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교회

08/16/2020 - 사무엘상 22:1-23 본문

주일 설교 말씀

08/16/2020 - 사무엘상 22:1-23

PastorYK 2020. 8. 17. 11:49

말씀: 삼상22:1-23                   

제목: 지금이 은혜가 가장 충만할 때

 

여러분들은 오늘 말씀에서 느끼신 것이 무엇입니까? 두 가지로 말씀을 드립니다. 

 

1. 다윗이 받는 고난의 의미입니다. 다윗이 부모님이 걱정이 되어서 조상 룻의 땅 모압으로 모셔서 안전을 확보하지만, 하늘은 아무런 보상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선지자 갓이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고 해서 들어갔으면, 좀 나아져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다시 사울왕은 다윗을 죽이지 못해 안달할 뿐입니다. 게다가 다윗을 도와주었다고 하여 대제사장 아히멜렉과 그의 전 가족과 모든 놉 사람들과 가축까지 그 씨를 다 말립니다. 겨우 아비아달만 도망하여 이 사실을 다윗에게 알릴뿐입니다. 

 

이 슬픈 소식을 겨우 살아 온 아비아달을 통하여 들었을 때에 다윗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다윗의 고난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윗을 통하여 이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다윗과 예수님의 인생이 얼마나 비슷한지 알 수가 있습니다. 다윗이 왕 사울에게 생명을 위협받아 다른 나라로 피했었듯이 예수님도 헤롯 왕에게 위협을 받아서 애굽으로 피하셨다고 마2:13에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윗 때문에 무고한 수많은 생명이 죽었듯이 예수님 때문에 2살 아래의 어린 아이들이 다 죽었다고 마2:16에서 말씀하십니다. 

 

(마 2:13)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마 2: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다윗이 고난 속에서 살았듯이 예수님도 고난의 삶 그 자체이셨습니다. 오실 예수님을 성경은 다윗을 통하여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실 예수님에 대하여 자세하게 이렇게 말씀하여 주셨으나 막상 고난의 주님으로 오신 메시야를 이스라엘은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구세주라고 하니까 죽입니다. 죽이면서 스스로 구원하라고 조롱까지 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정말 능력이 없어서 예수님께서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창조주시요 메시야이셨기에 약속하신 대로 3일 만에 부활하십니다. 사망을 이기신 부활의 주님과 성부하나님을성도들은 늘 찬양과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고전15:53-57입니다. 

 

(고전 15:53)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고전 15:54)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고전 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고전 15:56)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고전 15: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온전히 믿어지십니까? 어떤 감동과 감격이 있습니까? 그러나 측량할 수 없는 이 감격과 감동은 누구에게나 허락된 것이 아닙니다. 남이 좋아하니까, 그래서 좋아한다고 하여 하나님께서 그 기쁨을 받으시거나 인정해 주시지 않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고후11:21-27입니다. 

 

(고후 11:21) 나는 우리가 약한 것 같이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고후 11:22)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
(고후 11: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고후 11: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고후 11: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고후 11: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고후 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처럼 복음 때문에 이런 험악한 과정이 없다면, 그 사람은 부활의 기쁨과 영광을 눈꼽만치도 누릴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부활은 오직 제한적입니다. 고난 속에서 얻은 승리의 부활이기 때문에 그래서 순종의 고난 없이 느끼는 감정적인 기쁨은, 구경꾼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좋아할 수가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어떻게 순종의 고난 없이 단지 좋아한다고 칭찬할 수 있습니까? 순종의 고난 없이 단지 감정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지금 타락한 수많은 교회를 보세요! 고난 속에서 얻은 승리의 부활을 가지고 살아내는 성도들이 아니라, 예수님을 단지 따라다니면서 좋아하다가 결국 예수님을 버리고 배반한 유대인들만을 무수히 생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당시처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따른 이유가 단지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처럼 지금의 교회가 세상의 형통과 성공과 건강을 얻기 원하면, ‘와서 예수를 믿으라’고 합니다. 형통주의를 가르치는 교회들은 이렇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형통을 위한 예수만을 믿고 있는 그들에게 순종의 모진 고난을 통하여 승리의 부활을 믿어야 된다고 하면 순종할까요? 다들 도망할 뿐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던 수많은 군중들이 결국 유대인들과 로마군에게 붙잡히시는 힘없이 당하시는 예수님을 보고 배반하고 삽시간에 사라져버렸던 것처럼, 지금도 마찬가지로 고난을 해결하여 주지 않으면 형통을 보장 해 주지 않으면 다 떠납니다. 그들은 복음을 위하여 손해와 고통을 전혀 원하지 않는데, 어떻게 부활의 영광과 기쁨을 느낄 수가 있단 말입니까? 구경꾼은 메달을 받는 선수들하고는 그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구경꾼들은 메달을 받은 그 선수들과  결코 같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아무나 받을 수 없는 부활의 영광과 기쁨을 모두가 참여하도록 종용(慫慂-advice)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지 않았다면, 복음 때문에 성도가 손해를 보고 모욕을 당하고 건강을 해친 적이 없었다면, 부활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no cross, no glory입니다. 때문에 다윗도 그 험한 길을 허락하셨던 것입니다. 성도는 다윗처럼 아무 잘못도 없는데 세상으로부터 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복음 때문에 당하는 것이 영광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다윗이 이런 험악한 세월이 있었고 사도 바울이 역시나 받은 고난은 늘 위험 그 자체이었습니다.  성도는 예수님께서 재림의 주로 오실 때까지는, 다윗처럼 사도 바울처럼 고난을 밥 먹듯이 당해야 맞는 것입니다. 이 고통의 삶을 이상하게 여길 수가 없어야 합니다. 성도는 이 세상과 원수 되어 버린 그런 존재가 되셨다는 것을 늘 기억하셔야 혼동과 혼선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하여 인정할 때, 은혜 충만한 건강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부활의 주님 때문에 허락된 부활은 성도에게 모든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전15:58을 보세요!

 

(고전 15:58)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부활의 그날을 위하여 끝까지 인내하고 수고의 삶을 성도라면 당연히 여길 수 있어야 그것이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상22장의 말씀도 보세요! 하나님의 자녀들인 제사장들도 세상의 세력으로부터 당하지 않습니까? 죽이면 죽이는 대로 당합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세상을 상징하는 사울 왕은 성도를 상징하는 다윗을 끝까지 죽이려고 합니다

 

사울과 다윗처럼 세상과 우리는 천적(天敵)입니다. 성도가 세상과 천적이 되어야 어떤 선택을 하게 됩니까? 삼상22:2의 말씀처럼 끼리끼리 모아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빌2:5-11입니다.

 

(삼상 22: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또는 본체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빌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이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으셨지만, 그러나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아진 무리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고 하시지 않습니까? 고난이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고난을 피하게 하려는 교회는 교회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는 한, 예수님도 고난을 피할 수가 없으셨는데, 어떻게 세상의 형통과 출세와 편함을 위하여 예수님을 믿으라고 뻔뻔스런 거짓말을 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계시록의 지상 모든 교회를 말씀하시는 일곱 교회를 보세요! 계2:2-3, 9-10, 13-16, 19-23, 3:3-5, 10, 15-19입니다. 

 

에베소 교회

(계 2: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계 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서머나 교회

(계 2:9)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알거니와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도 알거니와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요 사탄의 회당이라
(계 2:10)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버가모 교회

(계 2:13) 네가 어디에 사는지를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
(계 2:14)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자손 앞에 걸림돌을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계 2:15)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계 2:16)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두아디라 교회

(계 2:19)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
(계 2:20) 그러나 네게 책망할 일이 있노라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계 2:21) 또 내가 그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었으되 자기의 음행을 회개하고자 하지 아니하는도다
(계 2:22)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계 2:23) 또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 줄 알지라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리라

 

사대 교회

(계 3:3)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계 3:4)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계 3:5)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빌라델비아 교회

(계 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라오디게아 교회

(계 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계 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계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계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잘못했으면 회개하라고 하시고 잘한 교회는 끝까지 굳게 하고 인내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질문을 드립니다. 왜 성도와 교회들이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할까요? 왜 성도와 교회들이 세상에 대하여 불평하고 원망을 할까요? 심지어 하나님에게도 원망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세상의 욕심을 버리지 못할 결과입니다. 

 

성도는 병 들어서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되었다고 기뻐하는 자들입니다. 가난으로 쩔쩔매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된다면, 그래서 가난도 역시나 복이라고 여기는 이것이 바른 성도의 증거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을 죽인 이 세상, 성도라면 무조건 미워하는 이 세상에서 형통하려고 하는 것은 다 거짓된 신앙입니다. 성도는 돈과 힘으로 살지 않습니다. 성도는 오직 믿음으로 삽니다. 큰 믿음을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세요! 

 

2. 성도라면, 인간 세상과 역사를 정확하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인간 역사나 현실은 아름답지 않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나 현실은 언제나 이렇게 빛과 어두움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죽이는 쪽이거나 당하는 쪽이거나 하지, 나는 괜찮아, 또는 나는 상관이 없어~라는 중립은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가요? 나에게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 아닙니까?~ 얼마나 미련한 기준이요 자기 판단입니까? 

 

인간 역사나 현실은 누구든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살얼음판 그 이상인데, 놀랍게도 아니 슬프게도 사람들 모두가 역사와 현실이 이렇게 끔직하다는 것을 전혀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는 괜찮을 것이라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사는 내내 큰 재앙과 저주가 없었을지라도, 죽음이나 심판의 날이 다가오는 그 사실을 아주 잊고 아니 덮어버리고 열심히 살아갑니다. 여기서 문제는 그런 안일무사주의자로 살아가는 자들에게 터지는 사건들로 인하여, 또는 이외의 아픔과 고통으로 인하여 어떤 일이 생깁니까? 불안과 두려움으로 열등감이 생기고, 그럼으로 인한 우울증으로 심하면 자살까지 합니다. 안일무사주의자들처럼, 나는 아닐 거야~ 하면서, 중립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하여, 재난이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닌데, 당장만 괜찮으면 상관없어 합니다. 다들 내일은 상관없고 오늘만 괜찮으면, 괜찮아~ 하는데,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분명할진데, 인류의 모든 전 역사는 사울 왕과 도엑과 같은 악한 자들이 아니면 그들에게 참담하게 당하고 마는 다윗이나 놉 사람 아비아달로 나뉩니다.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결국은 누구든지 심판의 날을 맞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에 대하여 이런 역사에 대하여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내가 괜찮다고 하여, 괜찮아 지는 것이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자기하고 상관없는 역사와 말씀으로 여기다가보니까, 그런 역사와 현실 속에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전혀 준비를 못하게 됩니다. 인생 포기입니까? 신앙 포기입니까? 소망이 없는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힘만을 추구하는 사울과 도엑과 같은 사람들에게는 할 말이 없지만, 그러나 신앙을 가진 성도라면 삼상22장만 보더라도죽음을 준비하거나 주님 오실 날을 준비하는 것이, 다가 되어야 맞는 것이 아닙니까? 삼상22장을 보시면서, 그간에 자신이 사울과 도엑처럼, 힘과 성공만을 위하여 땀을 흘렸다면 부끄러워하고, 회개하는 토요일 저녁시간이 되셔야 당연합니다. 우리 중에 다윗과 놉의 사람들처럼 당하신 분이 계십니까? 세상의 힘에 심하게 다윗과 놉 사람들처럼 당하였기에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셨고 기도 쉬는 죄를 짓지 않았습니까? ~ 아니면 세상의 힘을 위한 그간의 삶이요, 세상에서의 편리함을 위하여 꼼수를 부리면서, 하루살이처럼 부끄럽게 살다가 오늘도 이 자리에 오신 것은 아닌가요? 아니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아니기를 바람으로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는 선택하셔야 합니다. 선택을 하셨으면 평생 선택만 하지 마시고 이젠 살아내야 합니다. 사람도 믿지 말고, 돈도 믿지 말고, 힘도 믿지 말고, 오직 피난처가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만을 자기의 도움으로 믿고 열심히 살아가야 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고 말씀 붙들고 자기 자리를 지켜내셔야 합니다. 

 

이 세상은 천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아님을 역사로 확인해 볼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의 미국과 한국과 각 나라의 정부를 보세요! 그리고 사울과 도엑이 가득한 이 세상을 보세요! 모두가 다 정말 제 정신입니까? 부모도 그렇고 정치가도 그렇고 심지어 성직자라는 목사들도 보세요~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고,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지를 보면 진실함이 없습니다. 선과 악의 구분도 없습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난히도 자유라는 명분으로 얼마나 황당한 짓들을 그들이 저지르고 있던가요? 코로나 19로 마스크를 쓰라고 하니까,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사람은 아이들은 괜찮다고 하면서 학교로 다 등교시키라고까지 합니다. 다른 정당은 주식투자하는 자들처럼 눈치만 보고 관망만 하고 있습니다. 말이 됩니까? 다들 큰 소리를 치지만, 약자를 위함이 아닙니다. 따뜻하지도 나눔도 없고 진실함도 없습니다. 자기 속셈을 가지고 지배하려고만 합니다. 오늘 삼상22장도 동일합니다. 약자는 이 인간 역사 안에서는 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캄캄한 인간 역사요 현실입니다. 

 

그런데 캄캄한 인간 역사와 현실 안에 무엇이 있다고요? 놀랍게도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성도들에게는 기적입니다. 그리고 희망입니다. 이 참담한 세상 안에서의 성도들은 오직 예수님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죽은 자녀들을 살려 주시려고 결국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해결해 주신 주님의 마음을 본 받아야지만 됩니다. 세상을 사랑하셔서 완전하게 당하여 주신 주님만 의지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조차도 예수님을 믿는다는 성도들도 양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귀에 거슬리면 듣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은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시141:5입니다. “의인이 나를 칠지라도 은혜로 여기며 책망할지라도 머리의 기름같이 여겨서 내 머리가 이를 거절치 아니할지라 저희의 재난 중에라도 내가 항상 기도하리로다” 성도들과 모든 주님의 교회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따랐더라면, 그 기쁨이 수확한 새 포도주와 햇곡식의 풍성함으로 인한 기쁨보다 더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마음에 들어야 되었고 힘과 돈이 모든 것이 되면서 그 결과, 이 세상은 코로나 19로 홍수로 폭발로 가뭄과 폭염으로 철저하게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지경으로까지 왔는데, 금식하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던 길로 가고 있습니다. 달라지지 않아요~ 왜요? 자기는 홍수가 나지 않았고, 자기의 집은 화재로 전소 되지 않았고, 자기는 코로나 19를 걸리지 않았고~ 지금 괜찮기에, 지금 다윗과 같지 않고, 가족을 다 잃은 아비아달과 같지 않기에, 가서는 안 되는, 가던 길을 상관없이 두려움 없이 가고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시는 말씀이 전혀 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참담한 현실 속에 있으면서도 전혀 보지 못하고 있고, 이웃의 아픔을 전혀 느끼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들을 향하여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자들이라고 드러내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은 지금의 이 상황을 보고 있고 듣고 있으십니까? 지금의 이 재앙을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자기 갈 길만 가던, 가서는 안 되는 길을 향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오늘의 말씀도 자기하고 아무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상관이 없는 자는 예수님의 그 희생과 고난이 무슨 뜻인지 상관하지 않는 자입니다. 몸은 살아 있으나 영으로는 죽은 자입니다. 살아있는 자라면, 이 세상만을 보고 듣고 있는 자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보이는 세상 너머로 실존하지만 보이지 않는, 보이는 세상보다, 더 큰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의가 가득한 그 세계를 바라보고 있어야 합니다. 그 세계를 바라볼 수 있고 그 나라를 준비하게 될 때, 비로써 그 음성, 들리지 않는 그 음성을 듣게 되고, 보이지 않는 그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되면서, 전혀 다른 길인 생명의 길, 복의 길, 그것을 가지고 시온의 대로라고 하지요! 

 

시84:5-7입니다.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그 복된 시온의 대로를 주께 힘을 얻고 늘 준비하던 자들만이 따라가게 됩니다. 늘 준비하던 자들만이 들리지 않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볼 수 있게 된 자들만이, 생명의 시온의 길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가요? 그 길을 가려고 몸부림을 치고 계시다가 나오셨나요?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현실에서만의 만족을 찾아 헛된 수고만을 하시다가, 오신, 이 자리인가요?~ 지금 머뭇거릴 시간이 전혀 없습니다. 정신을 차려야 하고, 시온의 길로 당장 다 내려놓고 따라나서야 합니다. 아둘람 굴에 피한 다윗처럼, 성도라면, 지금이, 가장 최고로 은혜 충만하지 않을 수 없어야 합니다. 동의 하세요? 깊은 물에 빠지고, 불속에서 뜨거워 쩔쩔매는 상황이 되면, 어느 누가 목숨을 걸고 살길을 찾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위험천만할 때, 어떤 성도가 돈을 벌려고 땀을 흘리고 있고 컴퓨터로 여전히 즐거워하며, 여행갈 준비를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시온의 대길로 향하던 성도들은 하려던 졸업식도, 결혼식도 못하고, 더욱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먼지 털만큼의 것까지도 더 내려놓고, 더 맡겨버리고 그들은 떠날 준비를 할 것입니다. 아닌가요?~ 그렇게 준비를 하지 못하는 그 이유는 그간의 삶을 오직 세상만을 위하여 수고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심각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눅18:8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긴급한 최후의 날에 준비되지 않은 자는 버려진다는 것입니다. 다른 표현을 쓴다면 다들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 져, 뜻밖에의 덫과 같이 그날 걸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단번에, 평생 쥐고 있고, 즐기고 있던 세상의 것들을 쉽게 털고, 그 누구도 시온의 길로 따라나서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안정적이었고 지금보다 훨씬 더, 넉넉했었기에 시온의 대길, 주님이 가신 좁은 길이 더욱 가기 싫을 수밖에 없었더라면, 그러나 지금은 아니잖아요! 이젠 시기적으로도 정신 차리셔야 되잖아요! 그동안에도 그렇게 난리법석을 쳐서 회개해야 된다고 했었지만, 긴급한 지금은 말씀을 보고 듣고 쉽게 흘려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더 늦지 않게 하시려고 또 이렇게 말씀을 전하고 듣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를 수십 년인데, 끝까지 고집을 부리시렵니까? 이 말씀을 듣고 야곱의 하나님만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아야지만, 복을 받고 이겨낼 수 있는데, 반드시 버려야 되는 자기의 기준 때문에 서로가 미워하면서 경쟁하다가 그날이 덫과 같이 임할 텐데, 그때, 덜컹 덫에 걸려들면, 어떻게 하시려는 것입니까? 결국은 사울이 그 기회 속에서 버려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하여 회개하라고 오직 믿음으로만 나라를 통치하라고 사울 왕에게 기회를 주셨지만, 자기 기준 때문에 그 음성을 전혀 듣지 못하고 끝났습니다. 그냥 끝이 난 것이 아니라 다윗을 비롯하여 거슬리는 모든 사람들은 다 죽여야 했고 제사장들이 사는 놉 마을을 한 사람의 잘못된 자기 판단과 기준 때문에 전멸케 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누구의 아픔이라고요? 우리들의 실제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다시 또 질문합니다. 여러분들은 들어야 되는 이 음성을 듣고 있나요? 아니면 듣고 있는 척만 하고 있나요? 이 질문을 하는 이유는 들어야 할 것을 듣지 못하고 봐야 될 것을 사울과 도엑처럼 보지 못하면, 다 가져 놓고도 없는 자들의 것을 빼앗게 되고 모든 힘인 권세를 쥐고 있으면서도 가난한 자들의 것을 빼앗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배부름의 고마움과 넉넉함의 소중함을 전혀 모릅니다. 아닌가요? 

 

우리 한국의 대기업을 보세요! 대기업이 어디에다가 사업을 오픈하던가요? 동네 가난한 곳에서 아저씨 아줌마가 작은 구멍가게에서 겨우 먹고사는 그런 곳에 그것도 체인으로 open하여 그 작은 수입까지도 가로채고 있지 않던가요? 성경에서도 보면, 있는 자들이 가난한 과부의 땅까지도 빼앗기에 이 점을 강조하고 있지 않던가요? 사1:16-17, 사10:1-2, 잠23:10입니다.

 

(사 1:16)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사 1:17)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

 

(사 10:1) 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사 10:2)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잠 23:10)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며 고아들의 밭을 침범하지 말지어다

 

이렇게까지 말씀을 주시면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어떤 따뜻한 공동체인지를 온 천하에 드러내야 했지만, 사울 왕의 삶을 보세요! 오늘 말씀을 보시면서 아직도 실감이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까지 거짓 없이 말씀을 통하여 온전히 드러내 주셨지만, 여전히 아직도 우린 이런 사건의 말씀을 확인하면서도, 확인 하지 못한 자처럼, 그런 일에 대하여서는 관심조차도 두지 않고 있습니다. 다들 거짓된 말씀만을 골라서 하고 있는데, 거짓된 말씀만을 얼마나 열심히 따라가고 있던가요? 지금 제가 하는 말이 아닙니다. 딤후4:1-4입니다.

 

(딤후 4:1)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딤후 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딤후 4: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딤후 4: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그 당시에도 그래서 거짓된 가르침을 경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경계를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된다고요? 온 마을에 이렇게 피바람이 불어 피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특히 봐라! 바로 제사장 마을을 이렇게 처참하게 무너뜨린 그 왕이 바로! 너희들이 바라고 원하던 자가 아닌가? 너희들이 그렇게 원하던 왕, 힘으로 통치하는 세상의 왕의 그 실체를 봐라!~ 왜, 하나님께서 왕일지라도 율법을 곁에 두어야 하고 반드시 순종하라고 하신 그 이유를 오늘 사울 왕과 도엑을 통하여 여지없이 보여주십니다. 사울 왕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울 왕에게는 아무 죄도 짓지 않은 제사장들과 놉 마을 사람들을 인정사정없이 몰살을 시켜버립니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그 이유만으로, 자기편을 들지 않았다는 핑계를 만들어서 있을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래서 우린 이런 사건을 보면서 아니 하나님은 이런 만행을 보시면서도 놔두시는 악한 하나님이십니까? 라고 할 정도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악한 자 편에서 선한 자들을 죽이도록 놔두신 것이 실수였다면, 그래서 하나님의 악함이 들통 났다면, 이 사건을 지워버릴까요? 놔두라고 할까요? 당연히 삭제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면이 노출 될 수 있는데, 그냥 이렇게 놔두게 하셨을까요? 믿음이 아닌 오직 힘만으로 왕의 자리를 가지려는 자들의 그 실체를 보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힘의 왕의 실체를 완전 보여주지 않고 짓는 죄악마다 덮어버린다면, 성경도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왜 율법을 왕의 곁에 두어야 되는지를 설명할 길이 없을 것입니다. 러나 말씀을 통하여 인간의 만행, 악한 실체를 그대로 드러내 주시면서, 그리고 해결의 길을 주신다면, 타락한 인간으로써, 바랄 것이 있을까요? 그래서 인간의 실체와 구원의 길을 기록한 성경은 최고의 선물입니다. 므낫세 왕을 보세요! 왕하21:16입니다. 

 

(왕하 21:16) 므낫세가 유다에게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한 것 외에도 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가득하게 하였더라

 

그가 통치할 때, 이 문에서 저 문까지 피가 가득했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이런 최악을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믿음의 왕을 세우면 되기에, 이런 악한 사건을 이렇게 드러내 주십니다. 믿음의 왕이 왜 필요한지를 알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지, 하나님께서 그 사건을 외면하셨거나 하나님은 선하지 않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그 악함을 무엇으로 알게 합니까?~ 참혹한 어떤 지경으로까지 가서 다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다 보여 주시는데, 아니 어떻게 하나님으로써 막아주지 않고, 인간으로써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라고 통탄해 놓고도 자기 자신들이, 역시나 멋대로 하더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사건이 수억만 건이 되는데 한 곳만 찾아보겠습니다. 왕하6:24-7:20입니다.

 

(왕하 6:24) ○이 후에 아람 왕 벤하닷이 그의 온 군대를 모아 올라와서 사마리아를 에워싸니
(왕하 6:25) 아람 사람이 사마리아를 에워싸므로 성중이 크게 주려서 나귀 머리 하나에 은 팔십 세겔이요 비둘기 똥 사분의 일 갑에 은 다섯 세겔이라 하니
(왕하 6:26) 이스라엘 왕이 성 위로 지나갈 때에 한 여인이 외쳐 이르되 나의 주 왕이여 도우소서
(왕하 6:27) 왕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를 돕지 아니하시면 내가 무엇으로 너를 도우랴 타작 마당으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포도주 틀로 말미암아 하겠느냐 하니라
(왕하 6:28) 또 이르되 무슨 일이냐 하니 여인이 대답하되 이 여인이 내게 이르기를 네 아들을 내놓아라 우리가 오늘 먹고 내일은 내 아들을 먹자 하매
(왕하 6:29) 우리가 드디어 내 아들을 삶아 먹었더니 이튿날에 내가 그 여인에게 이르되 네 아들을 내놓아라 우리가 먹으리라 하나 그가 그의 아들을 숨겼나이다 하는지라
(왕하 6:30) 왕이 그 여인의 말을 듣고 자기 옷을 찢으니라 그가 성 위로 지나갈 때에 백성이 본즉 그의 속살에 굵은 베를 입었더라
(왕하 6:31) 왕이 이르되 사밧의 아들 엘리사의 머리가 오늘 그 몸에 붙어 있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리실지로다 하니라
(왕하 6:32) 그 때에 엘리사가 그의 집에 앉아 있고 장로들이 그와 함께 앉아 있는데 왕이 자기 처소에서 사람을 보냈더니 그 사자가 이르기 전에 엘리사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이 살인한 자의 아들이 내 머리를 베려고 사람을 보내는 것을 보느냐 너희는 보다가 사자가 오거든 문을 닫고 문 안에 들이지 말라 그의 주인의 발소리가 그의 뒤에서 나지 아니하느냐 하고 
(왕하 6:33) 무리와 말을 할 때에 그 사자가 그에게 이르니라 왕이 이르되 이 재앙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왔으니 어찌 더 여호와를 기다리리요 

 

 

(왕하 7:1) 엘리사가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일 이맘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하셨느니라 
(왕하 7:2) 그 때에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는 자 곧 한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요 하더라 엘리사가 이르되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니라
(왕하 7:3) 성문 어귀에 나병환자 네 사람이 있더니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어찌하여 여기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랴
(왕하 7:4) 만일 우리가 성읍으로 가자고 말한다면 성읍에는 굶주림이 있으니 우리가 거기서 죽을 것이요 만일 우리가 여기서 머무르면 역시 우리가 죽을 것이라 그런즉 우리가 가서 아람 군대에게 항복하자 그들이 우리를 살려 두면 살 것이요 우리를 죽이면 죽을 것이라 하고 
(왕하 7:5) 아람 진으로 가려 하여 해 질 무렵에 일어나 아람 진영 끝에 이르러서 본즉 그 곳에 한 사람도 없으니
(왕하 7:6) 이는 주께서 아람 군대로 병거 소리와 말 소리와 큰 군대의 소리를 듣게 하셨으므로 아람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이스라엘 왕이 우리를 치려 하여  사람의 왕들과 애굽 왕들에게 값을 주고 그들을 우리에게 오게 하였다 하고 
(왕하 7:7) 해질 무렵에 일어나서 도망하되 그 장막과 말과 나귀를 버리고 진영을 그대로 두고 목숨을 위하여 도망하였음이라 
(왕하 7:8) 그 나병환자들이 진영 끝에 이르자 한 장막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거기서 은과 금과 의복을 가지고 가서 감추고 다시 와서 다른 장막에 들어가 거기서도 가지고 가서 감추니라
(왕하 7:9) 나병환자들이 그 친구에게 서로 말하되 우리가 이렇게 해서는 아니되겠도다 오늘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거늘 우리가 침묵하고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알리자 하고
(왕하 7:10) 가서 성읍 문지기를 불러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아람 진에 이르러서 보니 거기에 한 사람도 없고 사람의 소리도 없고 오직 말과 나귀만 매여 있고 장막들이 그대로 있더이다 하는지라
(왕하 7:11) 그가 문지기들을 부르매 그들이 왕궁에 있는 자에게 말하니
(왕하 7:12) 왕이 밤에 일어나 그의 신복들에게 이르되 아람 사람이 우리에게 행한 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그들이 우리가 주린 것을 알고 있으므로 그 진영을 떠나서 들에 매복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그들이 성읍에서 나오거든 우리가 사로잡고 성읍에 들어가겠다 한 것이니라 하니 
(왕하 7:13) 그의 신하 중 한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청하건대 아직 성중에 남아 있는 말 다섯 마리를 취하고 사람을 보내 정탐하게 하소서 그것들이 성중에 남아 있는 이스라엘 온 무리 곧 멸망한 이스라엘 온 무리와 같으니이다 하고
(왕하 7:14) 그들이 병거 둘과 그 말들을 취한지라 왕이 아람 군대 뒤로 보내며 가서 정탐하라 하였더니
(왕하 7:15) 그들이 그들의 뒤를 따라 요단에 이른즉 아람 사람이 급히 도망하느라고 버린 의복과 병기가 길에 가득하였더라 사자가 돌아와서 왕에게 알리니
(왕하 7:16) 백성들이 나가서 아람 사람의 진영을 노략한지라 이에 고운 밀가루 한 스아에 한 세겔이 되고 보리 두 스아가 한 세겔이 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이 되었고
(왕하 7:17) 왕이 그의 손에 의지하였던 그의 장관을 세워 성문을 지키게 하였더니 백성이 성문에서 그를 밟으매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죽었으니 곧 왕이 내려왔을 때에 그가 말한 대로라 
(왕하 7:18) 하나님의 사람이 왕에게 말한 바와 같으니 이르기를 내일 이맘 때에 사마리아 성문에서 보리 두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고 고운 밀가루 한 스아를 한 세겔로 매매하리라 한즉 
(왕하 7:19) 그 때에 이 장관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늘에 창을 내신들 어찌 이 일이 있으랴 하매 대답하기를 네가 네 눈으로 보리라 그러나 그것을 먹지는 못하리라 하였더니 
(왕하 7:20) 그의 장관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으니 곧 백성이 성문에서 그를 밟으매 죽었더라

 

자기 생각과 판단은 결국 버려집니다. 

 

늘 감사하는 건강한 삶은 자기 자신의 약점을 감추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준비가 되어 있어도 잘하려는 마음이 커지면, 어떤가요? 잘 안 되는 법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의 약점 그대로를 가지고 자기의 자리를 지켜내려고 늘 다윗처럼 준비할 때, 보람을 가질 것입니다. 다윗처럼 아둘람 굴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려고 하고 진실하려고 한다면, 오히려 더 공감하게 되면서 같이 하는 힘든 이웃에게 큰 위로와 도움이 되고 서로 성장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 왕이나 도엑을 보세요! 힘이 있다고 하여 악한 자기를 감추었기 때문에 영원히 후회할 짓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자신이 약하면 약한 데에서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늘 준비하신다면, 그 다음은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 주십니다. 당연히 하나님의 도움 속에 놓이니, 어려움도 극복하게 되고 충성된 종으로 인정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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