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교회

07/12/2020 - 사무엘상 17:1-58 본문

주일 설교 말씀

07/12/2020 - 사무엘상 17:1-58

PastorYK 2020. 7. 13. 17:26

말씀: 삼상17:1-58

제목: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크게 두려워하니

지난 7월 9일에 우린 또 상상도 할 수 없는 서울 시장 박 원순 씨 자살 사건에 대하여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민주당의 대통령 대선 후보로도 인정을 받았던 그가 결국 또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만 것입니다. 그 원인은 아마도 전 비서를 성추행 고발 사건이 그런 무모한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한 그 분이었는데, 그분의 안타까운 자살이, 그분의 죽음 앞에서 이렇게 표현하기가 심히 미안하지만 그러나 그렇지 않으면 자살할 이유가 또 있었을까? 라는 생각하게 됩니다. 이 사건 역시 힘이 모든 것이었던 그래서 또 당하게 되면서 세상의 사울 왕이요 골리앗이던 그가 또 넘어진 사건입니다. 힘의 골리앗, 모든 세상 스펙을 우선으로 여기고 있는 그들은 역시나 골리앗처럼, 사울처럼, 박 원순 시장처럼 세상 사람들은 타이건 자의건 간에 결국 무너지게 됩니다. 이것이 세상의 실체요 논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에 있던가요? 세상의 골리앗이나 골리앗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보면, 골리앗은 늘 골리앗의 자리를 힘으로 지키려고 하고, 골리앗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골리앗이 되고자 몸부림을 치면서 죽어라 힘의 준비만을 합니다. 그들은 무엇이 진리인지를 완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힘만이 모든 것인 골리앗의 그 결과와 종말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기에, 가서는 아니 되는 그 죽음의 길, 무너지고야 마는 그 종말을 가지 못해서 안달합니다. 그러나 삼상17장의 말씀만으로도 골리앗의 종말이 어떤 지, 정확한 말씀을 주십니다. 그런데 보세요! 그 큰 거인 골리앗을 무너뜨리고 싶어 하는 사울 왕도, 더 큰 골리앗이 되고 싶은 것이 얼마나 미련한 욕망인지를 다윗을 통하여 알아야 하는데, 전혀 모릅니다. 그 막강해 보이는 세상의 능력과 힘이 결국 믿음의 꼬마 다윗에게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깨닫고 항복하던가요? 

 

아니면 끝까지 골리앗이 되고자 몸부림을 치던가요? 놀랍게도 힘의 삶이 철저하게 믿음이라는 새로운 능력과 힘에 멸망한다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으면서도 불구하고, 끝까지 힘으로 나라를 통치하려고 아니 자기의 자리를 힘으로 확보하려고 평생 40년 내내 평생을 하나님을 철저히 외면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하여 힘의 허무함을 보여주시고 계시는데, 이것이 세상의 실체인데 아니 어떻게 성도라는 자녀들이 골리앗이 되지 못해 안달할 수 있을까요? 

 

성도는 사울처럼 힘이 모든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성도는 골리앗을 이젠 넘어가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가끔이 아니라 언제나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날에 대한 그 분의 계획’을 온전히 따라가야지만 됩니다. 그래야 다윗처럼 골리앗을 무너뜨리게 됩니다. 그런데 아니 어떻게, 꼬마 15세의 다윗하고도 상대도 안 되는 그 힘을 위하여, 절망뿐인 골리앗이 되지 못하여, 몸부림을 칠 수 있을까요?~ 사울이요 골리앗일 수밖에 없었던 우리들이 넘어서게 하시려고 힘에서 믿음으로 사는 자녀들이 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에게 예수님을 통하여 새로운 힘인 믿음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럴진대, 분명히 알고 있는데, 알고 있다고 하면서 골리앗이 되고 싶어 한다면,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꼬마 다윗하고도 전혀 상대도 안 되는 그 세상의 힘에서 더 나아가라고, 새로운 길을 따라가라고, 위의 것만을 바라보라고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린 이제 그 복된 좁은 길을 따라갈 수 있게 된 것인데~ 영생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이 절망의 세상에서 빠져나온 자들이 되었는데~ 그 누구도 함부로 갈 수 없는 하나님의 의로 가득 찬, 생명의 나라를 맞이하게 된 자로서, 사라질, 힘과 재물을 위하여, 허무한 골리앗이 되지 못하여 난리를 치고 있습니까?

 

오직 섬김과 양보와 온유함으로 자기가 무너지면서 이웃을 세우려고 땀을 흘려야 되는 그 복된 길을 우린 너무나 싫어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무너져서 무너진 그 이웃을 세우려는 그 길이 너무나 싫다가 보니까, 단지 흉내만 내는 위선자로 자기의 자리를 사울 왕처럼 힘으로 확보하려고 하지만, 아니 우리가 그 좁은 길이 싫다고 하면,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그래 됐어~하시면서 눈감아 주십니까? 아닙니다. 우린 믿음으로 골리앗을 해결을 해야 합니다. 특히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속지 아니하시기에, 그래서 우린 골리앗이 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왜요? 힘의 골리앗은 더 큰 골리앗에게 언제나 두려워서 도망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해야 합니다. 지배하지 않으면 지배를 당합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사울 왕도 보세요! 

 

사울 왕이 힘으로 나라를 통치하려고 하였지만 골리앗의 도전에 어떤 꼴로 40일 간을 모욕과 조소를 당하고 있었습니까? 자기보다 더 큰 골리앗 앞에서 그냥 한 숨만 쉴 뿐,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다윗, 그 어린 꼬마가 어떻게 이 문제를 수습하던가요? 삼상17:45입니다.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세상의 골리앗은 결국 믿음으로 제압됩니다. 거인 장수가 쓰러져 목이 떨어집니다. 믿음이 진정한 힘입니다. 그 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허락됩니다. 그런데 어떤가요? 

 

여러분들은 다윗의 그 믿음을 가지고 무슨 싸움을 하고 있습니까? 그 믿음을 가지고 무엇을 더 가지려고 하십니까? 골리앗하고 싸우면서 승리하여 날마다 찬송을 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골리앗이 되고 싶어서 찬송을 드리고 있던가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찬송은 골리앗하고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지 않고 드리는 찬송은 찬송이 아닙니다. 골리앗 때문에 매일 도망 다니면서, 세상의 힘 앞에서 거짓되고 핑계대고 예수님이 진리라고 한 마디로 못하고 있다가 교회에 나와서 찬송을 드린다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그 찬송을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니 사울 왕이 삼상17:4-16의 말씀처럼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의 협박과 공갈에 무서워 덜덜 떨고 있는데 그런 상태에서 무슨 찬송을 드릴 것이며, 찬송을 한다고 하나님이 그 찬송을 받으실까요? 아닙니다. 진정한 찬송은 믿음을 가지고 세상의 골리앗과 싸워서 승리한 자들만이 드릴 수 있는 것이 찬송입니다. 성경을 보세요! 잘 알고 있듯이 모세의 누이 미리암홍해를 건너 후, 찬송을 드렸고, 사사 드보라가 가나안 땅의 왕 야빈하고 전쟁에서 승리하여 찬송을 드렸고, 한나가 사무엘을 얻고 찬송을 드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교회의 찬송 사역을 맡고 있는 김 신득 집사님도 실은 자신이 골리앗과 늘 싸워 승리자가 되게 하신 하나님을 위한 찬송을 드려야 했던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아니 날마다 바쁘게 일하고 있는데, 주일 찬송을 인도하기 위하여 그럼 하던 일을 멈추고 꼭 골리앗을 찾아서 싸워야 지만, 되는가? 이제 이 질문이 중요합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골리앗은 어디에 있는가? 여러분들의 골리앗은 어디에 숨어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만나 싸워야 되는 그 골리앗은 얼마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가요? 싸워서 이기셨나요? 아니면 사울 왕처럼 세상의 힘 앞에서 여전히 아무 것도 못하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두려워 떨고 있다가 주일이면 그럴듯한 복장을 하고 성경책을 들고, 와서 찬양을 드리고 감사기도를 드리고 계신다면, 물론 사람들은 그 모습만을 보고 있기에 속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속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신데, 중심을 보신다는 하나님을 아는 그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아니 자기의 믿음보다 더 강할 수 없는 골리앗 앞에서 사울 왕처럼 덜덜 떨다가, 겨우 눈치만 보고 있다가 주일이면, 와서 감사 예배를 드리고 감사 찬송을 드린다면, 한번 조금만 생각해 보세요! 눈감고 야옹입니다.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리는 식입니다. Comedy도 이런 comedy가 없습니다. 아니 참담 그 자체입니다. 성도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다가, 주일 대표 기도를 주님! 그동안에 보살펴 주셔서 그 은혜에 감사합니다, 주님의 그 큰 사랑을 찬송합니다!~ 라고 기도를 드린다고 생각해 보세요! 이보다 어처구니없는 기도와 찬송이 어디 있을까요? 

 

너무나 슬프고 안타깝고 죽을 맛이 아닐 수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도들이 악인들처럼 전혀 몰라요! 매번 그런 모습으로 나와서 찬송과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아니 한두 번도 아니고 평생 그러고 있는데 말이 될까요? 다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세상의 골리앗 앞에서 성도가 도망치다가, 주일예배에 와서 하나님께 어떻게 감히 감사 찬송과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요? 빛을 받은 성도라면, 최소한 하나님 아버지! 여전히 골리앗인 세상의 재물과 능력에 이겨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골리앗에게 당하지 않으렵니다. 어떤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싸우겠습니다. 라는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하는데, 마치 다 이긴 자처럼 찬송을 부르고 있으니, 말이 됩니까? ~ 다들 흉내만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날 주일 예배에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았다!로 끝냅니다. ~ 그러기를 평생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있을까요~ 얼마나 부끄럽고 창피하고 한심합니까? 그간의 그런 자신을 어떻게 늘 쉽게 넘어갈 수 있을까요!~

 

그건 아니잖아요! 이젠 안 됩니다. 주일예배 참여만으로 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다윗처럼 주신 믿음을 가지고 목숨을 걸고 싸워 이겨야지만 우린 감사예배, 감사 찬양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골리앗과 싸워야 하는데 언제 그 골리앗이 나타납니까? 다름이 아니라 그 골리앗은 자기 자신입니다. 한국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 아니 전 세계에서 최고의 기록을 가진 피겨 스케이팅 선수는 바로 우리 한국의 김 연하 선수입니다. 어떻게 하여 세계의 최고가 되었는가? 

 

피겨의 여왕, 역대의 최고의 점수를 받아낸 그래서 이 부분에서는 전무후한 인물이라고 평가를 받고 있는 김 연하의 가장 큰 적은, 일본의 아사다 선수가 아니라 물론 김 연하에게 아사다 선수가 부담을 주는 경쟁 선수이었지만, 김 연하의 최대의 적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은 김 연하의 최대의 적이 아사다라고 평가를 했었지만, 그러나 김 연하의 가장 큰 적은 자기 자신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기록을 가진 모든 선수들이 하는 고백도 동일합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가장 큰 골리앗입니다. 오늘의 말씀도 같은 이치입니다. 

 

이스라엘의 최대의 적은 블레셋의 골리앗이 아닙니다. 다윗의 최대의 적은 골리앗이 아닙니다. 바로 자기가 골리앗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이기지 못하면 이스라엘 사울이나 백성처럼 보이는 세상, 블레셋이 세운 거대한 장수 골리앗에게 40일간 내내 떨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성도가 옛 자신을 믿음으로 이기내지 못한 사람들은 구경꾼에 불과하게 됩니다. 구경군은 어떻습니까? 골리앗이 되고 싶은 그들은 늘 보이는 것으로만 결정합니다

 

자신의 유익보다는 일단은 재미가 있어야 하고, 마음에 들어야 하고, 힘들게 하면 분노하던지, 피해버리고 마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보다 크고 강해 보이면 꼼짝을 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면서 피하게 됩니다.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보면 영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세상 적으로 하고 있음을 삼상17:25에서 잘 보여줍니다. 삼상17:25의 말씀을 보세요!

 

25.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르되 너희가 이 올라 온 사람을 보았느냐 참으로 이스라엘을 모욕하러 왔도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의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버지의 집을 이스라엘 중에서 세금을 면제하게 하시리라

 

그러나 자신의 옛 자아를 믿음으로 제압한 다윗을 보세요! 삼상17:26입니다

 

26. 다윗이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 누구이기에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딱 보고 듣고 나서는 하는 한 마디가 이 정도입니다. 하나님이 첫날 창조하신 빛과 어두움이 바로 이런 사건에서도 확인이 됩니다. 이 빛은 지금의 태양과 같은 그런 종류의 빛은 아니지만, 분명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영광의 빛이었고 어둠을 밝히고 구별해 내는 광명한 빛입니다

 

아직 태양이 없었던 창세기의 셋째 날에 만들어진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과목을 자라게 하는 숨어 있는 빛, 보이지 않는 그 빛, 그러나 그 빛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능력이었습니다. 그리고 태양이 생기기 전에 하루를 밤과 낮으로 구분 짓는 그 빛 말입니다. 이 빛은 우주의 운행 원리이시며 이 땅의 모든 생명의 원인이심을 보여 주십니다. 이 빛에 대하여 요한은 무엇이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까? 요1:1-9입니다.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언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언하고 모든 사람이 자기로 말미암아 믿게 하려 함이라
8.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러 온 자라
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 빛의 정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성도를 상징하는 다윗의 승리도 보이지 않는 믿음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골리앗을 이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알지 못하기에 늘 보이는 것으로 판단하고 보이는 것이 삶의 기준이 될 뿐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의 세력들은 무엇으로 공격을 하게 됩니까? 무엇으로 시험을 받게 합니까? 보이는 세상의 재물과 권세와 명예로 미혹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구약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의 모든 사람들은 이스라엘처럼 선민이라는 거룩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을지라도 예수님이 오셔서 죽어 부활하시기까지는, 보이는 힘이 모든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없는 존재들은 다 사울 왕이요 골리앗이요 이스라엘입니다. 보이는 것이 모든 것이기에 그 빛인,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그들은 돈, 건강, 자랑, 즐거움, 정욕만을 따라갑니다. 때문에 성도일지라도 보이는 것으로 기쁨과 행복의 기준이 된다면, 위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삶은 골리앗처럼 아무리 강력한 힘과 능력 그리고 세상의 모든 재물을 가졌을 지라도 허수아비에 불과합니다. 

 

허수아비에 불과하기에 삼상17장에서 세상의 골리앗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니 보이는 것으로 자랑하는 세상의 것들에 대하여 결코 겁먹지 말! 아무리 강력해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49:20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20.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말씀을 모르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 됩니다. 말씀을 모르는 사람은 짐승일진데, 그 짐승에게 금목걸이, 짐승에게 파마, 고대, 짐승에게 피부미용, 성형수술, 훈장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데 짓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왜 성군입니까? 다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입니까? 다윗이 다윗된 것이 다윗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그 빛, 즉 말씀으로 자신의 골리앗을 먼저 제압했기 때문입니다. 요11:38-44입니다. 

 

38.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까지는 누구든지 나사로처럼 죽어 냄새가 나는 그런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요11장의 나사로 사건을 잘 보세요!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실체라는 것입니다.

 

참 빛이 없는 존재는 몸은 살아 있으나 영적으로는 죽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은 나사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2:17에서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 결국 먹었기에 죽었는데 그 죽음은 육체적인 죽임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은 진리의 말씀,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있는 자로써, 어떻게 설명을 하고 계시는가 하면, 죽은 나사로를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보세요! 나사로에게 일어나라 하실 때에 나사로가 살아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나사로가 살아났는데, 살아난 것은 나사로가 자체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아 난 것이 아니라 살려 주셨기에 나사로가 살아난 것이라는 그 점을 바로 언급하시고 계신 것이 나사로 사건의 중심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란 다 하나님께서 살려 주셔서 다시 살아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가르치시고 계신 것입니다. 나사로 스스로 살아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생입니다. 이것이 성도요 우리가 성도된 것이 우리의 실력과 능력이 아니라 100%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다시 재창조된 생명을 가진, 회복이 된 자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다윗도 같은 이치입니다. 다윗이 다윗된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을 놓치면 다윗처럼 되자! 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다윗의 힘은 믿음, 즉 말씀에서 옵니다. 그러나 힘의 뿌리인 그 말씀은 능력이지만,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실체인 골리앗이 너무나 막강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좋아하는 골리앗 자신을 먼저 제압해 내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어떤 과정이 있었나요? 어떤 훈련을 받게 하셨습니까

 

가족으로부터 막내로써 보호가 아닌 홀로 양 때를 밤낮으로 지키는 그 과정을 보면, 혹독한 훈련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그는 낭비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 열심히 하나님하고의 만남을 이루어갑니다. 양을 기르는 목동으로서의 그 환경이 열약하다가보니까, 종일 하나님하고의 관계를 유지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다윗 자신이 당당하게 왕 앞에서 삼상17:34-35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34.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결국 이 고된 훈련의 시간이 있었기에 삼상17:36-37의 고백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36.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 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37. 또 다윗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그리고 그 거대한 골리앗을 물맷돌로 끝장을 완벽하게 내지 않았습니까? 

 

삼상17:45-49입니다.

 

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46.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47.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48. 블레셋 사람이 일어나 다윗에게로 마주 가까이 올 때에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빨리 달리며
49. 손을 주머니에 넣어 돌을 가지고 물매로 던져 블레셋 사람의 이마를 치매 돌이 그의 이마에 박히니 땅에 엎드러지니라

 

다윗이 세상 전쟁터에 나가서 당당하게 세상의 힘 골리앗을 무너뜨렸지만, 그 결과는 다윗을 알게 모르게 훈련을 시키시면서 자기를 철저하게 부인하게 하시므로, 신의 옛 세력인 골리앗 자신을 제압하므로 이런 하나님의 작품을 생산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다윗의 힘과 실력으로 골리앗을 죽인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죽어 있는 세상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와! 승리하여 영광을 누리고 있는 다윗을 보라! 인간 다윗만을 봅니다

 

인간 다윗에게만 영광을 돌립니다.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그 승리를 존귀하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드려야 그것이 이치요 신앙이며, 진정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사울 왕을 보세요! 사울 왕이 하나님에게 영광이 아니라 다윗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삼상17:55-58입니다.

 

55. 사울은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향하여 나아감을 보고 군사령관 아브넬에게 묻되 아브넬아 이 소년이 누구의 아들이냐 아브넬이 이르되 왕이여 왕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하매
56. 왕이 이르되 너는 이 청년이 누구의 아들인가 물어보라 하였더니
57. 다윗이 그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그 블레셋 사람의 머리가 그의 손에 있는 채 아브넬이 그를 사울 앞으로 인도하니
58. 사울이 그에게 묻되 소년이여 누구의 아들이냐 하니 다윗이 대답하되 나는 주의 종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이니이다 하니라

 

하나님이 아니라 다윗에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혹할 뿐입니다. 하나님에게 감사와 찬송을 드리지 못한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쥐 잡듯이 다윗을 잡으려고 하다가 결국 비참한 죽음으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행12:21-23의 말씀도 보세요!

 

21.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단상에 앉아 백성에게 연설하니
22.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거늘
23.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는 성도의 삶은 모든 자랑과 영광과 감사를 하나님에게 다 전부 돌려드리면서 얼마나 기뻐하고 감사하고 자유를 맛보는지 모릅니다. 계4:8-11입니다. 

 

8.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졌고 그 안과 주위에는 눈들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시라 하고
9. 그 생물들이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돌릴 때에
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물론 계시록이 앞으로 일어날 묵시의 말씀이지만, 아닙니다. 지금 성도들에게 향한 현실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도 보면, 그의 서신 곳곳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롬9:5, 16:26-27, 고전1:29-31, 갈1:23-24, 엡1:6, 14, 3:20-21입니다. 

 

로마서 9:5

 

5.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로마서 16: 26-27

 

26.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따라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이 믿어 순종하게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신비의 계시를 따라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27.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고린도전서 1:29-31

 

29.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1:23-24

 

23.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에베소서 1:6, 14

 

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4.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3:20-21

 

20.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21.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 승리의 삶을 살게 된 우리들은 호흡하고 있는 내내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지혜와 사랑이 넘치기에 그래서 져 주는 삶이 성도이어야 합니다. 당연한 양보가 되어야 합니다. 너희로 인한 고통과 가난과 질병이 너의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평할 수 없어야 합니다. 미워할 줄 모르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을 알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김병년 목사에게 하셨는지 그의 고백을 들어보셨지요? 

 

때문에 성도가 보이는 세상의 것들로 좌지우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 빛이 임했습니다. 빛의 능력 때문에 자기 속에 깊이 박힌 골리앗 자신을 제압할 수 있게 되었고 세상의 골리앗도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골리앗이 갈 수 없는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선택할 수 있는 엄청난 복을 받은 존귀한 존재가 우리입니다. 성도라면 더 이상 보암직하고 먹금직하고 탐스러운 이 세상에 속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을 따라가시는 자랑스런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시37:4-6의 말씀으로 말씀을 마감합니다.

 

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6. 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생명을 거저 받은 다윗, 그 한 인물 때문에 이스라엘은 대승을 합니다. 영웅을 그리고 있지 않습니다. 생명을 받아서 빛을 발하고 있는 다윗을 그리고 있습니다. 바로 그 생명을 받은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를 위한 나입니까? 아니면 이웃을 위한 나입니까? 누구를 위한 삶입니까? 여호와 하나님만을 다윗처럼 의지하고 있기에 그래서 나의 의가 빛같이, 공의가 정오의 빛같이 빛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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