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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8/2020 - 사무엘상 15:1-35 본문
말씀: 삼상15:1-35
제목: 무가치한 승리와 능력의 사울 왕
삼상15장의 말씀은 목사님들의 설교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단골 메뉴 중의 한 사건입니다. 그렇게 유명한 이유는 그 내용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그 뜻은 성도들의 신앙의 장점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그 반대로 고질적인 약점이기에 그래서 중요합니다. 얼마나 고질적인 약점인가 하면, “아멜렉 족속을 완전 진멸하라”고 수천 년간을 걸쳐서 집중적으로 강조하고 계시지만 여전히 아멜렉 족속을 진멸하지 못하고 사울 왕처럼 다들 동일하게 변명만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벗어나야 하기에, 더 이상 변명하면 안 되기에, 다 알고 있다는 이 중요한 말씀을 다시 준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말씀을 드렸듯이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그 유명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왜 또, 전하고 듣고 배워야 하는가? 우리의 신앙의 약점 때문입니다. 그 약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평생을 전해야 하고 듣고 묵상하면서 풀어가야 지만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사울의 그 변명을 우리가 더 이상 하지 않고, 순종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여전합니다. 순종하기가 너무나 어렵기에 그래서 포기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이 설교를 통하여 이젠 더 이상 변명하지 않게 되시기를 소망하면서 선포하려고 합니다. 다들 긴장하시고 경청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끊임없이 사울 왕의 문제점을 오늘도 또 드러내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의도는, 사울 왕이 미워서 그래서 쓰러뜨리려고 작정하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놓치시면 안 됩니다. 엡5:12-14입니다.
12. | 그들이 은밀히 행하는 것들은 말하기도 부끄러운 것들이라 |
13. | 그러나 책망을 받는 모든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 드러나나니 드러나는 것마다 빛이니라 |
14. |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하셨느니라 |
자기의 허물과 약점을 믿음으로 풀고 해결해야 빛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만약에 덮어버리면 그건 저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어떤 실수를 하던가요? 알아서 할 수 있는 냥, 당장 괜찮아 보이니까, 다들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늘 태연합니다. 사울 왕처럼, 그때, 그때 변명하기에 급급합니다. 그렇지 않던가요? 그러나 이 온 역사를 통하여 그 누구도 자신의 허점과 허물을 구차한 변명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단 한사람도 없기에 이렇게 또 약점을 드러내 주십니다.
성경은 그래서 다 죄인인 것을 늘 밝히고 있습니다. 죄인이기에 누구든지 다 죽어야 했고, 죄인이기에 진리를 찾아 따라가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남극, 북극의 얼음 덩어리보다 더 큰 죄 덩어리, 요세미티의 그 바위산보다 더 큰 죄의 세력을 덮어주는 것은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진멸되어야 되는 그 흉악한 실체를 보여주시면서 돌이키게 하십니다. 돌이켜서 주님만 바라보게 하고 오직 순종하게 하시려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남극, 북극 보다 더 큰 죄 덩어리, 히말라야 산보다 더 큰 죄의 세력을 지닌 우리들에게 원하시고 원하시는 것이 바로, “순종하라!” 입니다. 그런데 “순종하라!”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대하여 얼마나 쉽게 가볍게 여기고 있습니까?~ 자기의 죄 한 뿌리도 제거하기도 거의 불가능한데, “순종하라!”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 요구는, 무슨 뜻인지 아세요? 완전 다 내려놓으라는 뜻입니다. 다 맡겨버리라는 뜻입니다. 너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헛된 세상의 뜻에서 즐거워하지 말라! 너를 죽이는 세상의 것에서 벗어나라! 라는 거룩한 조건입니다. 하나님하고 동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바로 “순종하라”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믿고 있고, 그동안 나름대로 열심히 종교 활동을 했으니까, 분명히 나의 현실적인 필요를 확실하게 채워주실 것이라는 그런 판단하고는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순종하라”는 그 뜻은 마5:48하고 상통합니다.
48.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
온전해야 됩니다. 신앙생활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하지 않으면 즉 하나님하고의 뜻이 같지 않으면 원하는 자족함과 만족감은 전혀 느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하고만 관련된 차원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은 세상 기준하고는 전혀 다른 차원이기에, 웃기 전에 울어야 합니다.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고 악은 모양이라고 취하지 않는 삶이어야 하고,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되는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어떤가요? 우리 생각, 뜻, 감정, 행동, 목표 자체가 다 버려야 되는 짐입니다. 그 자체가 생각만 해도 스트레스입니다.
완전 다른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순종의 길이 기쁨과 영광으로 여겨야 당연한데, 당연이 아니라, 말도 안 돼! 로 반응합니다. 자랑이 되어야 하고 기쁨이 되어야 하는데, 전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린 고민에 빠져야 합니다. 아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역할이 너무나 부족하다가보니까, 얼마나 아파해야 되는가 하면, 아무 것도 못할 정도로, 마치 학기말 시험지를 받고 보니까, 전혀 풀 수 없는 문제, 완전 모르는 그런 문제가 나와서, 그냥 까맣게 되는, 이젠 졸업도 못하게 되는구나~그 정도로서의 아찔한 좌절 말입니다.
순종해야 되는 성도는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우린 오늘 또 책망을 받고 있는 사울 왕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린 그동안에 얼마나 쉬운 신앙으로 여기고 있었나요? 속이고 속은 것입니다. 믿음을 갖고 순종하는 길이 쉽지 않기에 사울 왕이 하는 변명을 가만히 보세요! 삼상15:3-9, 15입니다.
3. |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
4. | 사울이 백성을 소집하고 그들을 들라임에서 세어 보니 보병이 이십만 명이요 유다 사람이 만 명이라 |
5. | 사울이 아말렉 성에 이르러 골짜기에 복병시키니라 |
6. | 사울이 겐 사람에게 이르되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 가라 그들과 함께 너희를 멸하게 될까 하노라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그들을 선대하였느니라 이에 겐 사람이 아말렉 사람 중에서 떠나니라 |
7. | 사울이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사람을 치고 |
8. |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
9. |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
15. | 사울이 이르되 그것은 무리가 아말렉 사람에게서 끌어 온 것인데 백성이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들과 소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남김이요 그 외의 것은 우리가 진멸하였나이다 하는지라 |
인간적으로 볼 때, 얼마나 합당하고 이치적이고 말이 되는 해석입니까? 그러나 그 결과는 삼상15:11, 17-23, 26, 35입니다.
11. |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따르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
17. |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을 삼으시고 |
18. | 또 여호와께서 왕을 길로 보내시며 이르시기를 가서 죄인 아말렉 사람을 진멸하되 다 없어지기까지 치라 하셨거늘 |
19. | 어찌하여 왕이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일을 행하였나이까 |
20. |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나는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여호와께서 보내신 길로 가서 아말렉 왕 아각을 끌어 왔고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였으나 |
21. | 다만 백성이 그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길갈에서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양과 소를 끌어 왔나이다 하는지라 |
22. |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
23. |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
26. |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
35. |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
우린 이런 사울 왕을 보면서, ‘아니! 왜 또, 너는 멋대로 하니~’ 라고 쉽게 책망하고, 쉽게 여길 것이 아닙니다. 왜요? 인간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여기는 자기의 뜻을 죽여야 되기 때문입니다. 준수했던 스펙이 준비되었던 사울 왕이 이 정도라면 우린 어떨까요? 우리들도 사울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너무나 똑같습니다. 우리도 사울 왕처럼 그 수준을 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늘 거기서 맴돌고 있습니다. 자기의 판단과 기준이 합당하며, 그럴 수 있고 이치적이고 인간적인 수준이라고 하면서 거기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보니까, 역시나 사울 왕이 받은 그 심한 책망에서 우리들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온갖 조소와 조롱을 받고 있는데 복음 때문이 아니라 욕심과 거짓과 이기심과 죄를 저지르면서도 뻔뻔하기에 욕을 먹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들 회개는커녕, 무감각합니다. 지금은 교인들의 믿음의 상태가 사울보다 더 뻔뻔해요! 왜 그럴까요? 돈 때문입니다. 죽어야 이루어지는 그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나를 즐겁게 해 주는 재물이 늘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당장 즐겁게 해 주는 그 세상의 재물이 거룩한 성도로써의 주신 약속을 지켜 영원한 자랑이 되기보다는, 야곱의 형, 에서처럼 거룩한 하나님의 약속을 깨뜨릴망정, 배고픔만을 면하고, 보자, 당장 즐거움으로 갑니다. 아니라고요?~세상과 싸워서 이기게 하시려고 기도하라고 하시는데, 그래서 먼저 기도하려고 합니까? 아니면, 바쁜 자기의 일을 먼저 하려고 합니까? 말씀을 보라고 하시는데, 무엇을 먼저 보게 됩니까? 성경보다는 아이 폰이 먼저 잡힐 것입니다. 전형적인 사울이지요! 야곱의 형, 에서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싸움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만족과 필요가 보이는 이 세상에만 있습니다. 싸우더라도 온전함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세상의 것을 얻으려고 죽어라!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다가보니까, 이웃을 만나면, 따뜻함도 없고, 진실 되지도 못하고, 자기 필요만을 채우려고 하니, 이 인간하고는 사업이외에는 다시는 만나지 말자~ 라는 생각을 들게 합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그 수준에서 머물고 있을 작정입니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야 되는데, 언제 그 수준까지 이루려고 합니까? 죽어서? ~ 정말, 큰일입니다.
진멸을 당하는데 큰일이 아닙니까?~혹시, 사울 왕처럼 변명만 하려고 하면, 어떻게 되는지 아세요? 목숨을 빼앗는 정도가 아니라 평생을 멋대로 하게 내 버려둔다는 점입니다. 그런 무서운 버림이 있을까요? 가장 무서운 심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서는 안 되는 그 길을 성도라는 자들이 가지 못해 안달합니까? 지금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다들,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계3:1-3입니다.
1. |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
2. | 너는 일깨어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하라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
3. |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 |
다들 사데 교회처럼 죽어 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무섭지 않으세요? 만약에, 계3:1-3의 이 말씀이 무섭지 않으면 그 사람도 죽어 있는 것입니다. 성도로써,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일에 대한 특권과 영광을 느끼지 못하면, 순종은 그림의 떡이요 남의 집 이야기가 될 뿐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기독교 신앙은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하고의 만남이어야 합니다. 그 만남과 관계 때문에 자기 목숨도 아끼지 않는, 다 잃어도 전혀 억울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설명과 이해보다는 믿음이 우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가요? 믿음이 능력이기에 그래서 순종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쉽지 않기에, 우린 기도를 쉴 수 없습니다. 아무리 곤욕스러워도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게 해 달라는 기도를 쉬지 말고 드려야 합니다. 이 기도의 간구가 조금씩 응답이 될 때, 비로써, 순종도 가능하게 됩니다. 롬5:1-2입니다.
1. |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
2. |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
성도는 구원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하고 화평을 누려야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지 않으면, 순종은 당연히 불가능합니다. 세상의 필요 정도를 가지고 응답 받았다고 하여 그것이 순종의 보상이라는 하면, 그것은 구원을 싸구려로 만들 뿐입니다.
구원이 개나 고양이나 돼지에게도 막 허락된 싸구려가 결코 아닙니다. 구원의 가치는 무한대(infinite)이기에, 무한대의 가치인 구원에 대한 주의 율례의 도를 내게 가르쳐달라고 얼마나 부르짖어야 할까요? 끝없이 영원히 부르짖어도 모자랍니다. 그래서 사울왕도 포기하니, 당연히 다수도 포기하고 있지만, 그 포기로 상상을 초월하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 포기하게 되면, 따라가느라고 쩔쩔매지 아니하면, 우리 교회에 누구처럼, 학교 공부로, 또는 세상의 일과 즐거움으로 자기를 살리는 목숨을 걸고 참여해도 모자라는 그 중요한 주일예배와 성경공부까지도 불참하게 됩니다.
세상의 세력에 지고 맙니다. 너무나 자신의 믿음이 부족하다고 하여 포기할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부족할지라도 그래서 답답하고 처절하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전혀 먼지만한 빛도 보이지 않는 그런 절망의 느낌을 느끼게 될지라도, 주신 그 큰 믿음을 믿고 끝까지 부르짖어야 합니다. 나의 믿음 적고 없어서가 아니라 나에게 주신 그 믿음 때문에 기도가 언제나 가능하고 세상과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영적인 전쟁을 아무리 힘들어도 유지하면 결국 주의 음성을 듣게 되고 주의 일하심을 보게 되면서 지혜가 생기고 인내가 만들어지고 절제와 균형을 점차적으로 확보하게 됩니다. 사울의 실패를 극복하고 후회 없는 내일이 되는 길은 믿음으로 끝까지 부르짖는 길 외에는 없습니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되는 꼭 명심하고 명심해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현실의 만족을 위한 자신이 아니라 오실 주님을 위한 준비가 오늘 하루의 가장 큰 비중이 되어, 그 소원을 가지고 끝까지 부르짖어야지만 믿음의 뿌리를 내릴 수 있지, 현실의 만족과 고난만을 해결하려는 그 소원에서는 믿음의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하나님하고 상반되는 세상의 성공을 위하여 밤낮으로 금식을 하면서 기도를 드려봐야, 그 사람은 제 2의 사울 왕이 될 뿐입니다. 왜 제 2의 사울 왕이 될 뿐일까요?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린 무엇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까? 무엇을 위한 기도요 무엇을 위한 봉사이던가요? 정말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오직 예수만이 여러분들의 힘이요 능력입니까?~ 그렇다고 누가 자신의 그 믿음을 증명할 수 있어요? ~
안타깝게도 그 귀한 믿음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울 왕과의 합동(닮은 꼴)임을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다수가 아직도 사울의 변명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증명이 저절로 됩니다. 사울과 합동이기에 벗어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데, 인정하세요? ~ 벗어날 생각도 없이 단지 늪에서 허덕이고 있듯이 그냥 허덕이고 있습니다. 경건의 모양만을 갖고 허덕이다가보니까, 겉으로는 멀쩡하기에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의 늪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몸부림을 죽도록 쳐야, 도움을 받아도 받게 되는데 자존심 때문에 못합니다. 그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보라고 하시면, 무엇과 같을까요? 그 뜨거운 사하라 사막 한 가운데서 물이 없어서 아닌 곁에 둔 물도 보지 못하여, 목말라서 서서히 죽어가는 그 광경과 무엇이 다를까요? 지금 그 상황에서 참담하게 죽어가는 자녀들을 향하여 우리 주님께서는 끝까지 그 큰 팔을 벌리고 당장 오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우린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위대하신 부르심과 주권에 항복해야 삽니다. 항복해서 그간의 갖고 쥐고 있던, 없으면 안 된다고 난리를 치던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어색해져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입맛대로 살아가는 것은 사울과 합동(닮은 꼴)입니다. 신앙이란 세상의 달콤한 공격, 보암직스러운 공격, 먹금직스러운 공격을 심하게 받는 가운데서도 오직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마4:1-7입니다.
1. |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
2. |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
3. |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
4.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
5. |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
6. |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
7. |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
주님을 시험하고 있는 이 말씀에서 중요한 사단의 공격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즉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그 권세와 정체성과 권리를 가지고 사단인 나에게 그 힘과 실력을 보여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단의 시험을 물리칩니다. “사람은 떡으로만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시면서 해결하십니다. 그 뜻은 주님의 복된 것과 구별된 것과 자신의 신앙고백과 자신의 정체성은 다 하나님하고의 관계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없는 아들이 없고, 아버지를 빼고 아들 자신만으로 독립시켜서 자기의 존재, 자신의 행동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같은 뜻으로 마4:8-9도 보세요!
8. |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
9. |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
관계를 깨뜨리려고 사단인 자신에게 경배하는 것이 아닙니까? 성도된 우린 하나님하고 인격관계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나님하고의 관계를 깨뜨리면, 즉 순종하지 않으면 결국 사단에게 경배하는 죄인이 됩니다. 사단의 종이 됩니다. 사울 왕의 실수가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성도의 불순종은 무당처럼, 점을 치는 것과 같고 완고한 것은 즉 교만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이 말씀은 쉬운 것 같지만, 우상숭배하지 말고 교만하지 말아야 되는 성도의 현실은 어떨까요? 고후11:24-27입니다.
24. |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
25. |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
26. |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
27. |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
그런데 이 길이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왕도 변명을 합니다. 이빨이 다 썩어 문드러질망정, 잇몸만 남아 틀리를 낄망정, 달콤한 candy, ice-cream은 먹고 말겠다는 것입니다.
당장의 세상 즐거움은 목숨을 걸고 즐겨야 되겠다는 미련하고 악한 심보입니다. 내일과 자손을 위한 당장의 손해와 아픔은 자신에게 요구하지 말라는 것이 바로 사울 왕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이런 말씀을 듣고 보면서도, ‘아~ 그렇구나’ 하고 순종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강렬하게 이 세상의 즐거움을 즐기기 위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따라가더라는 것입니다.
정말 불필요한 기적과 필요 없는 능력만을 드러냅니다. 우리의 신앙의 확증은 좋고 편할 때에도 자신의 믿음을 가지고 세상의 힘과 자신의 옛 사람과 얼마나 힘겹게 싸우고 있는 지로 파악할 수 있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최악의 지경에서도 더욱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준비가 되었는지 곧 바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결론입니다. 성도의 삶은 다른데 그 다름이 도덕과 윤리적인 차원이 아닙니다. 근본적인 자기의 존재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 이해는 하나님과의 관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신이어야 합니다. 그 이해는 찬물과 뜨거운 불이 부딪치면 터지듯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가 됩니다.
그 이해가 없이는 그 과정이 없이는 그 누구도 사울의 손해와 실패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신앙의 뿌리는 바위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그 죄의 바위를 뚫는 힘은 오직 순종입니다. 모양과 흉내로 그 죄 덩어리 바위는 뚫리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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