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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돌교회
3/21/2021 사무엘하 20:1-26 본문
말씀: 삼하 20:1-26
제목: 끊이지 않는 언약 속의 환란
우리는 이 세상의 상태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또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안전할 수도 평화로울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화롭다고 하여도 실은 거짓된 평화라는 것이 아닙니까? 나는 안전해! 라고 해도 그 안전도 역시나 거짓 안전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의 실체입니다. 아무도 이 세상에서는 안전할 수도 없고 원하는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다름이 아니라 힘의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힘 안에서는 늘 불안과 혼돈과 공허와 어두움만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가장 큰 문제는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힘의 세상에서 즐거워하려고 하거나 잘 살아보려고 한다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생각인지를 알게 할 것입니다. 오늘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왕, 천하를 다스리던 다윗만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아들 압살롬 반역의 문제를 힘들게 수습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다시 베냐민 지파의 비그리의 아들 세바라 하는 자의 반역으로 다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어 갑니다. 동족상잔의 전쟁이 일어납니다. 게다가 다윗 왕이 삼하19:13에서 압살롬을 따르던 아마사를 군대장관으로 세우면서 요압의 시기로 죽음을 당합니다.
19:13 너희는 또 아마사에게 이르기를 너는 내 골육이 아니냐 네가 요압을 이어서 항상 내 앞에서 지휘관이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시기를 바라노라 하셨다 하라 하여
요압의 첫째 살인 사건은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삼하3:17-30입니다.
3:17 아브넬이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여러 번 다윗을 너희의 임금으로 세우기를 구하였으니
3:18 이제 그대로 하라 여호와께서 이미 다윗에 대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종 다윗의 손으로 내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블레셋 사람의 손과 모든 대적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리라 하셨음이니라 하고
3:19 아브넬이 또 베냐민 사람의 귀에 말하고 아브넬이 이스라엘과 베냐민의 온 집이 선하게 여기는 모든 것을 다윗의 귀에 말하려고 헤브론으로 가니라
3:20 아브넬이 부하 이십 명과 더불어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가니 다윗이 아브넬과 그와 함께 한 사람을 위하여 잔치를 배설하였더라
3:21 아브넬이 다윗에게 말하되 내가 일어나 가서 온 이스라엘 무리를 내 주 왕의 앞에 모아 더불어 언약을 맺게 하고 마음에 원하시는 대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게 하리이다 하니 이에 다윗이 아브넬을 보내매 그가 평안히 가니라
3:22 다윗의 신복들과 요압이 적군을 치고 크게 노략한 물건을 가지고 돌아오니 아브넬은 이미 보냄을 받아 평안히 갔고 다윗과 함께 헤브론에 있지 아니한 때라
3:23 요압 및 요압과 함께 한 모든 군사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말하여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이 왕에게 왔더니 왕이 보내매 그가 평안히 갔나이다 하니
3:24 요압이 왕에게 나아가 이르되 어찌 하심이니이까 아브넬이 왕에게 나아왔거늘 어찌하여 그를 보내 잘 가게 하셨나이까
3:25 왕도 아시려니와 넬의 아들 아브넬이 온 것은 왕을 속임이라 그가 왕이 출입하는 것을 알고 왕이 모든 것을 알려 함이니이다 하고
3:26 이에 요압이 다윗에게서 나와 전령들을 보내 아브넬을 쫓아가게 하였더니 시라 우물 가에서 그를 데리고 돌아왔으나 다윗은 알지 못하였더라
3:27 아브넬이 헤브론으로 돌아오매 요압이 더불어 조용히 말하려는 듯이 그를 데리고 성문 안으로 들어가 거기서 배를 찔러 죽이니 이는 자기의 동생 아사헬의 피로 말미암음이더라
3:28 그 후에 다윗이 듣고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
3:29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의 아버지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나병 환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떨어진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 하니라
3:30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가 아브넬을 죽인 것은 그가 기브온 전쟁에서 자기 동생 아사헬을 죽인 까닭이었더라
요압이 자신의 동생 아사헬과 싸우다가 아사헬을 죽인 아브넬을 다윗이 베냐민 지파와 연합을 위하여 아브넬과 합의하고 그리고 평안하게 돌려보내자, 전쟁에서 돌아온 요압이 이 사실을 알고 아브넬을 살해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두 번째 사건입니다. 이렇게 이런 저런 사건들이 이스라엘 안에 쉬지 않고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주변을 환란 속에서 살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은 그 이유 두 가지를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첫째는 주변을 환란 속에서 또는 환란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사랑하심과 함께 도와주시는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셔서, 즉 일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여 오직 믿음으로 살게 하시려는 뜻입니다.
둘째로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이 세상의 환란 안에서 더 큰 믿음을 확보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묶어서 오늘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린 오늘 말씀을 통하여 속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기에 자신의 주변에 환란과 고난과 꼬이는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슬아슬한 살얼음판 위에서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역사를 통치하시고 주관하시지만, 재림의 주가 오실 때까지는 믿는 자들에게는 운명처럼 다윗과 같이 고난, 환란 속에서 살게 됩니다. 굳이 표현한다면 우리 주변은 영적인 방사선이 가득한 상태요, 언제 우리들이 질병과 사고로 사망할지 모르는 곳입니다. 그 무엇도 보장할 수 없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언제나 방해하는 세력이 수시로 교묘한 방법으로 질서와 법을 무너뜨리지 못하여 난리를 칩니다. 선한 삶을 살아도 착해도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곳이 이 세상입니다. 100% 언제든지 어떤 난리 속으로 휩쓸릴지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도 앞으로도 예외가 없습니다. 역경 속에서 살아야 되는 그 이유는 결국 인간의 죄 때문이요 특히 힘이 해결할 수 있다는 무지로 인한 결과입니다. 특히 다윗이 정치적 균형을 위하여 아마사를 군대장관으로 세웠지만 요압에 의하여 죽게 됩니다. 요압이 아마사를 죽이는 이유는 시기와 질투입니다. 혼자 군대장관 노릇을 해 먹겠다는 요압의 심보입니다. 전형적인 세상 사람입니다. 특히 요압은 다윗의 오른 팔로써 다윗의 모든 짓궂은 일들도 다 도맡아서 해결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요압은 눈의 가시와 같은 존재로 남아 있습니다. 다윗에게 가시와 같은 존재이지만, 그러나 다윗은 요압 때문에 손해를 보지 않습니다. 강한 세력을 가진 요압으로 피곤했지만 그러나 다윗은 방심할 수 없었고 늘 하나님만 바라보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반란을 일으키는 베냐민 지파의 건달 세바라는 인물도 보세요! 초대 왕 사울이 베냐민 지파에서 나왔기에 이런 문제의 원인이 되어 이렇게 기회만 생기면 유다지파와 남은 지파간의 분란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이 권력 세계는 어떻다고 했습니까? 왕의 자리에 누구든지 간에, 걸리적거리면 사정없이 제거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베냐민 지파 세바에 의하여 다시 피바람이 동족 간에 붑니다. 결국 지혜로운 한 여인에 의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건달, 세바는 제거가 됩니다. 게다가 다음 주일에 드릴 말씀이지만, 삼하21장의 말씀도 보세요! 죽은 사울 왕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에 기근, 재앙이 임하게 됩니다.
누가 하나님을 믿으면 이 세상에서 안전할 수 있고 평강이 넘친다고, 늘 성공적인 삶이 보장된다고 하던가요?~ 거짓말인데, 분명 거짓말일진데, 여전히 속아 넘어가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세상의 힘과 즐거움에 속고 있기에 요압과 세바처럼 멋대로 살고 있지 않던가요? 하라는 것은 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것은 죽어라고 합니다. 마치 죽지 않을 사람처럼 살고 있고, 주님 만날 준비 없이 즐거움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던가요?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는 식으로 살아가면 안 됩니다.
세상의 힘과 즐거움은 무엇과 같다고요? 달콤한 candy에 불과합니다. 그러다가보니, 지식 없는 소원이 선하지 못하여 늘 요동하게 되고, 세상 달콤함에 빠져 있기에 건달 세바와 같은 이들의 거짓말에 다 속아, 이렇게 나라가 지파간의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베냐민 지파의 건달 세바가 하는 “우리가 다윗과 함께 할 분의가 없다”는 말에 유다 지파 외, 다른 지파들이 다윗 곁을 떠나, 세바를 따르더라는 것입니다. 쉽게 동요하고 맙니다. 무슨 말씀을 우린 여기서 알아내야 할까요?
본성이 오염된 자들은 언제나 살리는 말씀보다는 죽고 무너지는 말에 깊은 관심과 즐거움을 갖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복 받기를 전혀 원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순종의 복보다는, 반역하더라도 그래서 변고를 당할지라도 한 번, 터뜨려서 힘의 나라를 세워서, 원 없이 멋대로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소망은 우리들에게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닌가요? 우리 6살짜리 성지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기에 하고 싶은 데로 못해 안달합니다.
그러니 더 더러운 우리들은 두말이 필요 없습니다. 멋대로 하고 싶어서 건달 세바 못지않게 꼼수와 수작을 부립니다. 때문에 믿음의 성도들은 늘 경계를 해야 하고 깨어 있어야 하고 근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를 믿습니까? 자기 자신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그런 조건이 성도 자신에게 손해입니까? 복이 됩니까? 믿음으로 정과 욕심을 못 박아 제압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몸은 괴롭겠지만, 결국 복이 됩니다. 물론 세상 즐거움과 자랑을 채우지 못하기에 짜증은 나겠지만, 성도된 우리들에게 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지 절실히 깨닫게 됩니다.
왜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되는지를 확보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위험하기에 살얼음판 위의 삶과 다르지 않기에, 우리의 믿음이 그 고난 속에서 싸우면서 자랍니다. 그러나 그런 진리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어떤가요? 세상 자랑과 자기 즐거움 때문에, 이생의 자랑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하지 않기에, 쉽게 거저먹으려는 그들 때문에, 그 공동체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됩니다. 피곤한 관계가 되고 맙니다.
이기심으로 인하여 자기가 속해 있는 공동체가 불안 그 자체가 되게 합니다. 그러다가 인내하지 못하면 터지고 맙니다. 그래서 망합니다. 아이들까지도 당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쑥대밭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왜, 여전히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려고 합니까?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누구든지 다 망합니다. 여지가 없습니다.~ 때문에 성도된 우린 누군가가 끊임없이 방해를 하더라도 끝까지 곁에서 참아줘야 합니다. 악을 선으로 갚으면서 악인을 축복하면서 믿음이 무엇인지를 그들을 위하여 끝까지 견뎌내야 합니다.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다들 악의 달콤함에 넘어갑니다. 자기 죄성과 맞는 악의 세력과 손을 잡고 맙니다. 세바의 수작에 다수가 넘어가 버리듯이 속게 됩니다. 속는다는 것보다는 망하는 세상의 길이 믿음의 길보다는 더 좋기에 그럴 것입니다. 망하는 자기 선택이지만, 먹음직스럽고 보암직스럽고 탐스러운 세상이 좋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오늘 말씀처럼 전쟁을 불사합니다.
우리는 가족 간의 다툼을 정중하게 사양하던가요? 아니면 망하는 자기 즐거움과 정욕을 위하여 불사하던가요? 성도라면 가족의 안전과 평화를 위하여 정중하게 용납하고 인내하면서 믿음의 능력을 드러내셔야 합니다. 그런데 요압을 보세요! 삼하3:39입니다.
3:39 내가 기름 부음을 받은 왕이 되었으나 오늘 약하여서 스루야의 아들인 이 사람들을 제어하기가 너무 어려우니 여호와는 악행한 자에게 그 악한 대로 갚으실지로다 하니라
요압의 강한 세력을 나누려고 아마사를 군대장관으로 세웠지만 다윗이 세운 군대장관 아마사까지도 살해합니다. 너무나 요압이 막강한 세력을 쥐고 있었기에 그 세력을 다윗이 정치적으로 힘을 나누려고 할 때마다 요압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요압은 끝까지 다윗의 가시로 남게 하십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요압 때문에 더 큰 믿음의 왕이 되어 갑니다.
무엇과 같은가 하면, 시5:8, 27:11, 59:9입니다.
5:8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공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27:11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
59:9 하나님은 나의 요새이시니 그의 힘으로 말미암아 내가 주를 바라리이다
어항 속의 고기들이 사나운 메기 때문에 죽지 않고 싱싱할 수 있듯이, 말입니다. 요압 때문에 다윗은 늘 하나님만 의지하게 되면서 왕의 자리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자기편만 들어주는 사람들만이 있으면 결국 어떤 결과가 만들어지던가요? 망합니다. 연약해 집니다. 그러나 반대세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자신도 강해집니다. 그래서 다윗왕은 늘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교회와 가정 안에서 모두를 위하여, 나는 악인이 되리라고 하면 안 됩니다. 다윗이 세운 두 사람, 아브넬, 아마사를 죽인 군대장관 요압은 결국 솔로몬에 의하여 버려집니다. 먼저 다윗의 유언을 봅니다. 열상2:1, 5-6입니다.
2:1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2:5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그가 그들을 죽여 태평 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를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
2:6 네 지혜대로 행하여 그의 백발이 평안히 스올에 내려가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열상2:28-34입니다.
2:28 그 소문이 요압에게 들리매 그가 여호와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제단 뿔을 잡으니 이는 그가 다윗을 떠나 압살롬을 따르지 아니하였으나 아도니야를 따랐음이더라
2:29 어떤 사람이 솔로몬 왕에게 아뢰되 요압이 여호와의 장막으로 도망하여 제단 곁에 있나이다 솔로몬이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보내며 이르되 너는 가서 그를 치라
2:30 브나야가 여호와의 장막에 이르러 그에게 이르되 왕께서 나오라 하시느니라 그가 대답하되 아니라 내가 여기서 죽겠노라 브나야가 돌아가서 왕께 아뢰어 이르되 요압이 이리이리 내게 대답하더이다
2:31 왕이 이르되 그의 말과 같이 하여 그를 죽여 묻으라 요압이 까닭 없이 흘린 피를 나와 내 아버지의 집에서 네가 제하리라
2:32 여호와께서 요압의 피를 그의 머리로 돌려보내실 것은 그가 자기보다 의롭고 선한 두 사람을 쳤음이니 곧 이스라엘 군사령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유다 군사령관 예델의 아들 아마사를 칼로 죽였음이라 이 일을 내 아버지 다윗은 알지 못하셨나니
2:33 그들의 피는 영영히 요압의 머리와 그의 자손의 머리로 돌아갈지라도 다윗과 그의 자손과 그의 집과 그의 왕위에는 여호와께로 말미암는 평강이 영원히 있으리라
2:34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가 곧 올라가서 그를 쳐죽이매 그가 광야에 있는 자기의 집에 매장되니라
삶의 정답을 보고 듣고도 멋대로 즐기고 힘으로 살아가려는 악인의 최후는 이렇게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므비보셋과 같은 인물은 비록 두 다리를 절었지만, 그의 그 믿음으로 지금도 빛나고 있습니다. 므비보셋의 가치는 누구 때문에 나타난 믿음입니까? 그의 종, 건달 세바와 같은 시바입니다. 시바가 어떤 인물이었습니까? 삼하16:1-4입니다.
16:1 다윗이 마루턱을 조금 지나니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안장 지운 두 나귀에 떡 이백 개와 건포도 백 송이와 여름 과일 백 개와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싣고 다윗을 맞는지라
16:2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네가 무슨 뜻으로 이것을 가져왔느냐 하니 시바가 이르되 나귀는 왕의 가족들이 타게 하고 떡과 과일은 청년들이 먹게 하고 포도주는 들에서 피곤한 자들에게 마시게 하려 함이니이다
16:3 왕이 이르되 네 주인의 아들이 어디 있느냐 하니 시바가 왕께 아뢰되 예루살렘에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이스라엘 족속이 오늘 내 아버지의 나라를 내게 돌리리라 하나이다 하는지라
16:4 왕이 시바에게 이르되 므비보셋에게 있는 것이 다 네 것이니라 하니라 시바가 이르되 내가 절하나이다 내 주 왕이여 내가 왕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니라
감히 종된 놈이 왕에게 거짓말을 하고 자기의 주인을 완전 반역자로 만들어 버렸던 악한 종이었지만, 보세요! 므비보셋이 어떻게 시바를 통하여 자기 승리를 이루게 하시던가요? 삼하19:24-30입니다.
19:24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이 내려와 왕을 맞으니 그는 왕이 떠난 날부터 평안히 돌아오는 날까지 그의 발을 맵시 내지 아니하며 그의 수염을 깎지 아니하며 옷을 빨지 아니하였더라
19:25 예루살렘에서 와서 왕을 맞을 때에 왕이 그에게 물어 이르되 므비보셋이여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더냐 하니
19:26 대답하되 내 주 왕이여 왕의 종인 나는 다리를 절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그 위에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내 종이 나를 속이고
19:27 종인 나를 내 주 왕께 모함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
19:28 내 아버지의 온 집이 내 주 왕 앞에서는 다만 죽을 사람이 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나 종을 왕의 상에서 음식 먹는 자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내게 아직 무슨 공의가 있어서 다시 왕께 부르짖을 수 있사오리이까 하니라
19:29 왕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또 네 일을 말하느냐 내가 이르노니 너는 시바와 밭을 나누라 하니
19:30 므비보셋이 왕께 아뢰되 내 주 왕께서 평안히 왕궁에 돌아오시게 되었으니 그로 그 전부를 차지하게 하옵소서 하니라
므비보셋 곁에 이런 간악하고 간교한 자기의 종인 시바가 있었기에 므비보셋은 영원히 귀한 인물로 인정을 받게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 주님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살인자요 배반자요 하나님의 아들을 조롱하고 조소하던 자들을 품어 회복을 시켜 주시므로 우리의 영원한 구세주가 되십니다. 지금 여러분들을 누가 괴롭히고 있나요? 그러나 미워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점을 놓치면 누가 된다고요? 전쟁을 일으키는 건달 세바나 므비보셋의 악한 종인 시바가 될 뿐입니다. 고난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면 안 됩니다.
특히 욥을 보세요~ 누가 욥을 괴롭히고 있나요? 따지고 보면 하나님이 주신 엄청난 고통입니다. 그런데 고난을 미워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을 미워하면 누가 손해일까요? 그렇습니다. 나를 괴롭힌다고 하여 무조건 나쁜 존재라고 하면 건달 세바나 악한 종 시바가 될 뿐입니다. 이보다 큰일이 있을까요?
그래서 우린 고난의 대명사인 욥에 대하여 좀 더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욥의 고통은 결국 무엇입니까? 욥의 죄로 인한 고난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그 엄청난 고난을 통한 욥은 새로운 자로 변신하게 됩니다. 단지 옳고 틀리다로 신앙은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욥의 3친구들이 와서 전혀 틀린 말을 한 적이 없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임재 하셔서 욥의 친구 너희들은 속죄 제물로 용서를 받으라고 욥42:8에서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까? 욥42:8입니다.
42:8 그런즉 너희는 수소 일곱과 숫양 일곱을 가지고 내 종 욥에게 가서 너희를 위하여 번제를 드리라 내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것인즉 내가 그를 기쁘게 받으리니 너희가 우매한 만큼 너희에게 갚지 아니하리라 이는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함이라
욥의 친구 3명이 욥에게 와서 한 말들을 보면, 틀리지 않았는데 그런데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욥기가 어렵습니다. 욥의 3친구의 충고와 권면을 보면, 다 맞는 말만 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욥은 펄펄 뛰고 난리가 났던 것입니다.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나를 괴롭히는 것이지, 내가 죄를 저질러서 지금 죄 값을 받고 있는 고난이 아니라고 울부짖고 있었지만 아무도 이해를 못하고 맙니다. 결국 하나님이 오셔서 해결해 주십니다. 즉 인과응보로 욥의 고난을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옳은 이야기라고 하여 다 맞았다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히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하고 만나기를 원했던 욥은 보세요! 욥42:10-17입니다.
42:10 욥이 그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42:11 이에 그의 모든 형제와 자매와 이전에 알던 이들이 다 와서 그의 집에서 그와 함께 음식을 먹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내리신 모든 재앙에 관하여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위로하고 각각 케쉬타 하나씩과 금 고리 하나씩을 주었더라
42:12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에 욥에게 처음보다 더 복을 주시니 그가 양 만 사천과 낙타 육천과 소 천 겨리와 암나귀 천을 두었고
42:13 또 아들 일곱과 딸 셋을 두었으며
42:14 그가 첫째 딸은 여미마라 이름하였고 둘째 딸은 긋시아라 이름하였고 셋째 딸은 게렌합북이라 이름하였으니
42:15 모든 땅에서 욥의 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가 없었더라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그들의 오라비들처럼 기업을 주었더라
42:16 그 후에 욥이 백사십 년을 살며 아들과 손자 사 대를 보았고
42:17 욥이 늙어 나이가 차서 죽었더라
갑절의 복을 받게 됩니다. 그 이유는 욥은 자신의 고난에 대하여 전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포기하지 않았고 끝까지 하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을 보면서, 그런 문제로 하나님까지 갈 필요가 있었다? 없었다?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기준으로 쉽게 욥의 고난을 해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욥은 친구들의 맞지 않는 충고에도 버팁니다. 친구들이 욥을 죄인 취급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고난 속에서 포기하지 않았고 끝까지 하나님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친구들의 권면에 대하여 반기를 들면서 자기의 입장이 틀리지 않았다고 끝까지 주장을 합니다. 그리고 결국 욥은 욥42:5입니다.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듣던 하나님을 뵙는 기적을, 그 고난을 통하여, 욥이 더 큰 믿음을 갖는 기회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조건 고난과 고통에 대하여 욥의 친구들처럼 판단하고 주장하면 안 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보다 훨씬 크다는 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린 앞으로 옳다 그르다고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만 잘하면 되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는 맞다, 틀리다를 알게 하는 종교가 아니라 살리는 종교, 회복의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꼼꼼하게 생각해 보세요~
만약에 하나님이 또는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좋아요? 아니면 지키지 않는 것이 좋은가요? 대답해 보세요~ 어렵지요? 어렵지 않습니까? 답을 드리지요! 만약에 하나님이 율법을 지키셔야 한다면, 우리는 다 지옥에 가야 합니다. 이게 기독교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욥도 결국은 억울하여 계속해서 하나님을 뵈옵기를 그렇게 바랐던 것은 옳은 것으로 해결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여 감히 불평하거나 미워하거나 원망하거나 그래서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짐을 날마다 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방패시고 산성이시고 요새이시고 반석이시고 선한 목자이십니다. 때문에 자기의 처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요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끝까지 순종하기 위한 몸부림만이 해답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방법과 원리는 너무나 크고 깊고 넓고 높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욥처럼 이해가 전혀 안 되는 고난이 될 수 있기에 그래서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자기가 잘못하지 않았는데 옳았는데 욥처럼 상상도 못할 정도로 크게 당했을 경우입니다. 특히 사심이 없을 때가 가장 곤란합니다. 사심이 없게 되면 너무나 당당해 집니다. 무조건 옳다고 여기게 됩니다. 그렇지만 옳았기에 내가 맞았다고 하면서 잘못하면 하나님을 오해할 여지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가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리고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인정했던가요?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니었나요? 아니 그는 하나님이셨습니다. 다 진리이셨고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이해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믿지 않는 성도가 있나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믿는 그 믿음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능력인지, 아세요? 믿음은 이해 차원이 아닙니다. 이해를 할 수 없었지만 그러나 사실이었습니다. 때문에 말씀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오셨지만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보면서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후, 2000년이 지난 지금도 보세요! 어떤가요? 정말 예수님을 믿고 있나요?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된, 우리들이 결국 주님을 알게 되고 그분을 의지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기적이요 능력인지 감동하게 되는데, 그 감동의 깊이가 어떤가요? 평생 아닌 영원히 감동하고도 부족하여 목숨까지도 다 받쳐도 모자랄 것이어야 합니다. 그런가요? 동의하십니까? 아멘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완전하게 다른, 성도된 우린, 하나님이 다만 원칙에 묶여 있지 않은 하나님이기에, 우리에게 상당한 믿음과 지혜와 인내가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득 채워 충분한 지혜와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시면, 욥의 3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야기를 할 때, ‘선은 이렇고 후는 이렇잖아, 당신이 잘못했네, 빌어!’ 그렇게 간단하게 끝나면 안 됩니다. 잘못하면, 거기에는 구원자도 은혜로 기적도 필요하지 않게 됩니다. 예수가 필요 없게 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욥은 그렇지 않았기에, 친구 3명을 향하여 필사적으로 싸웠던 것입니다. 욥의 그 필사적인 친구와의 싸움이 있었기에 그 싸움이 욥을 심히 아프게는 했지만, 욥은 더 큰 신앙인이 되고 친구들까지도 결국은, ‘계산이 안 되는 고난의 욥 때문에’ 위대한 신앙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욥의 3친구들처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무한하신 능력을 제한하면 안 됩니다. 우린 욥처럼, 욥의 3친구들과는 달리,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기 위하여 끝까지 자기 기준으로 이해하지 않고,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불평을 욥처럼 할지언정, 믿음을 갖고 최선을 다하여 싸우면서, 결국 응답을 받아, 하나님의 일하심이 얼마나 크고 깊고 높고 많은지를 온 천하에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린 이런 찬양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시119:89-96입니다.
119:89 여호와여 주의 말씀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섰사오며
119:90 주의 성실하심은 대대에 이르나이다 주께서 땅을 세우셨으므로 땅이 항상 있사오니
119:91 천지가 주의 규례들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까닭이니이다
119:92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119:93 내가 주의 법도들을 영원히 잊지 아니하오니 주께서 이것들 때문에 나를 살게 하심이니이다
119:94 나는 주의 것이오니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주의 법도들만을 찾았나이다
119:95 악인들이 나를 멸하려고 엿보오나 나는 주의 증거들만을 생각하겠나이다
119:96 내가 보니 모든 완전한 것이 다 끝이 있어도 주의 계명들은 심히 넓으니이다
바로 이 고백이 우리 모두에게 어떤 신앙을 가져야 되는지를 알게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실력은 한이 없으시기에 나에게 임한 그 고통이 아무리 심할지라도, 인내하면서 오히려 즐거워하셔야 합니다. 물론 어느 누가 고난을 원할 자가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죄인 된 우리에겐 고난 없이, 우리의 죄악을 이겨내고 또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와 감사와 사랑에 대한 그 깊이를 더 할 길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까? 누가 예수를 믿으면 고난이 사라진다고 하던가요? 그건 거짓말입니다. 위험한 발상이요 하나님에 대한 대적일 수 있습니다.
결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의 주변을 환란 속에서 살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은 그 이유 두 가지를 말씀을 드렸습니다. 첫째는 주변을 환란 속에서 또는 환란을 허락하시는 이유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사랑하심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셔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알게 하여 오직 믿음으로 살게 하시려는 전략이시고 둘째로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이 세상의 환란 안에서 더 큰 믿음을 확보하시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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