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승리를 했기에 두 가지로 말씀을 드립니다.첫째는 신앙의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자랑해 보려고 합니다.지난 금요일 저녁시간에 영국의 프리미어 리그에 속한 울버햄프턴 원더스 축구팀에서 뛰고 있는 한국의 황 희찬 선수의 일상을 《나 혼자 산다 Home Alone》라는 MBC 오락 프로그램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단지 바깥 잔디 위에서의 훈련을 하기 위하여,그 전에 건물 안에서 철저한 치료와 또 다른 차원의 훈련을 하는 것을 보면서, 느낀 점이 있었습니다. 그 팀에 속한 모든 선수들이 바깥 잔디에서의 훈련을 하기 전에, 각 선수들에게 최고의 자격을 가진 축구 지도자들부터 엄격한 맞춤 훈련을 받고, 그 뿐만이 아니라 매일 최고의 각 분야의 치료전문단의 도움을 받게 하고, 그리고 최고의 음식을 만드는 요리사의 음식도 각 선수에 맞는 식단으로 먹이고 그리고 심지어 선수들의 빨래까지도 해 주면서 선수 한 사람, 한 사람들을 육성 관리를 하는 것을 보면서,너무나 놀라, ‘이럴 수가~’ 입이 벌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매일 이렇게 엄청난 시간과 경비를 구단에서 들여 본 리그를 준비하는 것을 보면서, 무엇이 프로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각 선수들과 팀의 좋은 성적을 위한 구단에서의 보살핌은 정말 달라도 너무나 달랐습니다. ‘이것이 영국의 프로 축구구나’를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단지 세상에서도 각 팀이 우승과 좋은 성적을 위하여 각 선수들을 위한 구단의 상상할 수 없는 막대한 투자로 각 선수들을 관리하고 보호하여 발전과 향상을 시키고 있는 것을 보면서,그래서 각 선수들도 게임에 나가면, 죽기 살기로 뛰어 자신과 구단의 가치를 올려놓으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성도 각자와 교회에서는 어떤지, 어떠해야 되는지, 그 입장을 생각해 볼 수 있었는데, 어떤가요?
우리는 영국의 프리미어 리그 프로 축구팀의 선수들처럼 그런 철저한 관리와 보살핌을 받지 못하고 있을까요? 분명 MBC의 《나 혼자 산다Home Alone》라는 그 프로를 통하여 영국의 프리미어 리그 축구 구단이 서로가 최고가 되려고, 최고로 훌륭한 곳곳의 선수들을 모아훈련시키는 그 운영 그 실체를 보면서, 너무나 엄청나기에 Wow~ 할 뿐이었지만,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여기까지는, ‘믿음이 떠난 저의 육신의 눈이 보는 평가였지만~’
그러나 다음 날, 정신을 차린 후에, 오늘 설교를 준비하면서, 얻은 답은, 역시나 예수 구단주와 같은 곳은 없었더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분명할진데, 그 어느 세상의 모든 구단주들이 승리를 위하여 모든 재정과 힘을 다 투자할지언정,자신이 죽어, 또는 매일 자지도 못하면서 각 선수를 보호하고 살리는 경우는 전혀 없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된 우린 창조주시오 구원의 주가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영국의 프로 프리미어 리그 축구단과 전혀 비교도 되지 않는 최고의 이 지구 안에서와 죽은 자를 살리는 그 최고의 사랑으로, 그리고 불꽃같은 눈동자로 한 생명 한 생명들을 관리해 주시고 보살펴 주시는데, 게다가 무슨 해를 받을까봐,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더라는 것이 아닙니까? ~ 갑자기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시편73편이 생각이 났습니다.세상의 형통을 보고 잠시 흔들렸던, 시편기자나 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무엇이 복인지를 알고이렇게 감사의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은혜 충만할지라도 끝까지 깨어있지 않으면, 넘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성도된 우린 어떤 훈련을 나름 하면서 세상에 나가 성도된 자로서 어떤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셔야 되는지, 두려움을 갖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단지 사라질 세상의 승리와 부와 영광을 위하여 프로 축구 구단까지도 상상할 수 없는 최고의 조건에서 모두가 다 애를 쓰고 있는데, 그런 축구하고는 전혀 비교할 수 없이 중요한,사람의 목숨과 직결된 구원을 늘 다루어야 되는 성도로서는 어떠해야 될까요?그런데 자기는 바쁘다고 하여 신앙의 훈련을 거의 못하고 있다고요?~
그냥 기도하고 말씀을 보는 것만으로 성도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여기시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지금처럼만 해도 늘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세상 세력인 하만을 제압하기 위하여 에스더는 목숨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즉 그 뜻은 항상 목숨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라고 이에 대한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우린 어떤가요? 영국의 프로 축구구단처럼 그 정도로 매일 최선을 다하면서 최고의 자리를 향하여 가고 있다면, 우린 그 믿음의 자리를 지켜내기 위하여 무엇을 포기하고 있나요?~ 에스더처럼 목숨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만을 제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에스더의 목숨을 건 그 선택은, 에7:7에서 나타납니다. “하만이 일어서서 왕후 에스더에게 생명을 구하니 이는 왕이 자기에게 벌을 내리기로 결심한 줄 앎이더라”모든 유대인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다 죽이려고 하던 그 하만이, 이젠, 자기가 위기에 처하자, 자기만 살아보려고 자기 목숨을 구걸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높음을 인정하지 않은 모드르개 때문에 유대인 남녀노소 가리지 말고 다 진멸하라고 해 놓고는,자기가 위험에 처하니깐, 살려달라고 하는 것을 보세요! 그 안에 누가 보입니까? 그 미련하고 어리석기에,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하만만이 보입니까?~ 혹시 자기 자신이 보이지는 않나요?~지금 우리들이 하만처럼 자기 때문에 힘들게 된 이웃들은 상관하지 않고, 자기의 입장만 편해 보려고, 자기의 유익만 구하고 있다면 하만하고 무엇이 다른가요?~
사람의 죄가 참 뻔뻔하게 합니다.모든 유다 민족을 다 죽이려고 왕의 조소까지 받아 날짜까지 잡았던 자가 이제, 자기가 당장 죽게 되니깐, 살려달라고 애걸하더라는 것입니다. 자기만 살려는 이 꼴이 나와 우리의 실체가 아닙니까?~ 우리가 하만과 전혀 다르지 않기에 그래서 예수께서 죽기까지 하신 것이 아닙니까?그런 나를 위하여 죽기까지 하셨는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요? 무엇이 다 입니까? ~ 장대에 달리는 하만을 통하여 무서운 경고를 하십니다. 더 이상 세월을 낭비하지 마시고 어리석은 말을 하지 마시고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마시고 자신이 어떻게 행해야 할지, 자세히 주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부탁합니다.지혜 없는 자같이 하지 마시고, 오직 지혜 있는 자같이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오직주의 뜻이 무엇인지 듣고 순종하시면서 날마다 하만의 세력을 제압하시려고 날마다 죽는 제2의 에스더가 되셔야 합니다.
둘째로입니다. 천하를 다스리던 바사국의 2 인자였던 그 하만을 보면, 보기에는 막강한 자로 보여지고 있었지만,한 여인에게 이렇게 살려달라고 애걸하는 것을 보면, 그 인생도 별 것이 아닙니다. 권불십년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마치 영원히 천하를 다스릴 것처럼, 으스대었지만, 그 교만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여 이렇게 한 순간에 자기가 준비한 그 장대에 자기가 달려 버려지고 맙니다.
이건 하만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의 이야기가 될 수 있습니다. 동의하시나요? 당연히 아멘입니다. 아멘인데,아직도 세상의 즐거움과 힘이 자신을 지키고 안전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굳게 믿으십니까? 엊그제까지만 해도 하만의 힘은 왕 외에는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강력한 권력자였습니다.그러나 오늘은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있고 그리고 결국 버려집니다.
하나님을 모르기에 그래서 교만했던 악인 하만의 종말이 어떨 것인지, 여지없이 계속해서 드러내 주십니다. 무슨 뜻일까요? 이렇게 힘으로는 내일의 보장이 불가하다는 것을,버려지는 하만을 통하여 또 다시 계속 보여 주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은 악인들이 늘 승리하는 것 같지만, 아니라는 것을 지금까지 얼마나 우리들에게 말씀을 해 주시고 계십니까?
성경을 10번을 본 성도는 10번을 말씀을 해 주셨다고 할 것이지만, 50번을 본 성도는 50번을 어떻게 하면 망하고, 어떻게 하면 승리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말씀해 주신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한 번도 보지 않았던 분은 어떨까요?이런 질문에 조차 참여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왜요? 한 번도 읽어 본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니 어떻게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성경을 보시면서, 아니 성경을 보시는 그 정도와 함께, 이해의 깊이와 그 믿음의 크기가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주의하셔야 합니다. 성경을 대하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당연히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높아지면서 승리와 평안보다는 먼저 고민이 더 커진다는 점입니다. 고민이 커지기에, 문제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그 반대로 고민하는 것만큼 신앙의 이해도 깊어지고, 고민하는 것만큼 하나님하고의 관계도 깊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향기 농도가 고민한 것만큼 짙어진다는 것입니다. 무엇과 같은가 하면, 우리가 탁 트인 들판에 대하서 말할 때는 깊고 깊은 어두운 숲에 있을 때가 아닌가요?~막힌 그 감옥이 우리로 자유에 대하여 생각하게 만들고, 배고픔이 음식에 감사하게 하고, 그리고 전쟁이 우리에게 평화에 대해서 말을 하게 하듯이 말입니다. 예수의 깊은 향기도 깊은 신앙의 고민 속에서 뿜어 나오는 법입니다.오늘의 거룩한 고통 없이는 내일의 진정한 승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도 깊어지면 질수록 쉬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아픔의 크기가 더 커지고 깊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절망해야 내일 하만을 매달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웃의 소망도 자신의 절망 없이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 향기인 성도의 능력은 단번에 생기지 않습니다. 아니 생길 수 없습니다. 왜요? 성도일지라도 썩은 냄새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자기의 힘과 승리를 위하여 남을 죽이는 하만하고 조금도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은혜를 입고 평생의 신앙의 훈련을 죽도록 할 때에만, 하만 세력을 제압할 수 있고, 그 때에, 나오는 것이 예수의 향기입니다. 믿으십니까? ~
믿으신다면,그럼, 남은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셔야 된다고 생각하십니까?지금처럼 시간을 쓰신다면 자신의 신앙의 깊이가 점점 더 깊어질 수 있다는 확신을 할 수 있습니까? ~ 아니면 그 반대입니까?신앙의 깊이는 목숨을 건, 평생 훈련 없이는 깊어질 수 없습니다. 단 한 번의 영적 체험으로 신앙의 깊이를 가질 수 없습니다. 신앙 성장은 좋은 머리로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목표 성취가 자기 능력과 실력이 아니라인격의 변화, 주님의 마음을 닮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쉬운 이야기로 돌과 같은 마음판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기 때문에,오직 머리를 써서 되는 것도 아니고 능력이 있으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기억이 나시나요?조선의 국문학자, 억만제라는 호를 가진 김 득신이가, ‘사기의 백이열전’을 일억일천일백번을 읽었다는그래서 수없이 읽다가 보면 알게 된다는 ‘독서백번의자현’이라고 했던 말씀을 말입니다. 신앙의 성숙함도 오직 끊임없는 반복과 연습만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야지만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가 되고, 그때 비로소, ‘하만을 달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드린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날의 첫 생각과 첫 걸음의 그 시작을 믿음으로 시작하자’고 했습니다. 되던가요? 확신할진데, 아무도 그렇게 하루를 시작하지 못했거나,했더라도, 하루 종일 믿음의 눈으로 자기의 생각을 통제하고 자기의 행보를 말씀 위에 굳게 세워 아침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저녁을 맞이하기가 어려웠을 거라고 봅니다. 아니면 어떤 지체는 아주 까맣게 잊고 시작도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
그래서 오늘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우리가 하만의 세력과 싸워 날마다 실패를 하고 있던가요? 아니면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는 간사하고 간악한 그 하만을 날마다 쳐부수면서 승리의 축배를 들고 있나요?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이긴 지도 진지도 모르고 살고 있었나요?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 보겠다고, 주일 그날 모두가 설교 중에 아멘 해 놓고서는, 그 다음 날을 어떻게 시작하던 자신이던가요? ~
그동안에 늘 그렇게 살아왔었기에 그래서 예전처럼 자연스럽게 생각 없이 믿음 없이 그렇게 하루를 시작하면서도, 주일 설교를 들을 때하고는 달리, 아무 생각 없이 살고 있는 자신을 보면서, 언제 생각이 갑자기 들어, ‘아니, 이럴 수가~’ 까맣게 잊고 있던 그 못난 자신을 확인하면서, 무슨 생각이 들었나요?이건 사람도 아니로구나! 이렇게 썩어 있다니! ~이 확인, 그래서 느끼는 거룩한 이 아픔이 없으면 안 됩니다. 이 확인, 그래서 느끼는 그 아픔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우리가 탁 트인 들판에 대하서 말할 때는 깊고 깊은 어두운 숲에 있을 때입니다. 막힌 그 감옥이 우리로 자유에 대하여 생각하게 만들고, 배고픔이 음식에 감사하게 하고, 그리고 전쟁이 우리에게 평화에 대해서 말을 하게 합니다. 늘 상대적입니다. 때문에예수의 깊은 향기도 깊은 신앙의 고민 속에서 뿜어 나옵니다. 오늘의 거룩한 고통 없이는 내일의 진정한 승리는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도 깊어지면 질수록 고난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아픔의 크기가 더 커지고 깊어집니다. 왜요? 그래야지만, 믿음이 멈추지 않고 더 자라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웃의 소망도 자신의 절망 없이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신앙수준을 보면, 어떤가요? 그 반대입니다. 자기의 소망을 위하여 이웃에게 절망을 줍니다. 대신 아파할 줄을 모릅니다. 대신 손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늘 쉽게 가려고 합니다.그러니 신앙이 자라던가요? 자라지 않기에 대신 아파하지 못하니, 본이 되겠습니까? 아픔 없는 열매가 없는데, 아파하지 않으려고 하니, 어떻게 죽으면 죽으리라 할 수 있나요? 전혀 아파하려고 하지 않기에 답보상태가 되는데, 그건 죽은 신앙입니다. 그러니 하만의 세력을 제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파하려고 하지 않기에 하만을 제압하지 못하는 지체들을 보면, 어떤가요? 자기가 하던, 또는 해야 할 세상의 일들은 아무리 힘들어도 열심히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부끄럽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당연히 부끄럽지요!자기의 유익을 위한 이기적인 신앙을 갖고 있으니, 그 가치 없는 가벼운 신앙은 결국 하만의 세력에게 당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건 풍전등화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훈련을 받아야 된다는 강력한 어떤 도전을 받으면 얼마나 다행이요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기에 심각합니다. 그 심각성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영적인 문둥병자가 되어, 사태가 깊어져 지금 우리 주변은 혼돈 그 자체가 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보세요!이런 지경이 되고 말았는데도, 다들 회개하고 돌아서려고 하던가요? 아니면 더 안일해지고 있던가요? 후자입니다. 이 정도가 되면, 이젠 신앙의 훈련에 대하여 최우선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바빠 죽을 지경인데, 먹고 살기도 힘들어 죽을 지경인데, 목사가 될거야, 신앙 훈련을 왜 받아야 돼? 라고 반응하더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악은 끝이 없이 무너지게 합니다. 그래서 목사로써 부끄럽지만, 어떤 고백을 합니까?골방에서의 기도시간이 되면 온 몸이 초긴장이 되면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고통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힘들게 시작하였지만, 십 수 년이 지나면서 지금은 즐긴다고 할까요? 기다려지고 감격과 감동을 수시로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방심하면다시 초긴장과 함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강압감을 느끼면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확~들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늘 긴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너무나 힘들어 정신병자가 되는 줄 알았지요! 그러나 믿음으로 이겨내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그 거룩하심 때문에 여전히 감당하면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목사라고 여러분보다 낫다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억만제, 김 득신 조선학자 때문에 위로를 받고 삽니다.
신앙의 수준은 목사, 장로라는 타이틀이 아니라 누가 훈련을 쉬지 않은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특히 이 신앙은 대단히 의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잘할 수 없습니다. 처음부터 아무도 잘 할 수 없기에 무서운 아니 더러운 옛 자기인 하만과의 영적 싸움을 끝까지 감당해야지, 그 싸움이 없이는 아무도 그 간사한 하만을 제압하여 승리를 이룰 수 없습니다.그래서 지난 설교를 드리고 나서 하루를 그렇게 시작해야 했는데, 아니 그렇게 시작하고 있으면서, 드린 설교말씀이었는데도,그 이틀은 제가 어떻게 된 영문인지, 따라가지 못하더라고요!
잠시 방심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 이틀을 따라가지 못하는 자신을 보니깐, 어떠했을까요? 그 시작을 자연스럽게 못하는 자신이 비통했습니다. 참담하여 무너지는 하만과 같았지요! 하루의 첫 생각과 첫 걸음을 믿음으로 시작하려고 했을 때, 그 시작이 안 되는 것을 보면서, 미쳐버리는 줄 알았습니다.얼마나 괴로워했는지 몰라요! 왜 괴로워했을까요? 이 점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평가를 한다면, 그만큼 하나님의 뜻에 깊이 involve 되어 있으려는 강한 의지와 뜻이 있었다는 차원이 아닌가요?
부정적으로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조차 안 되는 그 한 가지만 보더라도, 그 귀한 하루의 시작조차 쉽게 시행되지 않는 것만을 보더라도, 우리들의 영적 상태가 얼마나 불안한 지, 그래서 깨어 있지 않으면 간교하고 어리석은 하만과 다르지 않은 그런 존재인지를 알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린 알아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라고 하셨을까요? 근본적으로 하만의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좀 더 적극적으로 말씀을 드린다면, 신앙생활은 대충, 쉽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그 근본적인 죄악을, 깊이 뿌리를 내린 그리고 골고루 퍼져 있는 자기의 죄의 뿌리들을 제압하여 통제하기가 간단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50%, 75%, 90%가 아니라 100% 다 부인하라는 것이 아닙니까?신앙생활은 하면 할수록 어떤 고백이 나오는지 아십니까?프로 운동선수나 일류 화가나 일류 음악가나 dancer나 그리고 과학자까지도 그 분야에서는 일인자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분야에서 일인자가 되었다는그 뜻은 아직도 몰라도 너무나 자신이 모른다는 고백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피나는 훈련을 통하여 어느 정도는 익숙해지는 것 같지만, 실은 그 반대라는 것입니다. 알면 알아갈수록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점점 더 어려워지더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다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신앙의 훈련을 통하여 익숙해지면 질수록 편해지는 것이 아니라, ‘아이고 살려주세요!~’가 수시로 터져 나오게 됩니다.
왜요? 자신의 유한성 때문입니다. 자신의 그 모든 선한 것들이 하나님과 비교한다면, 한없이 작고 좁고 부족한데, 진리이신 하나님의 지식, 지혜, 사랑, 능력, 선하심, 그 모든 원리들의 깊이가 다 무한대이시기 때문입니다.
시119:176을 봅니다. “잃은 양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
시편기자의 믿음의 성숙함을 누가 모를까요?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금은보화보다 소중하게 여겼고, 죽을 지경 속에서도 말씀으로 해결했던 인물인데, 왜 이러한 고백을 할까요?~ 무슨 뜻일까요?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왜 그렇게 말씀을 의지하면서도 하나님하고 더 가까워 지지 않아 방황하고 있다는 고백을 할 수 있을까요?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와 능력, 즉 그 선하심이 너무나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를 하셔야 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하나님께서는 언제나 동일한 고난을 자녀들 각자들에게 허락하시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왜요? 믿음이 늘 자라가야 하기 때문에, 거기에 맞추어서, 신앙의 성장과 자람을 위하여 시험을 하신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고전10:13입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신앙성장을 위한 맞춤으로 인도하여 주신다는 뜻입니다. 무리수를 두지 아니하십니다.그런데 우린 어떤가요? 애당초, 어려워지는 것을 아예 원하지 않고 있습니다. 쉽게 늘 성공적으로 살기를 원하고 있는데, 이것도 우리들의 죄악이 주는 요구요 반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답보상태를 죄라 하십니다. 계속해서 자라가다가 점과 흠이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빌2:14-15입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딤전6:14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흠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벧후3:14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은혜를 입었다면, 끝까지 목적지를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힘들다고 가다가 아니 가면 오히려 가지 않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성도가 그 큰 은혜를 입었으면 그 은혜만으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그런데 그렇지 못하는 이유가, 악함이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악함이 끝이 없다는 것을 모르면, 남을 정죄만 할 줄 알지,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돌이킬 생각을 못합니다.그렇게 되면, 달려야 될 하만의 자리에 자기가 대신 달리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까?
주신 하루의 시간을 믿음의 성장 기회로 여기지 못하고 자기 뜻대로 살았다가는,그 하루의 실패가 쌓여 golden time을 놓치면서하만처럼 돌이킬 수 없는 날이 오고 마는 것입니다.신앙의 하루 실패는 사업실패, 공부실패, 결혼실패, 연구실패 보다도 더 큰 실패인데도, 신앙의 실패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세상의 그 실패들만을 가지고 괴로워하지, 신앙의 실패에 대해서는 관대하더라는 것입니다.
신앙실패보다 세상에서의 실패를 더 두려워한다는 것은 예수의 승리인 부활을 결코 바라지도 믿지도 못했던유대 장로, 바리새인들, 대제사장들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신앙실패보다 세상에서의 실패를 더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삶의 목표는 하만처럼 성공하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신앙실패보다 세상에서의 실패를 더 두려워한다는 것은 하만을 장대에 매달아야 되는 자들이 자신을 장대에 매달지 못하여 안달하는 식과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살아가고 있으니, 오늘 말씀이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주신 말씀인지도 모르고 단지 이스라엘의 역사 정도로만 여기고 맙니다. 구약의 말씀을 단지 이스라엘의 역사 정도로만 여기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아시지요?~나를 살리고 인생의 회복과 승리자가 되게 하는, 살아 있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로 믿어지지 않게 되면, 분별 못하고, 절제할 수 없고, 균형을 잡지 못하여 방황한 제 2의 하만이 될 것입니다.
하만처럼 단지 오늘을 위하여 살다가 장대에 달리 수 있음을 알고 우린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믿음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고, 그 저녁은 아침보다 더 나은 신앙으로 마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그 사람들의 내일은 어떨까요?교만한 하만세력들을 장대에 달아서 부림절의 즐거움을 영원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