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교회

2/28/2021 - 사무엘하17:1-29 본문

주일 설교 말씀

2/28/2021 - 사무엘하17:1-29

PastorYK 2021. 3. 1. 15:00

말씀: 삼하 17:1-29                                          

제목: 무너지는 아비도벨의 좋은 모략

 

 

우리 교회의 박 집사님은 가끔 어떤 주의하라는 점에 대하여 누군가에게 들으면 곧장, 카톡으로 그 정보를 보내주십니다. 이런 일이 있다고 하니까, 산돌교회 식구들은 주의하시라고 그런 정보를 보내주시는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눈뜨고 당하면 안 되니까, 그런 사건에 대하여 못 들어서 당했다고 쩔쩔매면 안 되기에, 사전에 막아주시려는 박 집사님의 배려하시는 따뜻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점은 왜 세상에서의 그런 문제점들에 대하여서 많은 관심을 갖고 모두가 열심히 동참하면서도, 성경에서의 심각한 경고에 대하여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시나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암논과 압살롬이 되어서도, 시바가 되어서도, 시므이가 되어서도, 그리고 자살하고 만, 다윗왕도 인정한 모사 아히도벨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 결과는 참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재앙과 저주는 당연히 알고 있는 자들이 모르는 이웃들에게 도시락을 싸 들고 다니면서라도 알려야 합니다. 그리고 각자가 이렇게 망한 자들에 대하여 고민하면서 그 문제점들을 풀어가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오늘 말씀도 보세요! 결국 하나님을 믿지 못한 자들의 그 종말이 어떤가요? 

 

버려집니다. 일시적이 아니라 영원히 버려집니다. 그래서 준비하게 된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기에게 복과 행복을 주시려고 어떤 기적의 능력과 힘이 도와주지 못하여 안달하고 계시는 분이 자기 인생 가운데 깊이 간섭하시고 계심을 거의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살다가보면 느즈막한 시기에 아는 사람들은 알게 됩니다. 물론 성경에서도 말씀하십니다.

 

잠16:1입니다.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 나느니라”

잠16:9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잠20:24입니다.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

 

그런데 어떤가요? 우린 끊임없이 자기의 성공을 위하여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계획하고 경영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압살롬이나 아히도벨처럼 자기 뜻대로 늘 되지 않습니다. 거의 실패하고 맙니다. 그런데 신앙을 갖게 되면서 왜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두셨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 선악과를 통하여 인류의 주인이 계신다는 점과 그리고 그 누구도 자기의 모든 과정이 자기의 뜻대로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안에서의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사실이라면 자유의지를 가진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고 싶은 대로가 아닌 당연히 그분의 뜻을 찾아 전심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당연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순종이 아니라 자기의 삶이 자기의 것인 냥, 자기 뜻대로 계획하고 경영하다가 망하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누구 꼴이 됩니까? 자기의 계획이 폐하여 졌음을 알고 자살한 아히도벨과 긴 자기 머리칼이 큰 상수리나무에 걸려서 요압의 창에 찔려 죽음을 당하는 압살롬 짝이 날 것입니다. 자기의 인생을 자기의 것으로 믿고 사는 자들의 종말을 보면, 무시되었다고 자살하거나 또는 자기 머리칼이 나무에 걸려 도움을 받아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적군의 창에 찔려 죽더라는것입니다. 이런 개인의 저주나 이런 개인의 재앙이 속수무책으로 순간적으로 닥쳐오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자기의 뜻과 계획이 이렇게 무산이 되어 참담한 죽음을 맞아야 할까요? 

 

결론은 압살롬과 아히도벨처럼 하나님의 뜻에 무지 했거나 의심입니다. 제가 볼 땐, 왜 압살롬이 아버지를 믿지 못하고 반역을 했을까요? 그리고 왜 아히도벨이 자살을 해야 했을까요? 압살롬의 경우, 그는 아버지 다윗의 간통과 살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고 게다가 자기 여동생 다말을 강간한 암논에 대한 아버지 다윗의 좌시가 이런 반역의 동기가 되고 그리고 악인 아히도벨의 꾀인 아버지 후궁을 범하게 되면서 결국 버려진 것으로 저는 봅니다. 

 

그리고 아마도 자기 의가 강했던 아히도벨도 압살롬과 그 뜻이 통했다고 봅니다. 그래서 의기투합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의기투합한다고 하여 자기 뜻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자기 뜻대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왜요? 우주의 주인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전 역사를 주관하시는 능력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자기의 뜻과 의지를 하나님보다 우선으로 두면, 자기의 뜻과 계획을 더 믿으면, 재앙은 끊임없이 다가옵니다. 그 대상은 무제한적입니다

 

압살롬과 아히도벨에게만 제한된 저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든지 어느 나라든지 이런 저주나 재앙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창4:1-9입니다.

 

(창 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창 4:2) 그가 또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였고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더라
(창 4: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창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창 4: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창 4:6)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창 4:7)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창 4: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
(창 4: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죄인된 가인의 감정은 동생 아벨을 죽이기까지 합니다. 자비나 양보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인류 역사의 최강국들이 왜 망합니까? 사37장인데 너무나 길기에 사37:21-29, 36-38만 봅니다.

 

(사 37:21)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사람을 보내어 히스기야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네가 앗수르 산헤립 왕의 일로 내게 기도하였도다 하시고  
(사 37:22) 여호와께서 그에 대하여 이같이 이르시되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조소하였고 딸 예루살렘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사 37:23) 네가 훼방하며 능욕한 것은 누구에게냐 네가 소리를 높이며 눈을 높이 들어 향한 것은 누구에게냐 곧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에게니라 
(사 37:24) 네가 네 종을 통해서 주를 훼방하여 이르기를 내가 나의 허다한 병거를 거느리고 산들의 꼭대기에 올라가며 레바논의 깊은 곳에 이르렀으니 높은 백향목과 아름다운 향나무를 베고 또 그 제일 높은 곳에 들어가 살진 땅의 수풀에 이를 것이며  
(사 37:25) 내가 우물을 파서 물을 마셨으니 내 발바닥으로 애굽의 모든 하수를 말리리라 하였도다 
(사 37:26) 네가 어찌하여 듣지 못하였느냐 이 일들은 내가 태초부터 행한 바요 상고부터 정한 바로서 이제 내가 이루어 네가 견고한 성읍들을 헐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노라 
(사 37:27) 그러므로 그 주민들이 힘이 약하여 놀라며 수치를 당하여 들의 풀 같이, 푸른 나물 같이, 지붕의 풀 같이, 자라지 못한 곡초 같이 되었느니라
(사 37:28) 네 거처와 네 출입과 네가 나를 거슬러 분노함을 내가 아노라
(사 37:29) 네가 나를 거슬러 분노함과 네 오만함이 내 귀에 들렸으므로 내가 갈고리로 네 코를 꿰며 재갈을 네 입에 물려 너를 오던 길로 돌아가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사 37:36)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팔만 오천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본즉 시체뿐이라
(사 37:37) 이에 앗수르 산헤립 왕이 떠나 돌아가서 니느웨에 거주하더니
(사 37:38) 자기 신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할 때에 그의 아들 아드람멜렉 사레셀이 그를 칼로 죽이고 아라랏 땅으로 도망하였으므로 그의 아들 에살핫돈이 이어 왕이 되니라

 

자기 뜻대로 행하다가 망했던 것입니다. 은혜를 입었던 구약의 이스라엘도 볼까요? 한 곳만 봅니다. 

 

사30:1-5입니다.

(사 30: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패역한 자식들은 화 있을진저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며 맹약을 맺으나 나의 영으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죄에 죄를 더하도다
(사 30:2) 그들이 바로의 세력 안에서 스스로 강하려 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하려 하여 애굽으로 내려갔으되 나의 입에 묻지 아니하였도다
(사 30:3) 그러므로 바로의 세력이 너희의 수치가 되며 애굽의 그늘에 피함이 너희의 수욕이 될 것이라
(사 30:4) 그 고관들이 소안에 있고 그 사신들이 하네스에 이르렀으나 
(사 30:5) 그들이 다 자기를 유익하게 하지 못하는 민족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리니 그 민족이 돕지도 못하며 유익하게도 못하고 수치가 되게 하며 수욕이 되게 할 뿐임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의심하고 당시 최강국이었던 애굽을 믿어 앗수르의 공격을 막아 보려던 것입니다. 내내 망하는 길만을 원 없이 따르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그 종말을 볼까요? 사30:6-14입니다.

 

(사 30:6) 네겝 짐승들에 관한 경고라 사신들이 그들의 재물을 어린 나귀 등에 싣고 그들의 보물을 낙타 안장에 얹고 암사자와 수사자와 독사와 및 날아다니는 불뱀이 나오는 위험하고 곤고한 땅을 지나 자기에게 무익한 민족에게로 갔으나 
(사 30:7) 애굽의 도움은 헛되고 무익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을 가만히 앉은 라합이라 일컬었느니라
(사 30:8) 이제 가서 백성 앞에서 서판에 기록하며 책에 써서 후세에 영원히 있게 하라
(사 30:9) 대저 이는 패역한 백성이요 거짓말 하는 자식들이요 여호와의 법을 듣기 싫어하는 자식들이라
(사 30:10) 그들이 선견자들에게 이르기를 선견하지 말라 선지자들에게 이르기를 우리에게 바른 것을 보이지 말라 우리에게 부드러운 말을 하라 거짓된 것을 보이라 
(사 30:11) 너희는 바른 길을 버리며 첩경에서 돌이키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우리 앞에서 떠나시게 하라 하는도다
(사 30:12) 이러므로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이 말을 업신여기고 압박과 허망을 믿어 그것을 의지하니
(사 30:13) 이 죄악이 너희에게 마치 무너지려고 터진 담이 불쑥 나와 순식간에 무너짐 같게 되리라 하셨은즉
(사 30:14) 그가 이 나라를 무너뜨리시되 토기장이가 그릇을 깨뜨림 같이 아낌이 없이 부수시리니 그 조각 중에서, 아궁이에서 불을 붙이거나 물 웅덩이에서 물을 뜰 것도 얻지 못하리라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구약 내내 그랬을 뿐만이 아니라 그 위대했던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요한도 봅니다. 마11:2-3입니다.

 

(마 11: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마 11: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보세요! 마11:4-6입니다.

 

(마 1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마 11: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 11: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주님께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다른 이를 찾지 말고 다른 이가 바로 나야~ 라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의심하던 세례요한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내리시던가요?

마11:7-11상입니다.

(마 11: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마 11: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마 11: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마 11: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마 11:11 상)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최고의 선지자라고 극찬을 해 주십니다. 그러나 마11:11하-12를 보시면,

(마 11:11 하)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마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천국을 침노하라고 하십니다. 무슨 뜻일까요? 자기의 계획과 힘으로는 천국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계획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오직 성부하나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아 죄 없이 희생된 예수의 핏 값으로 말미암는, 너희들의 순종으로 천국을 소유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게 하시려고 먼저 보냄을 받은 세례요한까지도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기까지가 요한의 운명이었다면 그도 결국 버려져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뜻을 깨닫고 헤롯으로부터 목이 잘리면서, 거룩한 순교로 그의 인생을 마감합니다.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간섭으로 영원히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또 봅니다.

 

요14:6-11입니다.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 14:7)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요 14: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요 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요 14: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 14:11)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

 

빌립입니다. 빌립이 하는 질문을 보세요! 예수님에게 성부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시던가요

 

“나를 본 자가 하나님을 보았거늘 이렇게 오랫동안 나와 함께 있으면서도 아직도 아버지를 못 봤단 말이냐?” 라고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주시는 tip이 있습니다. 요14:11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그 일로 말미암아 나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결국 이 답변은 누구에게 주신 답변과 동일합니까? 오시겠다는 그이가 바로 당신입니까? 라고 예수님을 의심하여 자기 제자를 예수님에게 보낸 세례 요한과 동일한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왜 빌립이 성부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했고 세례 요한이 당신 맞습니까? 하고 의심을 한 것입니까? 예수님의 사역에 대한 이해를 못한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대로 로마를 쳐부수지 않았다고 하여, 그들이 의심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의심이 아담으로부터 이스라엘의 구약을 지나 지금까지도 하나님을 여전히 의심하고 있는 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닙니까?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하나님을 예수님 안에서의 하나님,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꺼내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으로서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버려지고만 수많은 등장인물들처럼 지금까지도 수많은 교인들이 끊임없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이루어지기만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니지 않습니까? 성경에 등장하는 타락한 인물들을 보면 다 세상의 성공이 신앙의 목적이라면, 예수님은 힘이 아니라 거룩함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면 누가 됩니까? 

 

쫓겨난 아담, 동생을 죽인 가인, 홍수로 죽은 노아의 사람들, 앗수르 왕 산헤립이나 압살롬이나 아히도벨의 전철만을 밟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을 통하여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하나님의 뜻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면서 다윗도 세례 요한도 빌립도 베드로도 바울도 모두가 하나님께서 칭찬하시고 자랑하시는 새로운 자들로 영원히 빛나는 하늘의 별이 되었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볼 때에는, 다윗이 망할 줄 알았는데 다윗이 회복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진리를 말씀을 통하여 진정한 복과 저주의 삶이 어디로부터 나오는지에 대하여 확인이 되었다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전히 망하는 길로 갈 수 있을까요? 그럴 수는 없는데, 여전히 죽은 자를 살리는 사랑의 하나님을 의심하더라는 것입니다.~ 아니 힘으로 질서와 평화를 무너뜨리려는 자기를 의심해야지, 왜 살리시는 하나님을 의심합니까? 이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헛된 뜻과 계획을 막아, 버려지지 않도록 감옥으로 쳐 넣어버릴망정, 하는 대로 내버려두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요? 압살롬처럼 자기 머리칼이 나무에 걸려 죽을 수 있고 아히도벨처럼 자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가인처럼 동생을 죽일 수도 있고 앗수르 왕 산헤립처럼 자식들의 칼에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봅니다. 요14:12-14입니다.

(요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요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요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약속입니까? 모든 일을 다 이루시고 다시 하나님 아버지에게로 돌아가시는 주님께서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내가 행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 있던가요? 기도를 수없이 하지만 응답을 받지 못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왜 응답을 받지 못합니까? 

 

힘으로 세상을 무너뜨리려는 자기의 뜻과 계획이 우선이기 때문입니다. 압살롬이 되어 달라는 기도를 주님의 이름하고 자살한 아히도벨의 길을 가게 해 달라고 주님의 이름으로 부르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린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위대한 선물인지를 놓치면 누구든지 망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승리를 위한 약속이 아닙니다. 앞으로 도래할 새 나라,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의 약속된 삶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나라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깊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성공과 승리를 위하여 수고하는 눈먼 자들은 볼 수 없기에 또한 말씀을 들어도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에 늘 빛을 받은 성도들을 향하여 조소와 조롱을 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여전히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자들이 세상의 기준으로 평가를 하려고 합니까? 성도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기에, 심판의 날까지, 믿음으로만 행하는 자들이지, 보이는 힘과 능력으로 행하지 않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말씀을 드려도 여전히 돈이 모든 것이어야 합니까? 돈과 힘이 우선이 되면 믿음은 완전 필요 없게 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힘과 능력이 모든 것이 되면 십자가도 필요 없습니다. 당연히 믿음도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 아니 어떻게, 밤낮으로 산과 새벽에 다들 예수님의 이름으로 힘과 능력만을 찾고 구하고 두드릴 수 있을까요? 참으로 아찔하게 합니다. 믿음이라는 뜻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가졌다는 그 뜻에는 언제나 자기의 삶의 모든 시작과 끝이 보호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을 보세요~ 실패했지만 성공한 자가 됩니다. 세례 요한, 베드로, 빌립 그리고 바울을 보세요~ 다 실패한 자들이었지만 믿음 즉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그 믿음으로 인하여 순종하므로 성공합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에서도 두드러집니다. 다윗은 후새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느냐?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압살롬이 후새의 계략을 따르지 않고 아히도벨의 계략을 쫓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묻고 싶겠지만, 그러나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편을 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다윗을 지켜 주시기에 회복된 것이지 다윗의 힘이 아닙니다. 올바른 믿음은 나를 이렇게 사용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기 이전에,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그 일의 내용 안에 자기 자신이 이미 들어가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엡2:6입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미 우린 우리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자기 처소가 확보되어 있습니다

 

단지 지금은 우리들의 하나님 나라의 처소가 비어있지만 그러나 우리의 이름이 박힌 문패가 걸린 그 처소로 돌아오되, 다 이루고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도 아픔도 질병도 코로나 19도 존재할 수 없는 오직 행복과 감사와 기쁨만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가 나를, 우리를 다 이루고 속히 돌아오라고 손짓하고 있습니다. 먼저 돌아간 믿음의 조상들이 주님과 함께 우리의 승리를 위하여 땀을 흘리고 계십니다. 

 

이해를 위하여 말씀을 드리면 이미 우린 우승 트로피를 거머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왜 이 사실을 몰라 허둥지둥 대야 합니까? 이미 우린 승리를 했는데, 승리자답게 여유와 따뜻함으로 자기 자리를 믿음으로 굳게 지켜내야 되는 것이 아닌가요? 우승하려고 발버둥을 치려고 기도하고 신앙고백을 해 본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누가 보면 꼴불견입니다. 

 

더 이상 우승컵을 들고 우승하려고 몸부림을 치려고 하지 마시고, 우승자답게, 악을 선으로 갚고, 원수를 위하여 축복해 주고, 오른 뺨을 맞으면 왼 뺨도 돌려 대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린 이미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을 말미암아 거룩한 존재들입니다. 부끄럽게 죄의 승리를 위하여 암논, 압살롬이나 아히도벨처럼 애쓰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물론 우승자는 끝까지 우승자이어야 하기에 그 자리를 지켜내야 되는데, 선수들은 끊임없이 훈련을 하지 않을 수 없듯이, 승리한 성도들도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기를 쉬지 말아야 하고 끊임없이 주님의 이름으로 나와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수고를 통하여 매일의 은혜를 확보해야지만 합니다. 

 

벧후1:10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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