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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3/2020 - 사무엘상 26-1-25 본문

주일 설교 말씀

9/13/2020 - 사무엘상 26-1-25

PastorYK 2020. 9. 14. 14:21

말씀: 삼상26:1-25                                           

제목: 쫓기는 승리자와 쫓는 패배자

 

현실의 즐거움과 자랑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로서는 죽은 정승보다는 산 강아지가 낫다고까지 합니다.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크고 작은 거짓말을 하고 사기를 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짓말을 하여 위기를 면하려고 하고, 사기를 쳐서 사람들을 망하게 하고 가족까지 무너뜨리는 그들 모두는 다 현실의 즐거움과 성공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들입니다. 게으름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장의 욕구를 이겨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당장의 즐거움 때문에 그들의 내일은 자멸이요 저주요 재앙만이 남습니다. 천벌을 피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예수님을 상징하고 성도를 상징하고 있는 다윗을 보세요! 오늘 제목처럼 늘 세상의 힘에 쫓깁니다. 당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윗과 같이 당하는 현실에서 큰소리를 쳐 본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다윗과 같은 경우가 된다면~사울 왕을 죽이고 말지~ 다른 방법과 길이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도망자가 될망정, 세상의 힘과 실세에 항복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따르면서 내일을 준비하면서 망하는 길을 가지 않고 있습니다. 왜요?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현실의 즐거움과 자랑에서 벗어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울 왕을 보세요! 전형적인 세상 사람입니다. 아니 우리들입니다. 오직 당장의 즐거움과 자랑의 삶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윗도 다윗이지만, 먼저 사울 왕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얼마나 아끼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회개의 기회를 다윗을 통하여 평생 주시고 계십니다. 수십 년 이상을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사울 왕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나라를 믿음으로 다스리도록 기회를 주셨지만, 왕의 자리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힘으로 다윗을 죽이기 위하여 평생을 다윗이 숨어있다고, 고발이 들어오면 쫓아다닙니다. 힘을 가지고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 이 사람을 보면, 꼭 누구입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모든 사람들이 바로 사울입니다. 물론 우리도 사울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여전히, 용서받은 죄인이요, 성도라고 하면서,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하면서도, 사울처럼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경우는 무엇입니까? 오늘 말씀처럼, 멋대로 하고 있는 힘의 사울이 도망자 어린 다윗으로부터 이런 수모와 모욕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지금 멋대로 살아가고 있는 나도, 사울처럼 모욕과 수모를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는 생각 정도를 해 보시기는 한 것입니까? 아니면, 나는 다윗처럼 살 바에는 죽이든지, 죽고 만다~라고 하시지는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 결과는 저주요 재앙이요 천벌을 피하지 못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 결국 다윗도 삼상26:10에서 예언을 했지만,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 

 

예언한 대로 사울 왕은 블레셋과 전쟁하다가 목이 잘려서 3 아들과 함께 전사를 하게 됩니다. 늘 말씀을 드렸지만 회개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 기회를 평생 놓치면서 버림을 받습니다. 부족함이 없었던 관대하고 겸손해 보이던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면서 그 왕의 자리를 다윗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다가, 결국 이방인 블레셋의 손에, 원수의 손에 목이 잘려 죽게 됩니다. 사울 왕이 그때, 죽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뒤 늦은 후회라도 했을까요?~ 

 

혹시 추측하건대, 사울 왕이 죽어가면서 다윗이 나를 죽이지 않았을 때, 내가 왜? 회개하지 못하였던가? 라고 잠시라도 생각을 했었을까요?~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늦었고, 사울이 죽을 때를 보면, 그런 생각은 전혀 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하여 몇 번이고 기회를 주실 때, 돌이키지 못하면, 이렇게 끝날 수 있습니다.~은혜만이 주는 회개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놓치면 버려집니다. 사울왕은 은혜 속에서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도 없이, 전혀 느끼지도 못하고, 단지 자기의 기준으로 멋대로 살다가 이렇게 영원히 끝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노파심에서 드리게 되는 말씀은 혹시 우리들이 사울 왕처럼 왕이 되어, 넘치는 은혜 속에서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멋대로 하면서, 그런 자신에 대하여 두려움이 전혀 없을까? 하는 걱정입니다.~ 아마도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두려움이 있다면, 어떤 반응이 나타날까요? 주님과 동행하고자, 최소한 말씀을 붙들게 되고, 최소한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말씀을 보고 기도하는 하루가 최대가 아니라 최소한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주님과 동행할 길과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시던가요? 요15:7, 14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14절입니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그렇습니다. 말씀 없이 멋대로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니는 사울은 패배요 절망이지만, 그러나 말씀이 우선인, 쫓기는 다윗은 보세요! 나라의 왕에게까지 쫓기고 또 쫓기고 배신까지 당하면서도 전혀 굴하지 않고 얼마나 당당합니까! 자기를 죽이려는 왕까지 꼼짝 못하게 합니다. 지켜주니까, 배반까지 당하면서, 자신의 아내 미갈까지 빼앗기는 수모 속에서도, 그리고 내내 십 수 년을 쫓기면서도, 이젠 사울 왕에게 복수하겠다가 아니라 왕의 자리로 돌아가라고 충언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말씀의 힘입니다. 순종의 가치입니다. 말씀을 의지하여 순종하면, 이렇게 쫓기고 쫓긴다고 하여 모든 주변 관계까지도 나빠지는 것이 아니라 다윗은 모든 백성으로부터 인정을 받아가고 있었고, 신뢰를 쌓아가게 됩니다. 심지어 사울 왕이 무엇이라고 다윗을 축복하던가요? 삼상26:25입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찌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하니라 이것이 바로 은혜와 순종하는 이에게 임하는 복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모르는 사울 왕은 다윗의 믿음을 보면서 삼상26:21을 보세요!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중히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 이렇게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이 심하게 잘못 되었다고 온 백성 앞에서 고백합니다. 

 

이런 고백을 보면, 사울도 은혜를 입은 왕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끝까지 다윗을 품지 못하고 맙니다. 만약에 삼상26:21의 말씀이 진심이었더라면, 분명히 다윗이 블레셋 아기스 왕에게 가서 1년 4개월을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사울은 최소한 장인으로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사위요 충신인 다윗을 불러 왔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완전 외면하고 맙니다. 이런 꼴을 보면 사울은 왕이 되지 말아야 했습니다. 왕이 되면서 사울은 모든 것을 잃었고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맙니다. 그러나 말씀을 드린 대로 다윗은 쫓기는 가운데서도 원수의 나라 블레셋으로 피신할망정, 사울 왕을 죽이려고 결코 서두르지 않았고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장인 사울이 스스로 다윗 앞에서 잘못을 시인하고 축복까지 삼상26:21에서 고백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전혀 휘둘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 정도가 되면, 사람이라는 것이, 혹시 장인 사울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도 할 수 있겠지만, 다윗은 사울이 그럴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이젠, 알았기에, 자기 갈 길로 갑니다. 참 은혜를 아는 귀한 인물입니다. 

 

말 뿐인 사울 왕임을 알고 오직 하나님만 믿으면서 다윗은 자기 갈 길로 떠납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울 왕의 지금까지의 한 짓거리를 보면,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다윗이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단지 다가가서 죽이지 아니하고 창과 물병만을 가지고 나옵니다. 분명한 말씀의 기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마디를 던지고서는, 바로 자기 갈 길로 떠나버립니다. 이런 인물을 보면, 여러분들은 무슨 생각을 합니까? ~

 

저는 이런 다윗을 보면서 다윗의 믿음을 또 봅니다. 완전하게 다 맡겨버리고 있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해 보려고 시도도 하지 않습니다. 사울과의 연합과 화목은 오직 자기 몫이 아니라 하나님만의 몫임을 알았기에, 미련 없이 깨끗하게 포기하고 떠납니다. 당장의 어떤 수습으로 자신의 그 위기를 면해 보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 떠나야 했던 다윗은 도망자요 조국 이스라엘에서조차도 한 발도 붙일 수 없는 실패자로 보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러나 다윗은 그 길을 택합니다. 

 

그리고 다윗 그는 자기의 목표를 끝까지 감당합니다.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삼상27장에서 알 수 있지만, 사울 왕이 다윗을 집요하게 죽이려고 했기에,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 위기를 면하려고 블레셋의 아기스 왕의 신하로 1년 4개월을 숨어 지내게 됩니다. 마치 이스라엘을 배신한 자처럼 말입니다. 아니 누군가는 분명히 다윗을 배신자로 폄하하지 않았을까요? 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쫓는 왕이었지만, 다윗은 배신자처럼 도망자처럼 쫓기면서 살아야 했었지만, 누가 더 힘들어 했고 두려워했을까요? 다윗이 아니라 사울입니다. 왜요? 다윗은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이 다윗의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보기에는 상대가 전혀 안 되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도망자가 된 다윗을 사울 왕이 오직 힘으로만 누르려고 했기 때문에 마음에 평강이 넘친 것이 아니라 사울 왕이 왕이면서도 훨씬 더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힘으로 이기려는 삶은 언제나 근심과 걱정 속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패배자가 됩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쫓기더라도 믿음으로 감당하면 감사와 평안까지도 누립니다. 그리고 결국 승리자가 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1. 세상의 힘과 싸우는 믿음의 다윗은 그 고난을 통하여 갈수록 약해지고 쇠하여 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담대하고 적극성을 갖게 됩니다. 예전에는 얼마나 소극적이고 담대하지 못했습니까? 사울 왕이 다윗 자신을 죽이려고 하자, 사울 왕이 두려워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가서 거짓말도 했어야 했고, 다윗이 사울 왕이 두려워서 피할 곳을 찾지 못해서 원수의 나라 블레셋으로 망명까지 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죽을 뻔하여, 미친 짓거리로 위기를 모면해야 했었고, 사울 왕이 군사 3000명을 데리고 죽이러 오자, 두려워서 깊은 굴에 숨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아비새를 데리고 들어간 것입니다. 대단히 담대해 졌습니다. 적극적인 사람이 되고 있습니다. 고난의 열매입니다. 고난 때문에 속사람이 강건케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결코 쉽게 인도하지 않으십니다. 

늘 고난으로 훈련을 받게 합니다. 억지로라도 고난을 주십니다. 아니 아무 잘못이 없어도 말씀이 응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요셉에게 약간이 아니라 가득 채워 주시듯이, 주시는 분입니다. 왜요? 그렇지 않으면 깨닫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이 악한 세상을 믿음으로 이겨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고난은 깨달음과 믿음을 갖게 하기에 시119:67의 말씀을 보세요!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71절입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은 이 세상의 금은 보다 말씀을 더 사랑하게 만드는 매직이기에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하나님의 자녀라면 필히 그것도 가득하게 주십니다. 

 

2. 다윗이 사울로부터 억울한 고난을 받으면서 어떤 복이 임했는지 아십니까? 더욱 겸손해 지고 온유해 지더라는 것입니다. 삼상24:14, 삼상26:20입니다.

 

(삼상 24:14)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의 뒤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삼상 26:20) 그런즉 청하건대 여호와 앞에서 먼 이 곳에서 이제 나의 피가 땅에 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이는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나오셨음이니이다

 

3. 다윗이 사울로부터 애매한 고난을 받으면서 어떤 복이 임했는지 아십니까? 인재들을 얻게 됩니다.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도 다윗에게로 옵니다. 

 

4. 다윗이 사울로부터 고난을 받으면서 어떤 복이 임했는지 아십니까? 사울 왕까지도 항복하게 됩니다. 삼상24:20과 26:21, 25의 말씀을 봅니다.

 

(삼상 24:20) 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삼상 26:21)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하게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 하는지라
(삼상 26:22) 다윗이 대답하여 이르되 왕은 창을 보소서 한 소년을 보내어 가져가게 하소서
(삼상 26:23)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그의 공의와 신실을 따라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내 손에 넘기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삼상 26:24) 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니라
(삼상 26:25)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하니라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세상이 강하여서 힘없어 보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당장 이길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결론은 반대입니다. 왕까지도 다윗에게 항복한 것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미 진 게임을 사울 왕이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다윗에게 고난이 없었더라면, 이런 일은 결코 생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고난은 복입니다. 저주가 아닙니다. 성도들의 고난은 빛이 나게 합니다. 성도들의 고난은 아름답게 합니다. 그래서 고난은 선물입니다. 그런데 그런 선물은 아무도 원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하지 않는 그 고난을 척척 잘 알아서 전능하시고, 사랑의 하나님께서 전혀 묻지도 아니하시고 나누어 주십니다. 전혀 원하지도 않는 어떤 고난을 나누어 주십니까? 왜 나는 이렇게 늘 가난해야 하나? 나는 왜 이렇게 전쟁고아로 또는 버려진 자로 태어나, 깊은 서글픔 속에서 살아야 했나? 나는 왜 대머리인가? 왜 나는 이 모양, 이 꼴로 태어났는가? 나는 왜 이렇게 할 줄 아는 것도 없는데, 머리까지 나빠 늘 시험에 떨어져야만 하나? 나는 왜 이렇게 말도 못하고 인내도 없는가? 나의 부모는 술꾼이요 놀음만 하여 늘 가족끼리 미워만 해야 했나? 어떤 집의 자식들은 효도관광도 시켜 준다고 하는데, 이 놈들은 나가면 늘 사고를 쳐서 정신을 다 빼 놓지~ 참 무슨 팔자가 남편, 아내, 자식, 부모의 복도 없어도 이렇게까지 없나~, 뭐~ 그런 그 모든 우리 주변의 각자가 운명적으로 가지고 태어나서, 피할 수 없이 부딪쳐야 되는 그런 수많은 고통거리들 말입니다. 특히 수천 년 역사 가운데 지금 태어나는 아이들은 어떤가요? 코로나19로 나가지도 못하고 마스크를 쓰고 다녀야 하니~ 우리들의 모든 죄로 인하여 지금 아이들이 어떤 열악한 조건이 되었나요? 그러나 그 아이들은 또 이겨나갈 것입니다. 새로운 길을 찾아내면서 나름대로 해쳐나갈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말입니다. 불편한 것들이 지금 우리 모두를 얼마나 형통하게 했나요? 

 

이런 기적 덩어리인 I-phone을 들고 다니고 있습니다. 기적인지 몰라서 문제이지, 우리들이 들고 다니는 I-phone은 기적 그 자체입니다. 고난이 준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사울 왕에게 감사드려야 합니다. 오늘부터 나를 힘들게 하는 이웃을 사랑하고 감사합시다! 나를 힘들게 하시는 하나님에게 all in를 합시다! 고난이 오면 ‘감사하여 맨발을 벗고 뛰어나가 귀한 손님을 영접하듯이 하지는 못할지라도’ 최소한 고난을 받을 때, 깊이 생각을 하면서 이겨냅시다!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즐겨야 하고 성공해야 되는 세상하고는 하나님의 길과 뜻이 전혀 다르기에 그래서 오는 그 고난은 그냥 나의 친구가 되어 주지 않습니다. 좁은 길을 스스로 택해야 합니다. 어떤 손해와 아픔과 모욕을 당할지라도 새사람으로써, 용서를 받은 죄인으로써, 말씀이 중심이 되어 버릴 것은 버리고 고칠 것은 고쳐가야 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손해와 아픔과 모욕을 당할지라도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부인할 것은 부인하는 습관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 훈련을 스스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시작하기도 어렵습니다.

 

작은 것부터도 자기부인이 안 됩니다. 작은 것부터라도 자기부인을 하려면 오른 뺨을 계속 맞아야지만 합니다. 그래야 지만, 훨씬 순조롭게 고난의 바다를 항해할 여지가 생길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끝까지 요나 선지자처럼 자기 고집과 원리와 판단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했다가는 감당할 수 없는 폭풍을 불러올 뿐입니다. 하나님과 자신의 기준이 전혀 다르다고 하여 피했다가는 그 깊은 바다 속으로 빠져서 깊은 음부에서 엄청난 고난을 받다가 해결 받았던 요나처럼 될 것입니다. 

 

미리 두려워서 십자가의 길, 좁은 길, 하나님의 원리를 피하려 하지 말고, 끝까지 인내할 때, 감당할 때, 그것이 지혜요 승리의 지름길인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땅 속에서 자라나는 팔뚝만한 무나 양파도 보세요! 한꺼번에 그 딱딱한 땅 속에서 바로 쑥! 자라지 않습니다. 아주 조금 씩, 조금 씩, 그 딱딱한 땅을 밀어내야지만 그만한 무와 양파가 자랄 수가 있듯이, 신앙도 한꺼번에는 안 됩니다. 말씀을 늘 제대로 듣지 않고 자기중심대로 살았다가는, 한꺼번에 감당해야 하는 참담한 과정을 지나야 할 것입니다. 그런 고통을 피하고 싶으신 분들은 날마다 아니 매초, 매초, 진리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나중에 큰 열매를 덜 힘들게 수확하게 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도 단번에 이루게 하시는 법은 없습니다. 아주 조금 씩 조금 씩, 보이지 않지만 그런 식으로 자라게 하십니다. 결코 한꺼번에 안하십니다. 그래서 조심하셔야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너무나 조금 씩, 보이지 않게 성장하도록 하기에 하루 정도는 안 해도 된다고 인식을 하는데, 바로 그 점이 실패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들은 일초라도 성장하지 않는 법이 없습니다. 순간에도 성장하고 있기에 한 순간이라도 멈춘다면 그것은 바로 죽음으로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모르고 무엇보다 존귀한 성도들이 순간 아닌 한 시간 하루, 한 달, 일 년을 괜찮다는 식으로 멋대로 살아가고 있다면 이것은 나발의 삶입니다. 정말 안 됩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을 불러들이고 말 것입니다. 성도는 실패자처럼, 도망자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는 살아 있지만, 다 맡기고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무조건 기다려야 합니다. 만약에 성도가 나발처럼 멋대로 살아가려고 한다면 벼락, 벼락, 엄청난 벼락으로 회개케 하실 것입니다. 생명을 받아서 믿음이 자라가야 되는 성도들은 기어서라도 나아가야 합니다. 때문에 성도는 거룩함을 위하여 순간이라도 쉴 수가 없습니다. 태양이 피곤하다고 잠시 후에 일출하겠다고 하던가요? 피조물들이 덥고 춥다고 잠시 숨었다가 돌아온 적이 있었던가요? 없습니다. 

 

그냥 그 자리에서 덥든지 춥든지 상관하지 않고 자기의 자리를 지켜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이어야 합니다. 성도라는 자들이 좁은 길이, 십자가의 삶이 힘들다고 못하겠다고 어렵다고 포기하는 것은 스스로 자신의 전 인생을 버리는 나발의 선택이 될 뿐입니다. 죄인 다윗이 하나님의 거룩한 일꾼이 된 것도 다윗의 탄생이 별다르고 특별나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그 손의 공교한 지도하심과 그 마음의 성실하심으로 평생 양육을 받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 씩, 하나 씩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원리와 방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가는 훈련을 한 결과입니다. 지금 어떤 문제로 고민하고 계십니까? 감사하시고 그 고민을 통하여 자신의 문제점을 찾아서 회개를 하시면, 또는 그 고민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간절하게 간구 해 보세요! 그러시는 가운데 언젠가는 우리도 믿음이 성장하여 다윗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여기심을 받는 영광과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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