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교회

06/21/2020 - 사무엘상 14:1-52 본문

주일 설교 말씀

06/21/2020 - 사무엘상 14:1-52

PastorYK 2020. 6. 24. 15:48

말씀: 삼상14:1-52

제목: 요나단과 사울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일까요? 왜 요나단이 느닷없이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요나단의 몫은 무엇일까요? 무엇보다도 예측하건데, 아버지 사울이 3 아들들 중에서 요나단을 특별하게 여겼던 것 같습니다. 다른 두 아들은 족보와 마지막 전쟁에서만 이름이 나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 왕과 끝까지 같이합니다. 아버지 사울 왕과 마지막 전쟁을 하면서 같이 죽게 됩니다. 죽는 그 날까지 요나단은 언제나 아버지와 같이 있었습니다. 물론 죽는 날까지 함께 했던 요나단은 사울 왕에게 어떤 존재였던가요

 

없어서는 안 되는 신하로 그 역할을 다 했었던 것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요나단은 이스라엘의 충신이었습니다. 없어서는 안 되는 아들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우린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있는 자기중심적인 사울 왕에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하나님만을 경외하던 자기 아들 요나단을 통하여 올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보여주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경외케 하시려고 늘 사울과 요나단이 늘 같이 있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최고의 사사인 사무엘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는 망나니로 아버지 속을 썩이는 인물로 등장하고 있었지만 미련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있는 사울 왕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최고의 아들 요나단을 아버지 곁에 늘 두게 하신 것입니다. 제가 지금 무슨 말씀을 드리려는 아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부자 관계를 통해서라도 서로에게 유익이 되게 하시려는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교육을 시켜 복을 받게 하시려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사무엘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는 아버지로부터 신앙 교육을 잘 받아서 믿음의 사사로 쓰임을 받아야 되었는데, 그렇지 못하고 결국 왕이신 하나님을 포기하고 사울 왕을 세우게 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큰 죄를 짓고 맙니다. 하지만, 사무엘 집안하고는 반대로 사울이 아버지이지만, 아들 요나단을 통하여 도움이 되게 하십니다. 끝까지 그 크신 팔을 벌리고 계시면서 평생을 기다리셨지만, 결국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3아들과 온 이스라엘 모든 군사들과 죽게 됩니다. 삼상31:1-6입니다.

 

1.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2.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의 아들들을 추격하여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3. 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잡으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에게 중상을 입은지라
4. 그가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그것으로 나를 찌르라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무기를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감히 행하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의 칼을 뽑아서 그 위에 엎드러지매
5. 무기를 든 자가 사울이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6.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를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이런 슬픈 역사를 남기게 됩니다. 40년 한평생 동안에 회개의 기회를 주셨지만, 끝까지 이렇게 끝났습니다. 죽어가면서도 전혀 회복된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참담한 종말입니다. 

 

그러니 사울이 죽으면서 불평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렇게 복된 길을 가게 하시려고 믿음의 아들까지 동원하여 끊임없는 교육과 훈계를 해 주셨지만 그는 죽으면서도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오직 삼상31:4입니다. “그가 병기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할례 없는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할례 없는 자들이 와서 나를 죽이지 못하도록, 나를 죽여 다오, 그러나 병기든 자가 두려워하자~ 스스로 자결합니다. 그리고 병기 들었던 그 병사도 같이 자결합니다. 

 

사울 왕처럼 그 기회 속에서도 이렇게 살다가 죽고 싶으세요? 사울처럼 죽어가면서도 곁에 있던 이웃에게 이런 두려움과 큰 아픔과 피해를 주면서 아니 단지 두려움과 아픔과 고통만을 준 것이 아니라 곁에 있던 병기든 자도 결국 같이 자결하게 됩니다. 왕이란 자가 병기든 자보다 못합니다. 왕이면 군사들을 살려야지 자결까지 하게 합니다. 이런 식으로 주변의 피해만을 주다가 참담한 인생으로 마감하고 싶으세요? ~ 여러 말씀들 중 한 곳만을 봅니다. 신13:1-18입니다.

 

1. 또 모세가 가서 온 이스라엘에게 이 말씀을 전하여
2. 그들에게 이르되 이제 내 나이 백이십 세라 내가 더 이상 출입하지 못하겠고 여호와께서도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이 요단을 건너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3. 여호와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과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보다 먼저 건너가사 이 민족들을 네 앞에서 멸하시고 네가 그 땅을 차지하게 할 것이며 여호수아는 네 앞에서 건너갈지라
4. 또한 여호와께서 이미 멸하신 아모리 왕 시혼과 옥과 및 그 땅에 행하신 것과 같이 그들에게도 행하실 것이라
5. 또한 여호와께서 그들을 너희 앞에 넘기시리니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명령대로 그들에게 행할 것이라
6.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하고
7. 모세가 여호수아를 불러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그에게 이르되 너는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이 백성을 거느리고 여호와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들어가서 그들에게 그 땅을 차지하게 하라
8. 그리하면 여호와 그가 네 앞에서 가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9. 또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에게 주고
10. 모세가 그들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매 칠 년 끝 해 곧 면제년의 초막절에
11.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가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에게 듣게 할지니
12. 곧 백성의 남녀와 어린이와 네 성읍 안에 거류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에게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13.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 거주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에게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
14.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죽을 기한이 가까웠으니 여호수아를 불러서 함께 회막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에게 명령을 내리리라 모세와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회막에 서니
15.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에서 장막에 나타나시고 구름 기둥은 장막 문 위에 머물러 있더라
16. 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조상과 함께 누우려니와 이 백성은 그 땅으로 들어가 음란히 그 땅의 이방 신들을 따르며 일어날 것이요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이라
17.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버리며 내 얼굴을 숨겨 그들에게 보이지 않게 할 것인즉 그들이 삼킴을 당하여 허다한 재앙과 환난이 그들에게 임할 그 때에 그들이 말하기를 이 재앙이 우리에게 내림은 우리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에 계시지 않은 까닭이 아니냐 할 것이라
18. 또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들을 따르는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

 

말씀이 무섭습니다. 신앙교육을 위하여 주시는 말씀인데, 무섭습니다. 

 

우상 숭배하게 하려는데, 간여된 자들은 가차 없이 제거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상대가 가족일지라도~ 물론 여기서 오해를 하면 안 됩니다. 사람을 죽이라고 하시는 그 말씀의 뜻은 우상의 죄는 근처에도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는 인정사정보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그런 자들하고는 상종도 하지 말라! 는 뜻이기도 합니다. 올해 우리 교회의 목표가 무엇입니까? “주의 진리 중에 행하자!”로 정하지 않았습니까? 그 의미는 “나를 통하여 이웃을 죽이는 자가 되지 말고 살리는 자가 되자”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상숭배를 하는 그들을 죽이라는 이 말씀을 보면서 혹시 농담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농담으로 여기고 있기에,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는 현실적인 사건들을 봅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 사고가 나는 그 이유들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욕심, 거짓, 농담, 장난, 사악함, 간교함, 우울증, 불안감, 시기 질투 등으로 주변에의 사고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그렇게 주의하라는 교육을 심하게 하고, 곳곳에 안전에 대한 경고판을 붙이고 있지만결국 왜 사고로 죽어가던가요? 방심입니다. 

 

방심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까? 그렇게 교육을 하고 경고를 하고 있지만 통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가 당장 괜찮다는 방심이 늘 대형사고로 이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방심이 부른 대형 사건들이 하다합니다

 

방심이 부른 사건: 1. 지금부터 10년도 더 된 비행기 추락 사건입니다. 그 당시 DC-10기에 승무원과 승객을 포함하여 거의 270여명이 죽습니다그 이유는 수리할 때에 경비절약과 쉽게 고치려는 부주의, 무엇보다도 괜찮다는 방심으로 결국 한 쪽 엔진이 땅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엔진만 떨어졌으면 사고는 사전에 막을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엔진이 떨어지면서 전기장치까지 깨지면서 전기가 작동 되지 않아서 수백 명을 다 그대로 죽게 했던 재앙이었던 것입니다. 

 

2. 또 다른 항공사건이 있습니다. J-123 보잉 747기입니다. 일본 추석인 ‘오봉’ 전날에 귀성객을 태우고 도쿄를 출발해서 오사카를 가는 비행기 이었습니다. 비행시간은 약 56분이었고 이제 도쿄 공항을 이륙한지 12분 만에 커다란 폭발과 같은 소리와 함께 결국 깊은 산속으로 추락하게 되었는데, JAL 123기 추락 사고는 세계 항공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악의 항공 사고입니다

 

비행기 전체 탑승자 524명 중 단 4명만이 생존하여 단일 항공 사고로는 최다 사망자를 기록한 참혹한 사고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고의 원인을 아십니까? 마찬가지로 수리 부주의에서 온, ‘그 정도면 괜찮겠지’ 하는 방심입니다. 비행기 꼬리 부분을 수리할 때에 두 줄의 RIVET으로 고정을 시켜야 하는데 한 줄로 고정을 시킨 것이 문제가 된 것입니다. 물론 당장은 괜찮았지만 몇 개월간을 비행을 하면서 결국 부족한 부분에서 문제가 터졌고 결국 한 줄로 박은 리벳이 힘에 견디지 못하여 비행기 뒷날개가 떨어져 나가면서 이런 무서운 참변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당장 괜찮으면 괜찮다는 그 판단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당장 괜찮으면 괜찮다는 그 판단은 결국 자기도 죽이고 가족과 이웃에게도 큰 고통을 주고 마는데, 놀랍게도 “곧 그 사고의 아픔을 곧 잊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자기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듯이’, 나만 괜찮으면 전혀 상관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관계를 무시하는 것이 얼마나 큰 손해인지 아세요? 

 

하버드 대학에서 연구한 논문이 있습니다. 750명이 조금 못되는 745명인가 그랬습니다. 그 사람들을 자그만치 75년간을 지속적으로 연구한 그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가? 에 대한 연구였다고 합니다. 그 연구에서 어떤 답이 나왔을까요? 다름이 아니라 인간 관계였다고 합니다. 인간관계로 자신의 인생의 행복이 결정되었다는 것입니다. 돈도 명예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인간관계가 좋으면 삶의 질이 나아졌다는 것입니다. 

 

즉 이웃을 소중하게 여기는 자들이 행복하더라는 것입니다. 같이 아파하고 같이 즐거워하는 그들이 서로 잘 지내면서 행복하게 살아가더라는 것입니다. 하버드에서 75년간을 연구한 결과가 결국 성경에서 3000년 전에 이미 발표하지 않았던가요? 서로 사랑하라! 가난한 이웃을 보살펴라! 관계를 중요시 하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요나단이 그런 인물입니다믿음의 요나단은 다윗 친구하고의 의와 성실로 그리고 목숨을 걸고 약속을 지키는 정직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 반대로 이웃을 힘으로 무너뜨리고 무시하고 심지어 제사장까지도 죽이는 만행을 자행합니다. 그래서 그가 행복했고 만족했던가요? ~ 늘 최고의 조건 속에서도 불안했고 최악이었습니다. 다 가졌지만 좀 더 때문에 관계를 무참하게 무너뜨리는 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최악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려고, 그렇게 주변을 잔인하게 무너뜨리는 만행을 막아 주시려고 믿음의 요나단까지도 곁으로 보내주셨지만, 끝까지 자기의 욕심과 미련함으로 이웃하고의 관계를 갖지 못하고 맙니다. 

 

이웃하고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면, 왕일지라도 재벌일지라도 행복할 수도 만족할 수도 없습니다. 특히 삼상14:28-35의 말씀을 보세요.

 

28. 그 때에 백성 중 한 사람이 말하여 이르되 당신의 부친이 백성에게 맹세하여 엄히 말씀하시기를 오늘 음식물을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하셨나이다 그러므로 백성이 피곤하였나이다 하니
29. 요나단이 이르되 내 아버지께서 이 땅을 곤란하게 하셨도다 보라 내가 이 꿀 조금을 맛보고도 내 눈이 이렇게 밝아졌거든
30. 하물며 백성이 오늘 그 대적에게서 탈취하여 얻은 것을 임의로 먹었더라면 블레셋 사람을 살륙함이 더욱 많지 아니하였겠느냐
31. 그 날에 백성이 믹마스에서부터 아얄론에 이르기까지 블레셋 사람들을 쳤으므로 그들이 심히 피곤한지라
32. 백성이 이에 탈취한 물건에 달려가서 양과 소와 송아지들을 끌어다가 그것을 땅에서 잡아 피째 먹었더니
33. 무리가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보소서 백성이 고기를 피째 먹어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사울이 이르되 너희가 믿음 없이 행하였도다 이제 큰 돌을 내게로 굴려 오라 하고
34. 또 사울이 이르되 너희는 백성 중에 흩어져 다니며 그들에게 이르기를 사람은 각기 소와 양을 이리로 끌어다가 여기서 잡아 먹되 피째로 먹어 여호와께 범죄하지 말라 하라 하매 그 밤에 모든 백성이 각각 자기의 소를 끌어다가 거기서 잡으니라
35. 사울이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위하여 처음 쌓은 제단이었더라

 

전쟁을 하는데 금식을 하라고 하면 됩니까? 이스라엘의 전쟁이 금식까지 하면서 적군을 싹! 제거하여 승리하는데 있던가요? 아니지 않습니까? 전쟁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전쟁은 자기의 죄 성만 제거하면 됩니다. 

 

그런데 그런 근본적인 하나님의 뜻은 전혀 모르고, 자기 죄가 아닌, 적군을 제거하려는 사울왕의 미련한 금식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까지도 배를 굶게 하여, 먹으면 죽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짐승의 피까지도 먹게 됩니다. 그러자, 사울이 하는 소리가 여호와에게 죄를 저지르지 말라고 하면서, 그 날 밤에 각각 자기의 소를 가지고 와서 잡아먹게 하고, 사울 왕은 처음으로 여호와를 위한 단을 세웠던 사울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그 다음에 어떤 명령을 내리던가요? 여호와를 위한 단을 세웠던 사울 왕이 이제 고기를 충분히 먹었으니, 동틀 때까지 블레셋에게로 가서 탈취하고 진멸하자고 합니다. 그러나 제사장의 요구로 하나님의 뜻을 찾아보고 결정하자에 사울도 동의하고 기도를 드리지만 아무 응답이 없게 되면서 다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됩니까? 죄를 지은 놈을 그 누구든지 다 죽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국 아들 요나단이 뽑힙니다. 우연입니까? 아닙니다. 그런데 충신이요 믿음의 그 아들 요나단도 죽이려고 합니다. 요나단이 우상 숭배자였나요? 죽이게~그날의 승리를 이끈 충신이 아니었나요? 그런데 자기 말을 듣지 않았다고 하여 요나단을 죽이려고 합니다. 말이 됩니까? 생각해 보세요! 정말 사울은 내로남불입니다. 

 

자기가 그간 저지른 불순종의 죄, 즉 기다리지 아니하고 번제를 드린 그 죄와 언약궤를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멋대로 사용한 자기 죄, 게다가 말도 안 되는 사울의 금식 명령으로 배가 고파서 군인들이 짐승의 피까지 먹게 한 죄에 대하여서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울의 그 말도 안 되는 명령을 적군과 싸우고 있었던 요나단은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몰랐던 요나단을 죽이려고 합니다. 

 

사고를 친 아들이 아니라, 그날 전쟁을 승리로 이끈, 믿음의 아들 요나단을 죽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자가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단을 세웠다는 것이 오히려 부끄럽게 합니다. 자기가 저지른 죄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믿음의 아들 요나단만이 아니라 충신, 다윗까지도 끝까지 죽이려고 몸부림을 치지 않았습니까?~ 우린 어떤가요? 우리는 자기는 잘못하지 않아서 남의 잘못을 가지고 왈가불가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늘 말씀을 드리지 않던가요? ‘자기만 잘하라’고 말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사울을 위하여 요나단까지 세워 주셔서 사울 왕을 돕게 하시고 계십니다. 그 도움의 손길이 사울에게만 허락되었던가요? 우리들에게는 어떤 도움의 손길을 주시던가요? 하나님께서 사울 왕과 전혀 다르지 않은 우리를 위하여 누구를 여러분 주변에 세워주셨는지 알기는 아십니까? 우리의 승리와 행복을 위하여 누구를 만나게 하시고 가족 되게 하시고 어떤 교회로 보내주시던가요? ~그런데 이렇게 우리를 위하여 보내주시고 세워주시지만 우리는 무엇을 위한 만남입니까? 

 

다윗과 요나단과 같은 인물들을 만나고 있나요? 아니면 나를 죽이는, 만나서는 안 되는 사울 왕을 만나고 있나요?~ 우린 요나단과 같은 사명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울 왕이었던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요나단의 역할을 받은 거룩한 자가 바로 우리가 아닙니까? 특히 하나님 아버지의 도움의 손길은 모두에게 인색하신 분이 아닙니다. 사울 왕도 보세요! 못난 왕, 악한 왕, 부끄러운 아버지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그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도와 주셨습니다. 

 

어떻게 알아요? 삼상14:47-48을 봅니다.

 

47. 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른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들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겼고
48. 용감하게 아말렉 사람들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졌더라

 

승리를 주셔서 최고의 왕이 되게 하십니다. 천하를 다스리게 하십니다. 그런데 사울왕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지속적으로 불순종하더라는 것입니다. 지난 설교 중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들이 사울 왕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고 그렇게 부르짖었는데, 아직도 하던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오늘도 참석하신 이 자리인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하고 관계를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하고 화평을 이루어야지만 됩니다. 그러시려면 자기가 못한다고 하여, 못하겠다고 하면, 안 됩니다. 피 흘리는 싸움 없이는 안 됩니다. 

 

우리들이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아세요? 남이 아니라 다 자기의 죄 때문입니다. 딤후3:1-5입니다.

 

1.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누구 때문에 고통이 아닙니다. 자기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후회를 하지 않으려면, 억울하지 않으려면,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안 됩니다. 오직 순종해야 합니다. 기억하세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다고 하여 행복한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의 삶은 사울 왕처럼 자기 아들 3명까지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까지 다 죽일 뿐입니다.    

 

2. 삼상14장에 등장하는 요나단을 좀 더 살펴봅니다. 그는 보이는 적, 우상 숭배하는 블레셋을 보고는 자기 부관을 데리고 적지로 들어갑니다. 걸어서 쳐 들어가는 적지가 아니라 이편저편 두 곳에 험한 큰 바위절벽이 가로 막고 있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가도 된다는 응답을 받고 나서 올라갑니다. 그리고 적군 20인 가량을 도륙을 냅니다. 적군 쪽, 주변이 요나단과 그의 부관 때문에 크게 떨었고 땅도 진동했었다고 합니다. 요나단은 적군인 하나님을 모르는 우상만을 따르는 악한 세력들을 제거하려고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지만, 사울 왕은 누구를 위한 전쟁을 하던가요? 아니 그날 전투에서도 어떤 조치를 내리므로 누구를 죽일 뻔 했던가요? 요나단을 처형하려고 했던 아버지 사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사울 왕이 쳐 들어온 암몬 족속을 진압하였고 그리고 사울 왕을 무시하던 자들에게 그렇게 관대했었던 사울 왕이 갈수록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점점 더 깊이 감추어 있었던 옛 세력과 무지하고 무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늘 보던 늘 찾던, 아니 구하던 현실의 실력, 나타나는 그 실력으로 그 사람을 평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을 보세요! 사람들을 죽이는 악한 세상 세력과 싸웁니다. 오직 믿음을 가지고 싸우고 있습니다. 삼상14:6입니다.

 

6.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요나단은 적군을 보고 놔두는 자가 아닙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자신의 죄가 드러나면 두고 보는 자가 아니라 가차 없이 제거하고 마는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을 보세요! 삼상14:16-19입니다.

 

16. 베냐민 기브아에 있는 사울의 파수꾼이 바라본즉 허다한 블레셋 사람들이 무너져 이리 저리 흩어지더라
17. 사울이 자기와 함께 한 백성에게 이르되 우리에게서 누가 나갔는지 점호하여 보라 하여 점호한즉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자가 없어졌더라
18. 사울이 아히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이리로 가져오라 하니 그 때에 하나님의 궤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있음이니라
19. 사울이 제사장에게 말할 때에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 소동이 점점 더한지라 사울이 제사장에게 이르되 네 손을 거두라 하고

 

그럴듯하게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상황이 급하게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뭐라고 합니까? 

 

삼상14:19입니다. “블레셋 사람의 전에 소동이 점점 더한지라 사울이 제사장에게 이르되 네 손을 거두라 하고” 참 못난 모습입니다. 자기 필요에 따라 언약궤가 쓰여 질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언약궤를 주신 이유가 무엇인지, 몰라도 전혀 모릅니다. 언약궤는 전쟁의 승리용품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사울은 승리를 위하여 언약궤를 쓰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여튼 군사를 데리고 적군으로 들어가 보니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던가요? 적군끼리 자중지란이 되고 만 것입니다

 

블레셋 군사들이 자기들끼리 싸우고 있었고 게다가 블레셋 사방에서 살던 히브리인들이 와서 요나단의 싸움을 목숨을 걸고 힘 것 돕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멋진 전쟁입니까? 누가 이렇게 역사하게 하신 것입니까? 당연히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게 믿음의 요나단과 그의 부관을 돕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와서 사울 왕이 보았다면 무슨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을까요? 당연히 아하! 나의 기준에서 벗어나야 되겠구나! 나의 판단은 위험할 뿐이구나! 하면서 하나님에게 나아가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큰 승리를 이룬 아들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신 것이 사울 왕이 먹지 말라는 꿀을 먹은 요나단 때문일까요? 먹지 말라는 꿀을 먹으므로 응답을 하지 아니하셨다면, 하나님께서 요나단을 도울 리가 있을까요? 결국 이스라엘 백성 때문에 요나단이 그날 목숨은 건지게 되었지만, 사울 왕은 요나단을 보면서, 왕일지라도 믿음으로 통치해야 되는구나! 오직 하나님을 경외해야겠다! 이렇게 되어야 하는데그것이 아니라 힘만을 키웁니다. 삼상14:52입니다.

 

52. 사울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그들을 불러모았더라

 

전승의 전승을 허락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뜻은 외면한 체, 힘 있는 용맹한 사람들을 불러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삼상14:6을 보세요! 무엇이라고 하던가요? “요나단이 자기 병기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없는 자들의 부대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이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아버지 사울하고는 정 반대입니다. 아버지 사울은 힘을 구하고 있고 아들은 오직 믿음이 힘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요나단은 영원히 빛을 발하고 있는 의인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불필요한 자가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남을 살리는 요나단의 믿음입니까? 아니면 남을 죽이는 사울의 힘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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