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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3/2024 이사야 4:1-6 본문

주일 설교 말씀

6/23/2024 이사야 4:1-6

PastorYK 2024. 6. 24. 13:20

말씀: 사4:1-6                                           

제목: 그렇기 때문에

 

    

 

구약의 말씀이지만, 이 구약의 말씀들이 다 종말로 향하고 있기에 그래서 오늘은 이 사4장의 말씀을 가지고 신약의 우리들에게로 연결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구약의 이스라엘이 타락하고 부패해도 상관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구약은 율법이 기준이었기에 이스라엘의 부패와 타락으로 심판을 당연히 받게 되면서, 그로인한 그 당시 이스라엘의 모든 상태는 회개가 될 수 없었기에 점점 더 최악으로 향하게 되면서 그들의 내일은 갈수록 소망이 없었던 것입니다. 결국은 다 무너지고 맙니다. 사3장에서 남 유다만 보더라도 나라를 다스릴 지도자들도 없고 사4:1에서는 남자도 부족하여 남자 1에 여자는 7의 비율이었던 것입니다. 부패와 타락으로 인하여 정상적인 혼인까지도 불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특히 힘없는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그 당시 현실이 지옥을 방불한 처지였지만, 그중에 시온의 남은 자들은 즉 야곱의 자손들은 조금도 요동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사4장에서의 말씀입니다. 왜요? 사4:2-6의 약속의 말씀 때문입니다. 말씀을 다시 봅니다, “그 날에 여호와의 싹이 아름답고 영화로울 것이요 그 땅의 소산은 이스라엘의 피난한 자를 위하여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며, 시온에 남아 있는 자,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 곧 예루살렘 안에 생존한 자 중 기록된 모든 사람은 거룩하다 칭함을 얻으리니, 이는 주께서 그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을 씻기시며 예루살렘의 피를 그 중에서 청결하게 하실 때가 됨이라, 여호와께서 거하시는 온 시온 산과 모든 집회 위에 낮이면 구름과 연기, 밤이면 화염의 빛을 만드시고 그 모든 영광 위에 덮개를 두시며, 또 초막이 있어서 낮에는 더위를 피하는 그늘을 지으며 또 풍우를 피하여 숨는 곳이 되리라 

 

무슨 뜻입니까? 그 당시 상황은 남 유다의 신앙의 부패로 삶을 어렵게 하고 우상숭배로 주변 국가로부터 심한 공격을 늘 받아야 했는데, 그때마다 당연히 지옥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온에 남은 자들은 하나님의 품 안에 거하게 되므로 영원한 보호를 받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 약속의 말씀의 시작은 아담부터였습니다. 아담을 시작으로 약속된 믿음의 자손들의 두 번째가 아담의 둘째인 아벨이었고, 그리고 그 다음은 아담의 아들 셋, 그리고 에노스로 이어지면서 노아까지 믿음의 족보가 창5장에 있습니다. 믿음의 자녀들, 약속된 자들이었지만 그러나 그 현실은 다 동일하게 지옥을 방불했었음을 아담의 첫 아들, 가인과 창4:24에 나오는 라멕만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약속된 믿음의 자손들이 세상에서 힘의 사람들과 같이 힘들게 살아야 했지만, 그러나 믿음의 자손, 시온의 자손인 그들은, 만세 전에 이미 약속을 받았기에, 지옥과 같았던 현실 속에서도 망하지 않았음을 믿음의 족보인 창5장에서 알 수 있게 합니다. 그러나 택함을 받지 못했던 힘의 인류는 늘 타락하여 물 심판인 홍수로 다 죽었고, 그 속에서도 약속대로 남게 된, 믿음의 노아의 가족은 보호와 구원을 받아서 다시 인류의 역사를 잇는 가교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 사실을 창10장의 족보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의 타락으로 모든 인류가 지옥과 같은 현실 속에서 살아가게 되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으로 늘 보호를 받고 구원이 된 자손들은, 망하지 않았고 유유하게 믿음의 족보를 이어가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그 역사 속에 등장하는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을 보세요! 모세, 아론을 비롯하여 갈렙과 여호수아를 보세요! 그리고 다윗 왕을 포함하여 예수님께서 오실 때까지 믿음의 자손들이 이어지는 것을 마1장의 족속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어오지만, 그러나 그들의 현실은 어떤 현실이었을까요? 

 

역시나 그들의 현실도 세상의 힘의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동일한 최악의 조건 속에서 힘의 사람들과 같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지나고 보면, 구약에서도 그리고 신약에서도 그리고 예수님께서 오셨어도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늘 두 쪽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힘의 사람들과 은혜, 영원 전에 약속된 시온의 남은 자들로 나뉩니다. 인류의 모든 현실은 모두 다 늘 지옥 같은 삶이었지만, 그러나 지옥과 같은 그 현실 속에서도, 나뉜 힘의 사람들은 보장 없는 지옥에서의 약육강식으로 나 살겠다고 상대방을 죽이면서 또는 잔인하게 제압하면서 인정사정없이 치열한 삶을 살았지만, 이미 안전과 승리를 영원 전부터 약속받은 시온의 자손들, 남은 자들은 그 지옥과 같은 현실 속에서도 영원한 승리자로 늘 보호를 받는 특권을 누렸던 것입니다.

 

여기까지 지금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하시는지 아시겠습니까? 만세 전에 약속을 받았던 남은 자들이 누구, 누구인지를 구약의 족보를 통하여 자세히 알 수 있게 하시는데, 구약에서의 남은 자들이 지옥을 방불하는 현실 속에서도 망하지 않았고 계속해서 유지 되어 족보를 형성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약 역사 안에는 누가 들어가 계시던가요? 예수님께서 들어와 계신 것을 창3:15, 12:3, 49:10, 사7:14, 9:7, 렘31:15, 호11:1, 미5:2, 그리고 사4:2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왜요? 왜 예수님께서 들어가 계시는 것일까요? ~ 구약 때까지만 해도 구원이 온 인류가 아닌 오직 이스라엘 안에서만 허용되었기에, 그래서 이방인의 구원도 아주 극히 제한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살짝 살짝 그렇게 될 것이라는 뜻에서 구원의 맛보기만을 구약 내내 보여 주시고 계시다가, 제한된 구원의 조건이었는데그래서 믿음의 구약 족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담을 시작으로 예수님까지 그 흐름을 보면 아주 제한적이었습니다. 가족 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실제로 성육신하시면서 제한적인 구원이 온 열방, 모든 우상을 믿던 이방나라까지도 완전 허용이 되었던 것입니다. 완전하게 허용이 되면서 신약에서는 족보가 사라지게 되었고 단지 144,000명이라는 완전 숫자로 구원의 범위를 확대하고 있음을 우린 신약을 통하여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그 느낌을, 특히 사4장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구약 내내 움츠리고, 깊이 움츠리고 있다가, 확~ 터지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 누구 때문에, 네! 바로 예수님 때문에 ~ 사4:2의 여호와의 싹이요 땅의 소산인 그분 때문에 ~ 그분 때문에 정말, 캄캄한 구약 내내 수천년 동안에 ‘깊이, 아주 깊이, 묶여 있다가’ 그 넓고 넓은 푸른 초장으로 확! ~ 보냄을 받은 느낌이 온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요?~ 네! 바로 사4:2의 여호와의 싹이요 땅의 소산이신 예수님 때문에 ~, 그런데 바로 그 자유가 ~, 바로 그 해방이 ~, 누구입니까

 

신약의 우리들이 그 족보 안에 이미 들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린 주일마다 참여하여 회복을 주신 그분께, 진정한 자유를 주신 그분께, 경배와 찬양을 드리는 그 특권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힘이 모든 것인 세상 사람들은 재앙과 함께 영원한 버려짐만이 남아 참담한 보장 없는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비운의 존재들이었지만, 은혜로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된, 시온에 남은 자들은, 그날에 여호와의 싹 때문에 즉 메시야 때문에 영화롭게 되고, 그 땅의 소산은 땅의 소산이 아니라 실제적인 뜻은 여호와의 싹이 메시야를 상징하는 말씀처럼 마찬가지로 메시야를 뜻하는데, 그 땅의 소산인 메시야 때문에 영화롭고 아름다울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다 여호와의 싹과 그 땅의 소산인 메시야로 인하여 거룩하다 칭함을 얻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이 바로 사4장입니다. 메시야로 말미암아 시온에 남은 자들만이 더러움을 씻김 받게 되고 영원히 청결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메시야로 인하여 남은 자, 교회들은 뜨거운 사막인 낮에는 구름과 연기로 인하여, air-condition처럼 시원하게, 추운 사막의 밤의 교회들은 화염의 빛을 받아 heater처럼 따뜻하게 보호를 받게 하시고 그리고 사4:6의 뜻은 초막의 역할인데 그 초막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방패, 피난처, 산성이 되어 주신다는 뜻으로 악하고 더러운 세상의 세력들을 상징하는 풍우를 철저하게 막아 준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여기서 알아야 되는 점이 있습니다. 전쟁과 평화가 공존하는 현실이고 승리와 패배가 공존하는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안전과 위험이 공존하고 있기에 그래서 어떤가요?  그 상황을 힘의 눈으로 보면, 평화보다는 전쟁하는 현실만이 보이고, 승리보다는 실패의 아픔만이 존재하는 것과 같고, 안전한 현실보다는 위험하여 늘 조심해야 되는 현실로 보이기에, 그래서 두려워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겠지만, 그러나 그 전쟁과 환란 속에서도 남은 자들에게는 평화가 보장되었고, 승리자로 이미 되었고, 100% 안전한 보호를 받아 평생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언제 확인하게 될까요? 언제 하나님께서 믿는 자녀들에게 피난처요 반석이요 선한 목자요 요새가 되어 주셨음을 알게 될까요? ~ 물론 죽으면 100% 알 수 있겠지만, 그건 유감이지요! 그건 참 안타까운 점인데, 무엇과 같은가 하면, 영국 런던에서 뉴욕까지의 배 값에 모든 식사비가 들어가 있었는데, 그걸 몰라, 배 값을 다 털어서 지불했으면서도 돈이 없다고 하여 먹지도 못하면서 거지처럼 여행을 한 달 동안 하게 되었다면, 이보다 억울한 일이 어디 있을까요? 그래서 유감이요 안타까운 노릇이라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면 모든 보장이 100% 확보가 된 것이기에,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 살기 위하여 이웃을 죽이는 그런 전쟁, 미워하는 그런 전쟁, 죽고 죽이는 전쟁 속에서도 믿음의 우리들은 전혀 두려워할 필요도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4장의 이 말씀만으로도 은혜를 입은 남은 자들은 어떠해야 되는지 알 수 있기에 전쟁과 환란 속에서도, 심히 위태로운 처지에서도, 피난처요 반석이요 선한 목자이신 하나님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 힘의 사람들하고는 달라도 완전 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힘의 사람들처럼 그렇게 살아갈 이유가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왜 성경의 말씀이 중요한지, 특히 사4장의 이 말씀이 중요한지, 이해가 되시나요? 

 

하나님께서 나는 너희들의 피난처요 반석이요 선한 목자다! 라는 이 사4장의 말씀이, 누구에게 큰 능력이 되고 기쁨이 되고 자랑이 될까요? 사4장의 이 말씀을 기억하는 성도들입니다. 사4장 때문에 하나님을 믿게 된 성도들은 갈수록, 얼마나 놀라운 큰 힘이 되고 기쁨이 되고 감사가 되는지, 하나님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하게 되면서 늙어 가면 갈수록, 더욱 놀라운 믿음의 행보가 되면서, 늘 잎이 푸르고 진액이 풍성하면서 결실하게 되니, 주변의 이웃과 가족과 친구들에게도 신앙의 본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입었지만 말씀을 늘 묵상하지 않았고, 마음 판에 새기지 않고, 단지 세상 사람들처럼 예전 그대로 힘으로 살아간다면, 그 남은 자들의 현실은 어떨까요? 능력이 있을까요? 아니, homeless와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 상점을 약탈하는 자들과 무엇이 다를까요? 다르지 않습니다. 민족의 피를 팔아서 부를 누리는 북한의 세력들과 무엇이 다를까요? 다르지 않습니다. 죄를 만들어서 죄인 되게 하고, 힘없는 자들을 조롱하는 간사하고 간교한 윤석열을 뽑고, 그리고 그 세력을 지지하는 자들과 무엇이 다를까요?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계시기에, 힘의 사람들과 달라도 완전 달라야 합니다.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떤 세력에게도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할 필요가 없어야 하고 죽음의 세력까지도 제압한 성도들인데 두려워 할 것이 무엇이 있단 말입니까?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려는 영적인 훈련만 죽도록 하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가진 자녀들의 목표가 무엇이어야 할까요? 

 

특히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늘 순종하여 의가 물처럼 공의가 강물처럼 흘려야 합니다. 당연히 이웃을, 친구를, 약자들을 자기보다 높여야 할 것입니다. 악을 선을 갚아야 할 것입니다. 그 어떤 손해와 조롱을 당할지라도 미워하거나 요동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왜요? 자기편이 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그 귀한 믿음의 행보가 되면, 어떤 능력이 나타날까요? ~ 당연히 자기의 더러운 옛 자아가 제압이 되고 주님의 마음으로 상대하니, 그 상대방이 느끼는 그 감동이 어떨까요? ~ 그런 그 한 사람은 그 동네에 부패를 막고 새로운 길을 택하게 할 것입니다. 

 

잠11:10-11입니다. “의인이 형통하면 성읍이 즐거워하고 악인이 패망하면 기뻐 외치느니라,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복으로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으로 말미암아 무너지느니라” 

 

렘5:1입니다.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 한 사람의 믿음은 측량할 수 없는 승리의 복이요 능력이요 지혜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식대로 살아가게 된다면, 망한 제2의 남 유다와 북이스라엘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우린 당장 어느 쪽을 선택하셔야 할까요? ~ 그런데 다수가 하나님의 쪽을 기쁨으로 선택하지 못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아주 작은 하찮은 것에 대하여 전혀 감사하지 못하는 악한 마음 때문이 아닐까요? ~

 

특히 구약에서의 하나님은 출34:26을 보세요! “네 토지 소산의 처음 익은 것을 가져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며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 하나님께서 명하기시를 그 하찮은 짐승일지라도 너는 염소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1) 그 작은 짐승일지라도 사랑을 파괴하는 잔인한 짓은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2) 그 작은 짐승일지라도 이는 자연의 질서를 파괴하는 비인륜적인 행위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짐승이 다 하나님의 것인데도 불구하시고 하시는 말씀을 보세요! 그러나 우린 어떤가요? 이런 따뜻함이 있나요? 이런 자비함이 있나요? 쌀 한 톨, 물 한 방울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나요? 일전일초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고 있나요? 

 

그래서 오늘은 몇 가지로 말씀을 나누어서 드립니다. 

 

1. 출35:21-29입니다. 마음이 감동된 모든 자와 자원하여 모든 자가 와서 회막을 짓기 위하여 그 속에서 쓸 모든 것을 위하여, 거룩한 옷을 위하여 예물을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니, 곧 마음에 원하는 남녀가 와서 팔찌와 귀고리와 가락지와 목걸이와 여러 가지 금품을 가져다가 사람마다 여호와께 금 예물을 드렸으며, 무릇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과 염소 털과 붉은 물들인 숫양의 가죽과 해달의 가죽이 있는 자도 가져왔으며, 은과 놋으로 예물을 삼는 모든 자가 가져다가 여호와께 드렸으며 섬기는 일에 소용되는 조각목이 있는 모든 자는 가져왔으며마음이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손수 실을 빼고 그 뺀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는 베 실을 가져왔으며, 마음에 감동을 받아 슬기로운 모든 여인은 염소 털로 실을 뽑았으며, 모든 족장은 호마노와 및 에봇과 흉패에 물릴 보석을 가져왔으며, 등불과 관유와 분향할 향에 소용되는 기름과 향품을 가져왔으니, 마음에 자원하는 남녀는 누구나 여호와께서 모세의 손을 빌어 명령하신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물품을 드렸으니 이것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자원하여 드린 예물이니”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는데 왜 모두가 동참하게 하시던가요? 십시일반(every little helps)으로 드려서 세워진 성막은 결국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얻게 하고 무엇을 알게 하던가요? 능력 있는 어떤 한 사람이 큰 것을 드려 세우는 성막, 성전이 아니라 온 백성들이 그 작은 마음들을 모아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시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도 같습니다. ‘한꺼번에’ ‘단번에’가 아닙니다. 늘 자기의 작은 마음들을 조금씩, 계속해서 해 나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개미를 보고 배우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신약에서도 보세요! 예수께서 주시는 비유를 봅니다. 눅13:18-21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과 같을까 내가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또 이르시되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무엇으로 비교할까,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셨더라 누룩이 얼마나 작던가요? 그러나 그 작은 누룩이 자라 어떤가요? 그 가지에 깃들이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누룩하나를 얼마나 가볍게 여기고 있습니까? 거룩함은 작은 마음부터 드려야 합니다.

 

2. 하나님께서는 성전을 세우실 때, 어떤가요? 출38:8입니다. “ 그가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하였으니 곧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더라 여자들이 늘 쓰는 청동기로 된 거울을 가지고 제사장들에겐, 없으면 안 되는 성막의 물두멍을 만들게 하십니다

 

여기서 드리고 싶은 말씀은, 특별한 어떤 것으로 세운 성막이요 성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것을 가지고 성전의 물두멍을 만들어서 제사장들이 일을 할 수 있게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힘의 사람들은 작은 것에 대한 감사와 가치를 모릅니다. 힘의 사람들은 낭비가 자랑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화평과 기쁨은 작은 것을 아껴서 서로 나눌 때입니다. 특히 시간을 세상 힘으로 쓰는 것만큼 악한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 악할수록 힘의 사람들이 쓰는 시간을 보세요! 무엇을 위한 시간이던가요? ~ 

 

3. 레10:1-11입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 모세가 아론의 삼촌 웃시엘의 아들 미사엘과 엘사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나아와 너희 형제들을 성소 앞에서 진영 밖으로 메고 나가라 하매, 그들이 나와 모세가 말한 대로 그들을 옷 입은 채 진영 밖으로 메어 내니, 모세가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과 이다말에게 이르되 너희는 머리를 풀거나 옷을 찢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가 죽음을 면하고 여호와의 진노가 온 회중에게 미침을 면하게 하라 오직 너희 형제 이스라엘 온 족속은 여호와께서 치신 불로 말미암아 슬퍼할 것이니라, 여호와의 관유가 너희에게 있은 즉 너희는 회막 문에 나가지 말라 그리하면 죽음을 면하리라 그들이 모세의 말대로 하니라,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 그리하여야 너희가 거룩하고 속된 것을 분별하며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하고, 또 나 여호와가 모세를 통하여 모든 규례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르치리라” 하나님께서는 성막에서만 사용해야만 되는 불이 있습니다. 다 같은 불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론의 두 아들인 두 제사장인 나답과 아비후가 한 잔을 한 후에, 다른 불을 가지고 성막의 불을 밝혔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즉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즉사를 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라는 불을 쓰지 않고 다른 불을 사용하다가 목숨을 잃었다는 말씀입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아니었습니다.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긴 것입니다. 하찮게 여긴 것입니다. 괜찮을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늘 드리는 말씀이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해야 된다고 말씀을 드리고 늘 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은혜를 입었기에 대충해도 된다, 말씀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 아니 그 반대이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 잃고 말 것입니다. 은혜라고 하여 순종하지 않으면 그건 성막 안에서 즉사한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즉사한 사건이 신약에서도 있습니다. 행5장에서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입니다. 한 쪽은 다른 불로, 다른 한 쪽은 거짓말로 즉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즉사한 이유를 크게 보면,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은혜를 내세우면서 어떤 선택을 하던가요? 불순종까지도 마다하지 않고 있고, 쉽게 인기와 명성과 자랑을 받으려는 수작까지도 마다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교회가 빛을 잃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을 포함한 힘의 사람들이 인정사정없이 즉결심판으로 사망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무엇이라고 하던가요? 사랑의 하나님이라면서~ 비꼬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신뢰하지 못하겠다고 할 것입니다. 권위에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하나님하고의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하고 관계를 맺지 못하는, 힘의 교인들을 포함하여, 힘의 사람들은 서로 신뢰는 불가하고 불신으로 살아가게 되니, 어떤 현실이 될까요? 늘 두렵고, 괴롭고, 피곤하고, 당하고, 이 고민 저 고민을 하다가 영원히 버려지고 마는 것이 아닙니까? 

 

힘에 있어서, 늘 감사, 기쁨, 행복은 소망이요 바램일 뿐, 그 기쁨과 감사와 행복이 있다고 해도, 그것은 안개와 같이 바로 사라지고 마는 잠시의 감사요 기쁨이요 행복인데~ 그 점을 몰라 늘 방황하게 됩니다. 몰라 방황하기에 셈할 가치도 없는 그 인생에, 입김보다 가벼운 그 인생에, 속고, 속다가 끝납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었다면 구약의 형제 나답과 아비후, 신약의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가 즉사한 이런 사건을 통하여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까? 아무리 작은 일도 가볍게 여기지 않게 되고, 하찮게도 여기지 않으면서 자기가 하는 일들에 대하여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늘 최선을 다하기에 그래서 비록 늦고 더딜 수밖에 없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 같이, 그 결과는 최선을 다하는 자가 이길 것입니다. 믿음의 최선이 가장 빠른 길이요, 믿음의 최선이 진정한 승리자가 됩니다. 그래서 성도는 당장으로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당장 즉사하는 그 길을 택하지 않아야 합니다. 비록 힘의 사람들에게 당장 조롱과 조소를 받을지라도,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했을 때, 비로소 상급과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동일합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럴 때, 감사, 기쁨, 행복의 결실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은혜 때문에 작은 것을 큰 것과 동일시하는 성도들은 사4:1에서의 그 수모가 아닌 그 반대로 같은 시간에 약속된 그 영원한 복인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입김의 무게보다 가벼운 세상의 힘에 속아 살아야 했던 세상 인들은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처절한 비명을 지르지 않을 수가 없게 되겠지만, 그러나 은혜 때문에 작은 일에도 믿음으로 늘 최선을 다 하던, 끝까지 순종하던 성도들은 상급과 칭찬으로 영원히 찬양을 드리는 그 엇갈림이 동시에 나타날 것입니다.  

 

결론입니다. 그 놀라운 은혜를 입었기에,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성도라면 어떤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할까요? 시편 117편입니다. “너희 모든 나라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며 너희 모든 백성들아 그를 찬송할지어다, 우리에게 향하신 여호와의 인자하심이 크시고 여호와의 진실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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