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교회

08/09/2020 - 사무엘상 21:1-15 본문

주일 설교 말씀

08/09/2020 - 사무엘상 21:1-15

PastorYK 2020. 8. 10. 15:01

제목 :  거짓말 하고 미친놈이 된 다윗 - 다윗을 위한 사울 왕

 

오늘 말씀의 결론은 코로나 19가 콧노래가 되게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정신없이 살아가던 나, 우리들에게 코로나 19를 통하여 콧노래가 나오게 해 주십니다. 그런데 우린 세상의 원리와 방법으로 해결하고 판단하므로,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게 됩니다. 변화와 자람의 기회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의 여러 특성 중들에 한 가지를 소개드리면, 다른 민족도 그런 특성이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한 여름이 되면, 이열치열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한 여름의 더위는 뜨거운 음식으로 해결한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도 한국인의 이열치열처럼 다윗의 두려움을 사울 왕의 두려움으로 풀어가게 하십니다. 다윗은 사울 왕 때문에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복이 되게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시는 그 이유는 누구든지 약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약점은 풀어서 헤쳐 놨을 때, 문제점이 보이게 되고 수리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의 문제점들을 그 누구도 간단하게 쉽게 스스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드러나야지만 됩니다. 그런데 그 드러나야 되는 자기의 문제점을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이웃을 통하여 항상 보여주시면서 해결하도록 해 주신다는 점입니다. 

 

결국 다윗의 허물, 약점을 해결하여 믿음의 왕으로 세우시려고 어린 다윗을 사울 왕에게로 보내주셨고, 그리고 사울 왕 때문에 이젠, 다 내려놓게 떠나게 하십니다. 더 이상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게 됩니다. 장인 사울 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집을 떠난 다윗의 처지가 되고 말았지만, 그래서 졸지에 거짓말을 해야 했고, 그 거짓말로 제사장 아히멜렉으로부터 진설병인 떡과 병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연함이 있을 수 있을까요? 바로 그날 그 시간에 공교롭게도 사울 왕의 목자장 되는 도엑이라는 인물이 성소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다윗 자신의 도피가 도엑에게 들통이 납니다. 그 들통으로 어떤 사건이 터지고 말았습니까? 온 제사장들과 놉의 모든 사람들까지도 다 죽게 됩니다. 삼상22:18-19입니다. 

(삼상 22:18)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오 명을 죽였고
(삼상 22:19) 제사장들의 성읍 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

 

다윗으로서는 갈수록 태산입니다. 갈수록 더욱 어려워집니다. 그날 자신을 본 도엑이 이 사실을 사울 왕에게 고자질 할 것을 알고 다윗은 원수의 나라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피하게 됩니다. 그런데 역시나 그날도 아기스 왕의 신하들이 다윗을 알아보고는, 결코 다윗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간언(remonstrate)으로 다윗은 돌연 미치광이 노릇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위기를 면하게 됩니다. 아니 다윗이 무슨 죄를 그렇게 저질렀다고 이렇게 꼬여도 한참 꼬여 아무 것도 못하고, 그 어디도 갈 수 없는 형편에 놓이게 합니까?~ 해도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심지어 이젠 미친 놈 행세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아둘람 굴로 피신하게 됩니다. 삼상22:1입니다. 

(삼상 22:1)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집과 가족과 궁을 떠났지만, 다윗이 머물 곳이라고는 오직 굴이었습니다. 다윗의 마음이 얼마나 착잡했었을까요? 그리고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요? 

 

아마도 추운 밤에 양들과 힘들게 생활하던 그날들이 오히려 심하게 그리워졌었을 것입니다. 그 더운 한 낮에 그늘 밑에서 땀 흘렸던 그날이 천국이었음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처지가 되면, 누구든지 예전에 힘들었다고 생각했던  당시를 생각 하면서 쓴 웃음을 짓게 됩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경험이 없었습니까? 졸지에 미친놈이 되어야 했고, 갈 곳이 없어서 굴에서 숨어 살아야 했다면, 누가 집을 떠나려고 할까요? 아니 누가 골리앗과 싸워 승리자가 되려고 했을까요? 

 

다윗도 이렇게 될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미리 알았더라면 ~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한치 앞도 완전 몰라서, 얼마나 미련하고 못난 짓을 하게 됩니까? ~ 다윗처럼 골리앗과 싸워 이겨서 출세를 하고, 군대장관이 되고, 왕의 사위까지도 되었지만, 자기 신세가 이렇게까지 도망가야 했다면, 누가 골리앗과 싸우려고 할까요? 누가 군대장관이 되려고 하고, 왕의 사위가 되려고 했을까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습니다. 일초 앞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단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유는, 다들 “나는 아닐 거야~”에 있습니다. 그러나 나타나는 우리들의 현실은, 이건 아닌데,~” 라고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다윗조차도 그럴 줄, 몰랐었기에, 형 요나단에게, 가서 아니 이럴 수 있냐~고 하소연을 했지만~ 그러나 사실이었고, 거기서 끝이 아니라~결국 더 이상한 현실을 맞아야 했고 이젠, 굴에서 몸을 겨우 피해야 했습니다. 이건,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의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현실이기에 지금 만족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린 어떤 생각을 할 수 있을까요? 그 생각조차도 지금 여러분들의 자리에 따라서 확실하게 달라질 것입니다. 다윗이 목동으로 있을 땐, 자기 신세를 두고 한숨을 졌을지 모르지만, 미친놈이 되어야 했을 땐, 목동 당시가 그리워졌을 것입니다. 군대장관이 되고 왕의 사위가 되었을 땐, 세상에서 두려운 것이 없었겠지만, 도망자 신세로 전락되었을 땐, 골리앗과의 만남이 후회가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젠 한없이 도망가야 되는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될 줄은 전혀 몰랐었지만, 그러나 그렇게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이런 처지가 되어야 했던 이유는, 이 모진 과정 없이는 믿음의 왕이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혹독한 훈련이 필요한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말씀으로 드리면, 다윗이 하나님보다 사울 왕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을 두려워하다가보니까, 모든 세상의 적들인 아기스 왕도 다윗이 심하게 두려워하여 미친놈 짓도 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볼 때, 당시 다윗의 믿음의 수준으로는 이스라엘의 믿음의 왕으로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골리앗을 무너뜨린 것만으로 해결이 되는 인생문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왕의 조건은 골리앗을 넘어뜨리는 믿음보다 더 큰 믿음이 요구되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결국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에게 넘어갔을 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남편인 충신 우리아를 죽이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이 충신 다윗을 죽이려고 했듯이 말입니다. 밟아서는 안 되는 그 사울왕의 악한 전철을 다윗도 왕이 되더니, 충신 가정을 완전하게 무너뜨리더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왕이 되더니 사울 왕보다 더 악한 살인을 저지르더라! 입니다. 충신이요 사위인 다윗을 죽이려는 사울 왕을 볼 때는, 이런 악하고 치졸한 장인이 있단 말인가? 라고 조소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는데, 더한 짓을 다윗이 왕이 되더니, 저지르더라~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가 아니던가요? 이스라엘을 향하여 바보들이라고 하면서 우리들이 얼마나 열심히 따라가고 있던가요? 그래서 이런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미워하는 그 어떤 사람이 바로 자기더라는 것입니다

 

자기와 너무나 똑같은 사람을 우린 정죄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다른 면이 있다면, 사울 왕이었던 우리들이,사울 왕은 끝까지 회개를 하지 않아서 버려졌지만, 우리와 다윗은 자기의 죄가 드러나자, 숨기지 않고 회개했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 점이 다릅니다. 그러나 그 다른 점이 은혜입니다. 복입니다. 이런 복은 없습니다. 아닙니까?~ 사울 왕은 끝까지 부끄럽게 살다가 기회를 다 놓치고 부끄럽게 죽었지만, 사울 왕보다 더 악한 죄를 저지른 다윗은 회개를 하므로 빛나는 하늘의 영원한 별로 인정을 받고 있기에 은혜는 진정한 복입니다. 

 

그래서 성도된 우리들이 사울 왕의 그 역할을 보면서, 오히려 나를 힘들게 하는 그 이웃을 미워할 것이 아니라 감사할 수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도 성도가 지금도 힘을 위한 신앙이요, 사울 왕이 되고 싶어 한다면, 자신의 꼴이 사울 왕과 다르지 않기에 이점을 확인하면서 당장 다윗처럼 회개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성도 자신이 사울 왕의 꼴을 하고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심하게 아파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배신입니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부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여튼 오늘 말씀의 주제는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그래서 소망이 전혀 보이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의 도움이 전혀 눈꼽만치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찔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성도로서 포기하고 낙심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왜요? 도망 다니고 있는 다윗을 보면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악의 절망인 다윗이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하나님의 뜻을 다윗을 통하여 다 이루게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지금 다윗은 세상의 별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을 심하게 괴롭히는 사울 왕이 있었기에 어떤 결론을 우리가 가질 수 있습니까? 다윗과 같은, 믿음의 사람들은 자기를 힘들게 하는 이웃을 통하여 믿음이 더욱 깊어지고 강하여지지만, 사울 왕처럼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들은, 세상의 성공만을 원하는 사람들은, 믿음을 가진 사람을 통하여 더욱 사악해 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자녀들을 훈련시키시는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에도, 그의 곁에 누구를 남겨 주시던가요? 

 

악질 군대장관인 다윗의 누이 스루야의 아들 요압입니다. 다윗에게 요압이 큰 방해가 된 것도 사실이지만 다윗이 강력한 조카 요압 때문에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왕의 자리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린 어떤가요? 놀랍게도 늘 자기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심지어 40-50대의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기의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건 아닙니다. 40-50대의 성도가 되면, “자기 마음에 들고 안 들고”의 그 수준은 이미 넘어서야 합니다

 

왜요? 40-50대 성도들은 우리 성지의 수준이 아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의 나이 40-50대가 되어도, 여전히 내 마음에 들어야 한다~라고 한다면, 이보다 부끄러운 꼴이 어디에 있을까요? 혹시 우리 중에도 여전히 자기 마음에만 들어야 되는 30대 40대 50대 분들이 계십니까? 이건 도망가야 했던 다윗의 참담한 형편 정도도 아니고, 미친놈이 되어야 했던 그런 처지도 아니라 제2의 밧세바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왜요? 자기 마음에 들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성도된 어른이 자기 마음에만 들어야 한다는 것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정도가 아닙니다. 

 

40-50대 어른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자기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것은 다윗이 밧세바를 취하는 것과 같은 죄질이기에, 안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입맛에 맞아야 하고 자기 눈에 맞아야 하고, 자기 마음에 들어야 하고 자기 즐거움을 막으면, 안 되고~이건 밧세바와 동침하고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죽이는 다윗과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최악의 대형 사고를 막아야 하기에 그래서 오늘과 같은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말씀이 중심이 안 되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하고만 교제를 하게 되면서 어떤 어른이 된다고요? childish adult가 된다는 것입니다. childish adult는 몸과 나이는 어른인데 판단은 성지수준일 때 쓰는 단어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창피한 노릇인지를 알기는 아세요? 잘 모르시지요? 잘 모르시는 이유는 다들 몸과 나이는 어른인데 여전히 성지처럼 자기 마음에 들어야지만 좋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보니까, 자기 좋아하는 것만 구입하고 있잖아요~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 포기하고 있잖아요~ 

 

그러다가보니까, 가정도 무너지고 있고 교회가 기업이 된 것입니다. 목사가 먹사가 되고 집사가 잡사 된 것입니다. 왜요? 자기 마음에 들어야지만,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러분 곁에서 여러분들을 괴롭히는 분이 또는 괴롭게 하는 어떤 무엇이 있습니까? 미워할 것도 아니며 두려워해서도 안 되고 그리고 어떤 문제로 쩔쩔매고 있다면 그것이 여러분들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는 조건이라는 것도 늘 기억하면서 불평과 원망이 아니라 품고 가야 합니다. 품어야지만 자신의 믿음이 그 안에서 강하여 지고 깊어질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그냥 역사적인 인물 다윗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윗을 통하여 전 인류에게 전 역사의 성도들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성도는 이 세상 안에서 받은 은혜가 하도 커서 손해를 기꺼이 보는 존재들입니다. 이 사실을 잊는 순간에 어느 사이에 한 아내를 범하고 충신을 죽이는 다윗이 되고, 사울이 되고 요압의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는데, 이건 재앙이요 저주입니다. 가능한 빠른 시간에 자기 자신을 주님에게로 맞추는데 모든 힘과 마음과 정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십 수년간을 교회에 다녔다면 자기 마음에 들어야지만 된다는 성지수준에서 완전히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어른은 더 손해 보는 자이고 어른은 더 먹지 않는 자이고 어른은 더 쉬지 않은 자이며, 어른은 더 가지려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왜요? 사랑하시는 주님과 사랑해야 되는 이웃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도라는 분들이 더, 더, 더하고 있으니, 말이 됩니까? 만약에 성도나 교회가 자족하지 못하고 더, 더, 더하는 것은 신앙하고는 완전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생각해 보세요! 

 

자기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그 방향은 하나님의 뜻하고는 완전 다른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의 방향은 오직 썩은 세상에서의 성공입니다. 그 방향을 가지고 태어난 성도일지라도 그 성도의 마음은 이미 본질상 죄 덩어리일진데, 그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하고 그 방향이 180도가 되는 것입니다. 성도라면 오직 주님의 마음을 품어야 하고 늘 사모하셔야 됩니다. 그 주님의 마음은 세상과 다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품는 수준입니다. 

 

악은 모양이라도 내지 않으려는 삶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 마음의 수준이 어떤가요? 아픔을 주고, 손해를 끼치면, 당장 완전 원수가 됩니다. 상대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도라는 거룩한 분들이 아직도 세상의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그런 타락한 자기 마음에 들어야 된다고 합니까? ~ 자기 마음에 들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에 들어야 됩니다. 만약에 성도가 자기 마음이 아니라 주님의 마음에 들어야 된다고 하면 어떤 기적이 생길까요? 악의 세력이 7길로 도망칠 것입니다. 

 

코로나 19가 가득할찌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코로나 19로 인하여 더욱 야곱의 하나님만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을 것입니다. 그래서 고백할 것입니다. 나는 코로나 19로 믿음이 더욱 자라게 되었다고 고백할 것입니다. 눈앞에서 생기는 모든 재앙이 자기의 신앙을 자라게 하는 기회로 삼을 것입니다. 그러니 화목과 연합과 감사와 기쁨이 가득할 것입니다. 슬픔이 아니라 기쁨으로, 더러움이 아니라 깨끗함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구원을 주시고 신앙을 주시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자기 인간적인 마음에 들어야 되는 수준에서 점점 벗어나서, 오직 주님의 마음에 들어야지만 만족하는 자로서의 변화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수준은 어떤가요? 아직도 자기의 인간적인 마음에 들어야지만 됩니까? 그렇다면 아직도 은혜를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성도는 오직 하나님하고의 연합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일치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공격을 받으면서 힘겹게 성도가 살 때, 야곱의 하나님만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는 성숙한 성도들은 진정으로 감사 고백을 드릴 것입니다. 

 

그 감사는 은혜 모르던 세상에서의 감사가 아닙니다. 모든 죄의 뿌리를 뽑아내야 하고 그간 쌓인 죄의 벽을 깎아내서 새로운 길인 믿음으로 살아갈 때만, 비로써 신앙의 감사를 드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전까지는 온전한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건강하고 온전한 신앙은 실패 속에서 자라게 되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기에, 성도는 실패에 대한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암 환자에게 의사들이 해 주는 조언이 암을 제거하려고 하다가 스트레스를 받지 말고 암과의 친구가 되라고 하지 않던가요

 

어떤 사람이 열심히 일을 하여 집을 구입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연히 예쁜 잔디가 좌악~ 깔려 있는 멋진 집이었는데, 그런데 어느 날 가만히 보니까, 그 예쁜 잔디에 민들레가 자리를 잡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열심히 뽑았는지, 최선을 다했지만, 결국 민들레의 끈질긴 특성에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어서 잔디 전문가에게 물었더니, 온 회신이 무엇인지 아세요? 민들레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 넘어, 저 편에 이렇게 또 다른 길이 이 세상에서도 있습니다. 

 

현실의 실패, 고난, 어려움이 주는 그 아픔을 해결하는 방법이 어떤 사람들은 자살로, 어떤 사람들은 외면으로, 또 어떤 사람들은 힘으로 벗어나려고 하지만, 그러나 가장 지혜로운 길은 우리에게 주신 그 믿음을 가지고 자살하고 외면하고 힘으로 해결하려고 피곤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품어버리는 것입니다. 품으면 어떻게 된다고요? 어미 닭이 계란을 품었을 때, 너무나 예쁜 병아리가 부활하듯이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그 누구도 얻을 수 없는 부활의 기쁨과 승리를 얻게 합니다

 

그것은 이렇게도 표현이 됩니다. 알을 품는 것보다 깨뜨리는 것이 쉽기에, 깨뜨리면 부활의 기쁨은 없지만, 그 반대로 어려움 속에서도 품으면 부활의 기쁨인 병아리를 얻습니다. 그렇습니다. 관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세우는 것보다 쉽기에 쉬운 선택인 이웃을 포기하면 열매가 없습니다. 후회와 상처만 남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관계를 위하여 나를 포기하면 그 아픔은 있지만 최고의 기쁨과 보람이라는 큰 열매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다윗에게 이런 혹독한 경험을 주신 것입니다. 다윗아! 너의 그 아픔으로 힘든 이웃을 품어 함께 기쁨을 나누는 믿음의 왕이 되라는 것입니다. 아픔이 없는 사람은 아픈 이웃을 보지도 품지 못합니다. 아파하지 않았던 사람은 행복도 누리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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