리에서 늘 최선을 다하는 나라, 이런 저런 이유 다 품으면서, 힘든 이웃을 보살펴 주지 못하여 안달하는 나라, 남을 나보다 더 낫게 여기는 나라, 그래서 억울함이 없는 나라, 있고 없는 것의 차별을 두지 않는 나라, 하나님의 기준으로 늘 질서를 유지하므로 감사와 기쁨과 평안만이 넘치는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처럼, 우리들의 기준처럼, 하나님의 나라도 만약에 실력대로 주고 노력하는 대로 보상을 한다면, 경쟁하여 먹고 살아야 되는 이 세상과 다르지 않다면 천국일 수 있을까요? 영원할 수 있을까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고백과 찬송이 무색해 지는 것이 아닙니까? 힘의 나라, 경쟁해야 되는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라면, 예수님을 보낼 필요도 십자가에서 죽을 필요도 없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힘의 차원이 아니라 거룩하신 완벽하신 하나님의 뜻만이 통하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심히 울었던 것입니다. 힘의 왕이 아니라 부권 즉 사랑이 우선된 왕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상징합니까? 네 맞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압살롬과 전혀 다르지 않은 악하고 못된 우리들의 죽음과 저주에 대하여 그 녀석들 쌤통이야~ 잘 되었어~하시면서 박수를 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살리시려고 회복을 위하여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고  성육신만이 아니라 죽기까지 하십니다.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조롱하고 조소하고 모욕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몽땅 남김없이 다 내어주시면서 저주와 죽음의 문제를 완전하게 해결해 버리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그들에 대한 보복과 복수가 아니라 살리시려고 자기의 목숨까지도 다 포기하십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배신자들과 미워하던 자들까지도 다 살려버립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점, 죄인을 위하여 기약대로 기꺼이 죽어주시면서 당하신 예수님의 그 아픔을 다윗이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반역한 아들 압살롬을 미워하는 다윗이 아니라 심히 아파하고 있는 다윗을 보시면서 주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힘의 왕인 다윗이 아니라 부권이 우선된 사랑의 아버지 다윗을 우리들에게 보이고 있으십니다. 세상의 기준과 원리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다윗의 아픔입니다. 우리같이, 당시의 주님의 제자들같이 비교하고 질투하고 보상의 차원으로 신앙을 이해하는 한, 다윗의 이 아픔은 이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돌아갈 하나님의 나라는, 아니 지금도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진 지금 우리들이 머물고 있는 여기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좁은 길, 가시밭길을 영광과 자랑으로 여기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다윗처럼 드러내야 합니다. 우린 힘의 원리와 상식보다 더 높은 원리인 은혜의 원리가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을 드러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은혜와 사랑과 긍휼이 설 자리가 없게 됩니다. 성도의 마음과 교회 안에는 모두가 좋아하는 그 힘과 재물이 아무리 비비고 들어오고 싶어도 들어올 구석이 전혀 보이지 않아야 되는 곳이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오직 바보들과 못난 자들과 살리려고 아파서 우는 자들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면 다 못난 사람들로 보여 져야 합니다. 그 못난 우리들이 이젠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자가 되었기에 지혜롭고 명철하고 따뜻하고 온유한 자로 나타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자신을 맡겨 온유하고 겸손하고 선한 자로서 누구에게든지 심지어 원수를 만나더라도 불평할 줄 모르고 미워할 줄 모르는 자로, 그리고 욕심을 모르는 거룩한 바보가 되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압살롬과 아히도벨처럼 힘이 우선이 되다가보니까, 반역을 하게 되고 자살로 끝나더라는 것입니다.

 

잠17:4를 봅니다. “악을 행하는 자는 궤사한 입술을 잘 듣고 거짓말을 하는 자는 악한 혀에 귀를 기울이느니라

잠19:28입니다. “망령된 증인은 공의를 업신여기고 악인의 입은 죄악을 삼키느니라”

잠19:2입니다.  "지식 없는 소원은 선하지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잘못 가느니라"

 

잠언서의 말씀대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다가 보니까, 당연히 그들의 소원이 선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닙니까? 게다가 얼마나 급히 서두른 반역이었던가요? 발이 급한 사람은 그릇될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권력이 아닌 사랑하는 아비 된 마음으로 울면서 도망하고, 압살롬을 보살피라고 하는 다윗이 당연히 이해가 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 가치를 보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힘이 아닌 공의가 충만한 나라입니다. 오직 정결하고 경건하고 은혜만이 차고 넘치는 나라이기에 힘의 압살롬에게 왕권을 빼앗기면 안 되는 것입니다. 특히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특별한 인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을 다윗에게 맡기셨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선한 도구가 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린 또 다윗의 특별하다는 말씀에 대하여 오해하게 됩니다. 다윗의 그 특별함은 다윗이 지닌 그의 능력과 실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이해를 다윗을 통하여 나타내시려고 다윗을 세워 주신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린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우리들이, 선한 구석이라고는 먼지 털만큼도 없었던 우리들이 그래서 미워할 줄만 알고, 감사는 몰라 불평만 하며 살던 우리요, 불망이 가득하여 화목을 이루지 못하던 우리요, 오직 욕심과 이기심으로 주변을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던 우리들이, 어느 날부터, 교회를 다니면서 말씀을 듣고, 기도의 삶을 유지하게 되면서 서서히 달라져 가더라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감사하는 자로, 이해하여 화목을 이루려는 자로, 깨뜨리는 자가 아닌 세워주는 자로, 나를 낮추고 이웃을 높여 존경을 받는 자로 말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증거가 되는 것입니까? 나를 살리기 위한 2000년 전의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완전 사실로 드러나더라는 것입니다

 

보잘 것이 없었던 짐승보다 못하던 우리들이 어느 날부터 달라지는데 그 이유가 바로 그동안 쌓아왔던 자신의 능력과 실력과 힘이 아니라 믿음 즉 나를 위하여 죽어 주신 주님 때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이점을 놓치면 안 됩니다. 단지 하나님을 알게 하는데 필요한 다윗이지, 다윗의 그 힘과 능력을 드러내어 영웅시 하는데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신 말씀을 보면 렘9:23-24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 용맹을 자랑치 말라 부자는 그 부함을 자랑치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을 알면 감정이 아닌 믿음으로 울게 됩니다. 저주에 묶인 자들을 살리려고 울보가 됩니다. 풀이를 하자면, 다윗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 편을 들고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을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완벽하신 그 뜻과 도무지 측량할 수 없는 한없는 사랑하시는 그 마음을, 아비 된 심정으로 눈물을 흘리게 되는 다윗이라는 말씀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여 흘리는 눈물입니다. 반역자가 되어 죽어버린 아들 압살롬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그 진지하신 사랑하심을 아버지로써 보여주지 못하여 심히 통곡하며 울었던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물은 어떤 눈물이던가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써의 눈물입니까? 그래서 우린 다시 한 번 자신의 신앙고백에 대하여 깊이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로써의 가지는 그 특권이 무엇인지를 이런 시간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된 우리의 신앙의 근거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하나님을 말씀을 통하여 알아가면서 확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앎과 확증으로 울어야 합니다. 그 앎과 확증으로 우린 자기의 자리를 지켜내야 합니다. 그 앎과 확증으로 우린 우리의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내려놓아야 합니다. 

 

결론입니다. 바로 삼하18:33에서 다윗의 그 마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에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다윗의 이 깊은 슬픔 속에서 누가 보이던가요? 우리 대신 죽어 주신 예수님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약대로 나 대신 죽어주셨기에 압살롬이었던 우리가 재창조가 되어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었고 그래서 지금 우리가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천국을 소유한 거룩한 존재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린 무엇이 힘이요 능력이 되어야 할까요? 억울하고 좌절된 이 세상 안에서의 가난한 이웃들이 주님의 제자들로부터 위로와 격려와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적자생존, 양육강식이 통하는 이 혼돈과 흑암과 공허가 가득한, 그래서 힘없는 사람들이 안전할 수 없는 이 세상 안에서, 약속을 받고 천국을 소유한 성도로부터,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고 넓고 깊은 마음을 갈수록 고스란히 드러내야 합니다. 대신 당하여 주는 나, 대신 아파해 주는 나, 대신 손해까지도 감수해 주는 자신이 되어서 하나님 아버지의 한없으신 그 사랑을 드러내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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