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교회

2/14/2021 - 사무엘하 15:1-37 본문

주일 설교 말씀

2/14/2021 - 사무엘하 15:1-37

PastorYK 2021. 2. 15. 16:30

말씀: 삼하 15:1-37                                          

제목: 도망가는 강한 다윗 왕

 

오늘도 우리 모두를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자랑하고자 이 자리에 또 서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어쩌다가 아니라 죽는 그 날까지 항상 드러내고자 하는데 여러분은 어떤가요? 그만 했으면 합니까? 아니면 죽을 때까지 하루도 빼짐 없이 그 자랑을 듣기 원하지 않습니까? 물론 제가 부족하여 더 이상 원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제가 부족하기에 하나님의 자랑을 더 잘 전하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하기에 그럴 수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사랑하심은 영원하시기에 우리로써는 물과 공기와 같이 그분에 대하여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최선을 다하여 그분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감사의 마음으로 받아야 마땅할 것입니다. 우린 복된 자이기에 그분의 영원하신 사랑에 대하여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사랑이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어떤 곳에서 그 능력이 나타나는지 아세요? 바로 있을 수 없는 그런 곳, 비상식적인 곳에서 늘 우리의 위로와 힘과 그리고 길과 빛이 되어 주십니다. 오늘 말씀도 보세요! 어떤가요? 천하를 다스리던 그 다윗의 가정이 우리들의 가정보다 낫던가요? 못하던가요? ~ 우리들의 가정이 다윗 가정보다 훨씬 더 낫다고 본문을 묵상하시면서 생각하지 않으셨나요? 

 

그래서 우린 lucky임을 또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믿음의 가정에 일어난 이 놀라운 사건은 많은 힘과 위로가 되게 하십니다. 아멘? 아멘입니다. 말씀을 드리기 전에 질문합니다. 우리 같으면, 자기가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인데 자기 아들이 반역을 했다면 어떤 조치를 내릴까요? 싸울까요? 다윗처럼 도망칠까요? 아마도 100%가 싸워서 그 아들을 제압할 것입니다. 결코 우리 같으면 도망치지 않습니다. 왜요?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경우에도 당연히 싸우지요! 그러나 다윗에게는 힘과 능력이 있는 황제인데 왜 싸우지 않을까요? 국가비상사태인데 도망친다고요? 미쳤나요? 말도 안 됩니다. 이스라엘까지도 망할 수 있는 쿠데타(Coup d'etat)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왕의 자리를 포기하고 능력의 다윗은 도망쳤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살려고 한국의 1592년의 임진왜란 때, 선조처럼 도성을 포기하고 평양성으로 도망쳤듯이 다윗도 자기만 살려고 그래서 도망친 것일까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아니면 무슨 뜻을 갖고 있는 것일까요?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아들 압살놈의 반역으로 싸울 생각도 없이 도망합니다. 이런 꼴을 보면, 믿음의 가정이라고 하여, 온전해야 한다거나, 또는 부모의 신앙이 좋으면 그 자식들의 신앙도 좋을 것이라는 것도 착각일 수 있음을 알게 합니다. 

 

하여튼 우리가 알고 있던 다윗이 누구입니까? 실패가 없는 늘 승리하는 왕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들 압살롬이 감히 반역까지 일으킵니다. 분명히 이스라엘의 왕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리라는 것을 그가 모르겠습니까? 잘 알았지만, 압살롬은 감히 아버지 다윗을 죽이고 이스라엘까지도 자기 손아귀에 넣으려고 합니다. 치밀한 계획 하에 힘으로 다윗과 하나님까지 대적합니다. 마치 골리앗을 연상케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골리앗을 쓰러뜨리듯이 싸우지 않고 이젠, 도망칩니다. 이해 할 수 없는 선택을 합니다. 게다가 신복들이 다윗을 따라나섭니다. 그들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특히 다윗과 압살롬은 5년 만에 만났습니다. 형을 죽인 압살롬을 용서하기도 심판하기도 쉽지 않아 쩔쩔매고 있다가 5년 만에 만나 입을 맞추고 화해를 했습니다. 아버지요 왕인 다윗으로써는, 어려운 화해와 용서로 사랑하는 아들 압살롬과 힘든 화해를 했는데, 하지만, 압살롬은 화해 후에 반역을 계획했고, 그리고 헤브론으로 가서 자칭, 왕이 됩니다. 압살롬을 믿고 따르던 몇몇 신하들도, 압살롬에게 속아 반역에 가담하게 된 것입니다. 영화도, 연극도, 소설도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다윗의 집안에서 일어난 실제입니다. 왜 압살롬이 반역을 했을까요? 아마도 자신이 아버지 다음으로 왕이 될 수 없다는 판단을 한 것 같습니다. 하여튼 그 이유에 대하여서는 성경에서 말씀하시지 않고 있기 때문에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성경에서 이런 압살롬에 대하여서는 관심이 없고, 오직 다윗에 대하여 줄기차게 초점을 가지고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왜요? 성경은 정치하고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직 신앙에 대한 것이 성경의 뜻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반역자 압살롬과 싸우지 아니하고 신하들과 함께 성을 빠져 나옵니다. 거의 포기 상태에서 빠져나옵니다. 울면서 맨발로 도망쳐 나옵니다. 삼하15:30을 봅니다.

 

삼하15:30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행(行)하고 저와 함께 가는 백성들도 각각 그 머리를 가리우고 울며 올라가니라 

 

다윗으로써는 절망상태 입니다. 아니 천하의 장수 거인 골리앗도 무너뜨리고 사울 왕의 십 수 년의 집요한 공격도 다 이겨낸 군대 장관이었는데, 이렇게 도망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전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짐작한다면, 이렇게 다윗이 신하들과 맥없이 울면서 맨발로 도망치는 이유는 아마도 다윗은 아들 압살롬이 이런 반역을 할 것이라고는 전혀 짐작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국가의 존폐가 달린 심각한 국가 비상인데, 다윗이 이렇게 피해버린다는 것이 여전히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게다가 도망치던 다윗에게 어떤 일이 또 벌어지던가요?  삼하15:24-26을 봅니다.

 

삼하15:24 사독과 그와 함께한 모든 레위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메어 다가 내려놓고 아비아달도 올라와서 모든 백성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더니 
삼하15:25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성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얻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삼하15:26 그러나 저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게다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들이 도망치는 다윗과 언약궤를 가지고 따라나섭니다. 그런데 보세요! 다윗이 여기서 어떤 결단을 내립니까? 거절합니다. 여기서 우린 알아야 합니다. 다윗의 상태가 무너진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합니다

 

왜요? 언약궤를 의지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다윗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언약의 왕의 자리까지도 세상의 힘 때문에 포기하는 미련한 선택을 한 것 같았지만 그러나 그의 믿음의 상태는 대단히 확고부동 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언약궤를 주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삼상4장에서의 말씀과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삼상4장에서의 언약궤는 부적의 차원이었습니다. 그러나 삼하15장에서의 다윗은 언약궤를 그렇게 여기지 않습니다. 

 

언약궤를 통하여 다윗은 은혜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언약궤는 세상의 승리를 위한 힘의 ark가 아닌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시는 은혜와 믿음과 사랑의 차원의 ark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저지른 간음과 살인으로 악한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원수까지도 이젠 품는 사랑의 왕으로 이미 삼하14장에서 압살롬과 화해를 하면서 새로워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로 다윗은 달라졌기에 압살롬과 화해를 했습니다. 

 

특히 삼하16장에서도 보면, 베냐민 사람, 시므이가 도망치는 다윗을 보면서 저주를 하지만, 다윗의 반응을 보세요! 어떤가요? 시므이를 심판하지 않습니다. 힘으로 이겨내지 않습니다. 삼하16:11-12을 봅니다.

 

삼하16:11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 두라 
삼하16:12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사울 왕을 대하듯이 다윗은 저주하는 시므이를 향하여 전혀 다른 다윗을 반응하고 있었습니다. 천하를 다스리는 왕으로서, 모든 힘을 다 가진 다윗이 되었지만 아들의 반란에도, 시므이의 저주에도 다윗은 하나님에게 맡겨버립니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함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린 당하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보입니다. 예수님처럼 다윗 왕도 힘과 능력이 없어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 가진 왕, 황제인 다윗이 베냐민 지파의 아주 작은 자밖에 아니 되는데, 시므이 입니다. 그는 다윗에게는 모래 한 알 정도도 아니 되는 그런 상대였지만, 감히 다윗을 향하여 저주를 하지만, 그래서 다윗이 “아니 감히 너 같은 놈이~” 이것이 아니라, 이 저주가 도망가는 다윗 자기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하면서 전혀 흔들리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다윗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계신 것을 우린 이런 말씀으로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린 어떤가요? 우린 용서를 받지 않았나요? 받았잖아요~ 동일한 용서를 받았는데, 그래서 우린 용서를 얼마나 잘 하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드러내고 있던가요?~ 지난 시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용서란 용서를 받았기에 용서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용서는 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자기도 어쩔 수 없었고 나도 어쩔 수 없기에 용서 없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로 얼마나 우매무지한 지, 용서의 하나님이 없이는 그 누구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용서에서 알게 합니다.

 

그러나 용서란 인간의 못난 것과 무능한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용서가 성립하려면 그 부족과 결함과 못난 것이 그대로 방치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용서를 하니깐, 다 괜찮아 식으로 방종을 한다면, 용서의 의미가 희석된다는 것입니다. 용서가 사람들을 더 나쁘게 하더라! 이렇게 되면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는 회복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마음대로 할 수 있다가 아닙니다. 

 

그런데 속상하게도 용서가 지금 우리 모두를 더 나쁘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중심이 되어야 하는 이 용서가 나의 중심으로 변질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도망치면서 만난 아주 작은 베냐민 사람 시므이가, 감히 강아지로써 범 무서운 줄도 모르고, 범을 저주하는데 이를 어떻게 받아서 넘어갑니까? 개인의 원한, 지파간의 문제를 넘어선 다윗입니다. 개인의 보복을 넘어선 다윗은 너희들의 그 저주가 나에게는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와 선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란 믿음으로 우리 예수님처럼 품어 버립니다. 품어버리는 다윗의 뜻은 무엇인가 하면, ‘오직 나를 인간답게 할 수 있는 것은, 저주하는 무지한 너 시므이가 아니라 나를 만드신 용서하시는 하나님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언약궤 때문에 어떤 고백을 합니까? 삼하15:25-26입니다. “왕이 사독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성으로 도로 메어 가라 만일 내가 여호와 앞에서 은혜를 얻으면 도로 나를 인도하사 내게 그 궤와 그 계신 데를 보이시리라, 그러나 저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시므이 때문에 하는 다윗의 고백은 삼하16:10-12입니다. “왕이 가로되 스루아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결국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답해 주시지 않으면 다른 곳에서는 답이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만이 나 다윗이라는 존재를 이루게 하시고 자신의 인생의 유일한 해결자이시고 정답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그 어느 곳에서도 길을 찾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만이 나를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 소원을 들어줄 수 없어도 나는 그 결정까지도 감수하겠다는 다윗의 의지요 믿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를 받아주시면 그것이 유일한 해결이 되지만, 만약에 버리신다면 그것으로 마지막이고 끝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변화와 성장이 골리앗을 물리친 그 승리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 밧세바의 사건에서 얻어낸 능력의 고백입니다. 자신의 그 수치와 무지함으로 이런 기적의 변화가 무엇 때문에 이루어진다고요?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변화의 과정은 구약에서만이 아니라, 신약에서 봅니다. 요21:15-17입니다.

 

요21: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21: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요21:17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배반 후의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주님의 3번의 그 질문과 이에 대한 베드로의 그 마지막 고백 안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자꾸 물어보시자, 결국 겁이 난, 베드로의 3번째 고백이, “주님이 아시지 않던가요?” 하면서, “주님, 제 능력과 열심과 의지를 가지고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주님의 은혜를 입은 제자입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만이 저의 해답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없이는 나는 인간일 수도, 존재 가치도 전혀 없음을, 배반 후에 알게 되면서, 그래서 주님은 나의 구주이십니다. 라는 깊은 믿음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고백의 진심이요 또 다윗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한없는 그 용서, 관용과 긍휼이 베드로와 다윗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똑같이 베풀어 주신다는 것이 아닙니까? ~ 놀라지 않을 수 있습니까? 놀랍기만 합니다.

 

그렇다면 그 용서하심과 자비하심을 입은 우리들도 다윗과 같이, 이해할 수 없는 져주는 그 양보의 길을 선택하셔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바다를 잠잠케 하시던 능력의 주님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젠, 못난 그 선택으로 무시를 당하던, 그 당시, 그 누구도 주님을 이해를 할 수 없었지만 그러나 주님의 그 이해할 수 없었던, 완전 못나 보이는 그 선택으로 지금 우리들이 어떤 길을 가고 있던가요? ~ 

 

십팔계라는 운동에서도 가장 높은 수준은 싸우는 것이 아니라 도망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도망하는 것이 실력이 아니라, 힘과 능력과 실력이 없어서 도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힘과 능력과 실력이 있기에 도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팔계라는 운동의 진수(眞髓)요, 진면목(眞面目)이라면, 신앙의 높은 경지도, 다름이 아닌 싸우지 않고 다윗처럼 도망하는 것입니다. 싸우자고 하면 피하라는 것입니다. 피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선택이 물론 처음부터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처음에는 다들, 싸우기 바쁩니다. ‘영차, 영차’ 하면서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열심히 싸웁니다. 이런 경우처럼, 힘의 신앙, 보이려는 신앙, 자랑의 신앙,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오직 열심만을 냅니다. 신앙의 인격과 상관없이, 그래서 귀신도 쫓아보고, 병도 고쳐보고, 정신없이 능력의 신앙을 최고로 알고 전심으로 따라다니게 됩니다.

 

그러나 시비를 피하는 성령 충만한 다윗의 신앙은 밧세바 사건을 거친 후, 준비가 됩니다. 밧세바 사건 이후에,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의 용서를 받은 다윗자신도 그 깊은 사랑과 감사와 기쁨을 맛보면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신의 원수까지도 품게 됩니다. 몸싸움이 아니라 양보와 이해와 용서의 삶을 따라가게 된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더럽고 이기적이요 무지하고 미련한 자신인지를, 모르면, 다들 모이면 영차, 영차, 하면서 믿음보다는 감정이 앞선 힘의 신앙으로 자신을 드러냈었지만, 용서를 받은 후에는, 나를 용서하신 하나님만을 드러냅니다. ‘으싸, 으싸’ 하는 식의 힘과 열심의 신앙이 아니라 용서하는 자로, 사랑하려는 자로, 인내하는 자로 달라집니다. 다윗처럼 하나님께 전폭적으로 맡기는 자로 바뀌게 됩니다. 그것이 삼하15장의 다윗입니다. 다윗이 싸울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행위 완전했지만 도망하는 것이 잘 하는 것이요 피하는 것이 이기는 것임을 안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렇게까지 되기에는 다윗을 사랑하는 선지자 나단이 있었다는 사실은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은 죄를 무조건 덮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오늘 삼하15장의 도망하는 다윗을 통하여 악한 죄인들이 나를 죽이려고 하면 무조건 도망하라! 따지지 말고 죄를 덮어 줘라! 이것이 잘하는 것이다! 이것을 가르치시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로 성장되어 가는 다윗을 보라는 것입니다. 도망하는 다윗을 통하여 성공케 하시는 하나님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 안에서 살아가게 된 성도들은 편안한 길, 쉬운 길, 자랑하는 길을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을 더욱 알아갈 수 있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장, 주님과 다윗처럼 망신을 당할찌라도, 모욕을 당할찌라도, 온갖 조소와 조롱 속에서 견딜 수 없는 아픔이 닥쳤을지라도 하나님만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피함이 어떤 피함이었던가요? 삼하15:24-26의 말씀에서 확인을 했듯이,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는 다윗입니다. 그리고 다시 삼하15:27-36의 말씀을 보세요! 

 

삼하15:27 왕이 또 제사장 사독에게 이르되 네가 선견자가 아니냐 너는 너희의 두 아들 곧 네 아들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을 데리고 평안히 성으로 돌아가라 
삼하15:28 너희에게서 내게 고하는 기별이 올 때까지 내가 광야 나룻터에서 기다리리라 
삼하15:29 사독과 아비아달이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도로 메어다 놓고 거기 유하니라 
삼하15:30 다윗이 감람산 길로 올라갈 때에 머리를 가리우고 맨발로 울며 행하고 저와 함께 가는 백성들도 각각 그 머리를 가리우고 울며 올라가니라 
삼하15:31 혹이 다윗에게 고하되 압살롬과 함께 모반한 자들 가운데 아히도벨이 있나이다 하니 다윗이 가로되 여호와여 원컨대 아히도벨의 모략을 어리석게 하옵소서 하니라 
삼하15:32 다윗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마루턱에 이를 때에 아렉 사람 후새가 옷을 찢고 흙을 머리에 무릅쓰고 다윗을 맞으러 온지라 
삼하15:33 다윗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만일나와 함께 나아가면 내게 누를 끼치리라 
삼하15:34 그러나 네가 만일 성으로 돌아가서 압살롬에게 말하기를 왕이여 내가 왕의 종이니이다 이왕에는 왕의 부친의 종이었더니 내가 이제는 왕의 종이니이다 하면 네가 나를 위하여 아히도벨의 모략을 패하게 하리라 
삼하15:35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이 너와 함께 거기 있지 아니하냐 네가 궁중에서 무엇을 듣든지 사독과 아비아달 두 제사장에게 고하라 
삼하15:36 저희의 두 아들 곧 사독의 아히마아스와 아비아달의 요나단이 저희와 함께 거기 있나니 무릇 너희 듣는 것을 저희 편으로 내게 기별할지니라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음까지도 다 준비를 하면서 피하는 다윗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원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다윗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사랑과 용서를 받은 자들만이 할 수 있는 선택입니다. 그래서 마18:21-35입니다.

 

마18: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마18:22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 
마18:23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18:24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하나를 데려오매 
마18: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한대 
마18:26 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마18: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마18: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마18: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마18: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마18: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마18:32 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마18: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마18: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마18:35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성도는 용서를 받은 자들이기에 용서하는 자로 살아가지 않으면 버려집니다. 용서는 성도의 특권이요 자랑이요 삶의 방법입니다. 그래서 용서를 받은 다윗은 용서를 하면서 반역자 아들 압살롬 때문에 어떤 시를 지었는지 아십니까? 내가 나를 낳느라고 미역국을 끓여서 어미에게 먹었더니 이제는 나를 배신해! 하면서 가슴을 치는 한 맺힌 통한(痛恨)의 시(詩)를 지었던가요? 아닙니다. 시23편입니다.

 

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23: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시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시23: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시23: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그런데 이 기막힌 정말 아름다운 이 시23편이 나오기까지는 다윗이 어떤 지경이었는지 시22편만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시22편의 1-21입니다.

 

시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22:2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하지 아니하오나 응답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시22:3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계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나이다
시22:4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시22:5 그들이 주께 부르짖어 구원을 얻고 주께 의뢰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시22: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시22:7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시22:8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시22:9 오직 주께서 나를 모태에서 나오게 하시고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을 때에 의지하게 하셨나이다
시22:10 내가 날 때부터 주께 맡긴 바 되었고 모태에서 나올 때부터 주는 나의 하나님이 되셨나이다
시22:11 나를 멀리 하지 마옵소서 환난이 가까우나 도울 자 없나이다
시22:12 많은 황소가 나를 에워싸며 바산의 힘센 소들이  나를 둘러쌌으며
시22:13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시22:14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시22: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시22: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시22:17 내가 내 모든 뼈를 셀 수 있나이다 그들이  나를 주목하여 보고
시22:18 내 겉옷을 나누며 속옷을 제비뽑나이다
시22:19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시22:20 내 생명을 칼에서 건지시며 내 유일한 것을 개의 세력에서 구하소서
시22:21 나를 사자의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들소의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시23편이 너무나 아름답기에 다윗의 삶도 어렵지 않았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면 그것은 미련한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워 했는지 시22:1, 6, 7-8, 13-16의 말씀을 다시 보세요! 

 

시22:1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오며

         내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시22:6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

시22:7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
시22:8 그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그를 기뻐하시니 건지실 걸 하나이다

 

시22:13 내게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 같으니이다
시22:14 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시22:15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고 내 혀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 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
시22:16 개들이  나를 에워쌌으며 악한 무리가 나를 둘러 내 수족을 찔렀나이다

 

그러나 이 고난이 시23편을 짓게 된 것입니다. 기억하셔야 할 점은 인간의 기준으로 살던 압살롬은 점점 나빠지지만, 다윗은 점점 좋아지고 있습니다. 좋아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기준으로 더욱 채워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이 반란까지도 다 맡겨버리고 도망 아닌 도망을 하지만, 그 결과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다시 회복이 되어 돌아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나라도 더욱 강력한 믿음의 나라로 다윗이 지켜낼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결심과 선택을 해야 할까요? 지은 죄 때문에 받아야 되는 고난을 감사한 마음으로 받고, 용서받은 죄인으로 죄인을 용서하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특히 자신의 죄는 미워하면서 따뜻한 자로 부족함이 없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요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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