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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2024 이사야 2:1-22 본문

주일 설교 말씀

6/9/2024 이사야 2:1-22

PastorYK 2024. 6. 10. 13:10

말씀: 사2:1-22                                                

제목: 말일에 

 

 

왜? 말일일까요? 성경에서 알 수 있는 것이 모든 말씀들이 다 말일에 집중 되어 있는데, 그런데 말일에 대한 표현이 좀 다릅니다. 신약에서는 행2:17, 딤후3:1, 히1:2, 벧전1:20, 벧후3:3에서는 지금 우리가 보는 개역개정이나 전에 보던 개역 성경에서는 다 ‘말세’로 표현하고 있지만 ‘말일’로 해도 됩니다. 다른 신약인 빌1:6에서는 우리가 보는 개역개정이나 전에 보던 개역 성경에서는 ‘말세’인 ‘말일’을 ‘예수의 날’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살전5:2, 살후2:2에서는 우리가 보는 개역개정이나 전에 보던 개역 성경에서는 ‘말세’인 ‘말일’을 ‘주의 날’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도 그렇습니다. 사2:2에서는 개역개정이나 개역 성경에서는 똑같이 ‘말일’이고, 호3:5에서는 개역개정은 ‘말일, 말세’를 ‘마지막 날’로 표현하고 있고, 전에 보던 개역성경에서는 ‘말일’로, 미가서4:1에서는 개역개정에서는 ‘말일, 말세’를 ‘끝날’로, 전에 보던 성경에서는 ‘말일’로, 그리고 렘23:20, 30:24에서는 지금 보는 개역개정은 ‘끝날’인데 전에 보던 개역성경에서는 ‘말일’로 그러나, 개역개정 성경에서는 렘48:47에서는 ‘끝날’을 ‘마지막 날’로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에 보던 성경에서는 ‘말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 같은 원어입니다. 

 

한 곳만 봅니다. 호3:5입니다. “그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와서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와 그들의 왕 다윗을 찾고 마지막 날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므로 여호와와 그의 은총으로 나아가리라” 개역개정에서는 호3:5에서 ‘말세, 말일, 끝날’을 ‘마지막 날’로 기록하고 있지만 예전에 우리들이 보던 개역성경에는 ‘말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의 원어가 ‘아하리트’로써 다 같은 뜻의 단어들입니다. 그래서 같은 단어를 다 다르게 표현하고 있지만, 오늘은 다 합쳐서 사2:2의 말씀에서 쓴 ‘말일’로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성경 곳곳에서 말씀들이 ‘말일’로 집중 되어 있는데 그 이유는 말일’에 놀라운 반전과 회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반전과 회복이 성취가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어떻게 이해를 시키고 있는가 하면, 무너진 이스라엘의 남 유다가 70년 만에 바벨론에서 돌아오는 것을 통하여 일깨워 주시고 있고, 특히 예식과 절기를 통해서도 계시하시면서 말일에 완전한 회복이 될 것이라고 집중적으로 계시하여 주시고 계십니다.

 

먼저 출31:12-17, 신5:12-15입니다. “출-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나와 너희 사이에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게 함이라,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 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 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 신-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소나 네 나귀나 네 모든 가축이나 네 문 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에게 너 같이 안식하게 할지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안식일을 통한 하루의 안식을 이스라엘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과 짐승과 땅에게도 안식을 반드시 주라 하시고 그리고 레25:1-7의 안식년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 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가꾸어 그 소출을 거둘 것이나, 일곱째 해에는 그 땅이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말며, 네가 거둔 후에 자라난 것을 거두지 말고 가꾸지 아니한 포도나무가 맺은 열매를 거두지 말라 이는 땅의 안식년임이니라, 안식년의 소출은 너희가 먹을 것이니 너와 네 남종과 네 여종과 네 품꾼과 너와 함께 거류하는 자들과, 네 가축과 네 땅에 있는 들짐승들이 다 그 소출로 먹을 것을 삼을지니라” 레25장에서는 안식년을 통한 1년간의 땅의 안식을 율법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레25:8-13의 희년을 통해서도 말씀합니다.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일곱째 달 열흘날은 속죄일이니 너는 뿔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뿔나팔을 크게 불지며,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 그 오십 년째 해는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가꾸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는 밭의 소출을 먹으리라, 이 희년에는 너희가 각기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갈지라” 안식년의 7번째 그 다음 해인 희년을 통하여서는 모든 종과 노예들이 가족에게로 다 돌아가게 되어 있고 그리고 재산인 땅까지도 자기의 원주인에게로 완전하게 돌아가게 하셨습니다. 완전한 회복입니다.

 

이렇게 법을 통한 일시적인 구약의 회복은 결국 ‘말일’에 오실 메시야,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분까지도 완전히 회복이 되어 진정한 자유인이 된다는 것임을 상징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에는 모세의 홍해사건도 ‘말일’에 일어날 회복의 뜻을 포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2:2-3에서도 알 수 있게 합니다. 말씀을 봅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여기서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가 오시면 어떻게 된다고요? 그가 우리를 그 길로 행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행한다고요?

 

사2:5입니다.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여호와의 빛에 행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중심은 다름이 아니라 구약성경의 중심이 이렇게 ‘말일’에 집중 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왜요?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성경의 중심이 회복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회복입니까? 죄에서부터의 회복입니다. 죄의 종에서 진정한 자유인이 된다는 뜻입니다. 

 

사2장에서는 그 말일에 일어날 일을 기록하고 있는데, 사2:2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말일에 교회가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말일에 세워질 교회에 야곱의 자손들이 세상 곳곳에서 다 모여 구원의 주와 창조주 하나님에게 예배와 경배를 드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2:3을 이미 보셨지만, 그가 오시면 그가 우리를 그 길로 행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2:5에서 말씀하시듯이, 여호와의 빛에 행하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지 않던가요? ~ 

 

우린 바울서신인 에베소서에서도 구원의 목적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엡1:3-5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구원의 목적이 세상의 부와 건강과 성공이라고 합니까? 아닙니다.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주신 말일의 구원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를 주신 이유도 보면, 어떤가요? 주전 730년경에 말일의 상황 즉 구세주 메시야가 임하게 될 것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해가 전혀 되지 않습니다. 이사야 말씀이 7년 후도 아니고 70년 후도 아니고 700년 후의 일어날 말씀을 이렇게 상세하게 말씀을 해 주시고 계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 이해를 한들 이미 700년 후에는 아무도 살아 있을 그 당시의 사람들이 하나도 없을텐데, 사2장의 이 말씀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러나 성경의 목표는 바로 말일에 오실 메시야가 그 핵심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즉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그 이후부터 하나님의 목표는 말일에 이룰 회복, 즉 구원에 있었던 것입니다. 구원인 거룩함에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시 재창조하시려고 구약 내내 말일에 집중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700년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진다고 합니까? 사2:2-4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결론은 율법이, 구약의 율법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복음이 시온 즉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요4:20을 보세요!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그런데 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요4:21-22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무슨 뜻입니까? 메시야,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으로 오시는데 유다 지파를 통하여 오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미5:2의 말씀도 보세요!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같은 뜻의 말씀을 미가서에서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듯이 결국 예언된 말씀 그대로 오셨습니다. 그것도 여자의 후손인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구약의 예언들처럼 분명하게 여자의 후손이요 유다지파를 통하여 오실 것이라고 하셨고 그리고 그대로 오셨지만, 그러나 그 누구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결국 믿지 못하였기에 인간의 손에 붙잡혀서 십자가에서 예언된 대로 죽고 말았습니다. 

 

녀의 몸을 빌려서 이 세상에 구세주로 오실 것이라고 이미 수없이 예언해 주셨지만, 어느 누가 믿었던가요? ~ 오신다고 하셨지만 오신 메시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들의 손에 잡혀 죽고 마십니다. 그런데 어떤 불가사한 기적이 일어나고 말았던가요? ~ 죽으신 예수께서 부활하시더니 그리고 그 후에 오순절 날에 성령께서 임하시더니 그때부터 야곱의 족속들이 모여서 교회를 이루더니 예언대로 ‘여호와의 빛에 행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2000년이 지난 지금도 보면, 어떤가요놀랍게도 사2:5의 말씀대로 야곱의 자손들이 여전히 ‘여호와의 빛에 행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구약인 61편의 시편기자도 보세요! 어떤 고백을 하던가요? 많은 곳이 있지만, 시간상 한 곳만 봅시다. 시61:7-8입니다. “그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주하리니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그를 보호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보호하여 주신다면, 즉 인자와 진리는 결국 메시야이신 구세주입니다. 그 구세주이신 예수가 그리하여 주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매일 나의 서원을 이행하리이다! 

 

어떤 서원이던가요? 시61:2-4입니다. “내 마음이 약해질 때에 땅 끝에서부터 주께 부르짖으오리니 나 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소서, 주는 나의 피난처시요 원수를 피하는 견고한 망대이심이니이다, 내가 영원히 주의 장막에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리이다 (셀라)” 나 보다 높은 바위에 나를 인도하여 주시면, 나의 피난처요, 견고한 망대이신 주의 장막에 영원히 머물며 내가 주의 날개 아래로 피하겠다는 서원입니다. 그런데 인자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들을 늘 보호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 서원대로, 자신의 피난처요, 견고한 망대가 되어 주셨기에, 주의 장막에 영원히 머물며 주님과 영원히 동행하겠다는 그 서원을 이행해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 당연히 하나님만 의지해야 하는데, 그 보호하심으로 주님만 지금 바라보고 계십니까? ~ 시편기자의 이 고백이 말일의 사는 우리들의 고백이어야 하는데 어떤가요? ~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말일에 인자와 진리이신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들을 어떻게 보호하고 계십니까?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주십니다. 아멘

 

그렇다면 그분만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어느 쪽에 서 있던가요? 말일에는 은혜를 입었다면, 분명 새로워져야 합니다. 사2:6-21에서도 알 수 있듯이, 나뉩니다. 정확하게 나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과 우상 숭배하는 자들로 나뉩니다. 말일에 예수가 죽고 부활 승천하고 나면, 나뉘면서 교만한 자들, 우상숭배자들이 다 심판을 받게 되고 제압을 당하면서 하나님만이 홀로 높임을 받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홀로 높임을 받으시지만, 불신자들은 버려지고, 남은 자들인 야곱의 족속들은 말일에 어떤가요? 

 

4절입니다.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삶의 승리와 행복인 평화를 만들어내더라는 것입니다. 그 야곱의 족속이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만세 전에 택함을 받은 자녀들인데, 그들이 어떤 선택으로 영원한 승리와 행복을 이룰 수 있게 되었나요? 

 

하나님의 인자와 진리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보호를 받으면서 여호와의 빛에 행하더니, 즉 악을 선으로 갚고, 더러움이 정결해 지고, 가시나무와 같은 자들이 백향목이 되고, 거짓이 정직이 되고, 슬픔이 기쁨이 되고, 실패가 성공이 되고, 전쟁이 화평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언제요? 말일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으로 오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런 기적들을 만들어 내더라는 것입니다. 시61:7-8의 그 고백인, “인자와 진리를 예비하사 보호하여 주신다면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찬양하며 내일 나의 서언을 이행하리이다!”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의 중심은 신앙이란? 인자와 진리로 받은 그 믿음의 은혜가 없이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요? 수백 년 후에 또는 수천 후에 일어날 말일에 대한 예언의 말씀을 100% 다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보이는 현실, 지금 당장의 성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에 대하여 어떤 정의를 내리고 있던가요?

 

히11:1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그런데 우리들의 믿음은 어떤가요? 당장의 성공과 승리를 위한 믿음이 아닌가요? 그래서 당장의 문제가 생기면 어떤 반응을 하던가요? 이겨내지 못하여 깨어지고 터지고 낙심하여 포기까지 하면서 나중에는 하나님을 떠나버리고 마는 교인들을 허다하게 보았습니다. 사2장의 말씀도 700년 후에 일어날 말씀이라면 창12:1-3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1800년 후에 생길 복의 언약이지 않던가요?

 

게다가 창3:15도 보세요!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고 계신데, 이 약속은 어떤가요? 당시의 사람들하고 전혀 상관이 없는 약속의 복음입니다. 이렇게 복음은 수천 후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대로 다 이루어 졌습니다. 이런 완성이 가능할까요? 수천 년에 걸쳐서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구원을 지금 우리들이 받았다면 어떤 기적입니까? ~ 지금 우리들이 구원을 받았다면 그 영광이 어떤 정도일까요? ~ 그 특권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왜요? 상상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상이 전혀 되지 않는데 현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또 어떤 약속을 받았나요? 우린 영원히 죽지 않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아니 영원히 행복한 자가 된 것입니다. 

 

그 능력은 죄의 세력을 제압할 수 있는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들이 그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데, 어떤가요? 여호와의 빛에 기꺼이 행하고 있나요? 아니면, 아직도 그 능력을, 그 특권을 확신할 수 없어서 썩어질, 세상 때문에, 코의 호흡에 불과하기에 셈할 가치도 없는 그 인생의 성공을 이루려고 머뭇거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 그렇습니다. 다수가 그렇습니다. 은혜라는 그 말씀의 뜻을 몰라 교인들이 아니 목사들이 어떤 선택을 하고 있던가요? 우상숭배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힘을 위하여 예수그리스도를 배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일의 목적이 분명할진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회복으로써 그 목표는 거룩이었습니다. 그런데 멋대로가 되었고 예수를 믿는 목표가 세상의 힘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건 신앙이 아닙니다. 참 신앙은 교회만 다니면 되고, 기도와 말씀 묵상이 신앙이고, 선한 일로 대신 할 수 있는 것이 신앙일 수 없습니다. 신앙은 말일에 즉 예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으로 인하여 임하신 성령의 도움으로 더 이상 세상의 힘과 부와 승리에 연연하면 안 됩니다. 말일인 지금은 힘의 기적이 아니라 믿음의 기적이 확실하게 나타나야 합니다. 믿기에 다 내려놓는 기적 말입니다. 믿기에 자기를 부인하는 기적 말입니다. 믿기에 all in 하는 기적 말입니다. 그래서 감사하고 그래서 기뻐하셔야 되는 것이지, 인간의 힘에 의한, 감정적인 기쁨과 감사가 아닙니다. 내일의 심판 날을 끝까지 준비하는 것이 믿음이요 신앙입니다.

 

그래서 사2:22의 말씀을 보세요.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당장 보이는 힘과 승리를 위하여 살아가는 그 인생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하십니까셈할 것도 없다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무가치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에 묶인 힘의 인생은 그의 호흡이 코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셈할 가치가 조금도 없다고 하는데, 왜 교회와 교인들이 힘을 자랑합니까? 왜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일의 성도들이 사2:6-21의 그 책망을, 그 심판을 고스란히 받을 수 있단 말입니까? ~ 무엇보다도 말일의 성도의 그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안다면, 말일에 그 엄청난 자기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인데, 다윗이 고백했듯이 ‘나의 잔이 넘친다’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 다윗보다 더 큰 그 이상의 고백이 터져 나와 됩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누리기는커녕 어떤가요? 은혜를 몰라도 너무 몰라, 무슨 짓을 하고 있던가요? 셈할 가치도 없는 인생을 위하여 땀을 죽도록 흘리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건, 죽은 자들도 한심해서 깨어날 정도입니다. 땅 위에서 다리를 헛짚었는데, 바다에 빠져 죽는 꼴입니다. 성도로서는 이런 실수는 없는 것인데, 말도 안 되는 선택을 하는 그 이유는 말일의 그 가치를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으면 어떤 선택을 하는지, 그래서 제가 you tube에서 미국의 각각 다른 어느 고등학생 졸업식에서의 졸업생 2명이 하는 그 졸업 축사는 말일에 사는 성도들에게 귀한 본이 되기에 보내드렸습니다. 우리들도 그들처럼 그렇게 이웃들에게 도전과 유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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