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교회

9/5/2021 열왕기상 22:1-53 본문

주일 설교 말씀

9/5/2021 열왕기상 22:1-53

PastorYK 2021. 9. 6. 15:13

말씀: 왕상 22:1-53                             

제목: 저주의 아합과 복의 여호사밧 - 저주는 죄, 복은 은혜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이런 글을 남겼더라고요. ‘미래를 맞는 자는 과거를 상상하고 미래를 기억하라.’ 어떤가요? 참 대단한 의미를 가진 한 마디인데, 무슨 뜻일까요?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상상하라가 맞는 문장인데, 시제를 바꾸었는데도 그 뜻이 통합니다. 건강한 미래는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상상해야 되는데, 그런데 어떤가요? 과거는 과거고 지금만 잘하면 된다고 하는데, 그러다가보니깐, 어떤 일이 생깁니까? 실패한 미래만이 남더라는 것입니다. 우린 부끄러운 과거를 깨끗하게 지어버리려고 하다가보니깐, 미래가 남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즉 부끄러운 과거를 지우다가보니깐 하지 말아야 되는 짓거리를 죽을 때까지 내내 하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과거를 상상할 줄 모르고 미래를 기억할 줄 모르는 자로써, 쉽지 않은 교훈입니다. 오늘의 등장하는 아합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합의 악함을 회복하여 주시려고 한없이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그 모든 은혜 즉 말씀을 무시하므로 그의 미래는 기억하기 싫은 과거만 남는 것을 보면, 어떤 분의 놀라운 그 한 마디가 은혜가 됩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미래를 위하여 과거와 미래를 품은 하나님의 그 말씀을 늘 기억하고 상상하고 있나요? 그렇지 않다면, 아합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과거를 상상하지 않았던 그래서 부끄러운 과거가 미래가 된, 아합을 늘 기억하신다면, 아합의 저주에서 벗어나 여호사밧의 복을 자신이 받고 있다는 것을, 아니 또 영원히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부끄러운 과거를 덮어버리더라는 것입니다. 아합의 전철을 어쩌면 그렇게 마치 쌍둥이처럼 따를 수 있을까요?~ 어쩌면 이렇게 똑같은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들에게도 늘 말씀해 주십니다. 죽음을 준비하라고 하시지만, 그 말씀을 믿고 준비하고 있나요? 준비하지 않고 있다면, 과거를 상상하지 못하는 아합하고 무엇이 다릅니까? 

 

오늘 말씀에서 아합이 전쟁에 나가면 죽을 것이라고 미가야 선지자의 그 경고를 믿었을까요?~ 결코 믿지 않았습니다. 참 선지자 미가야의 경고는 완전하게 외면합니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이 하는 거짓말은 믿고 승리할 것처럼, 당당하게 전쟁터로 나갑니다. 죽지 않을 자처럼 너무나 당당하게 죽으러 가더라는 것입니다. 살리는 경고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아합은 결국 복된 영광스러운 미래를 맞지 못합니다. 다시 부끄러운 과거만 남겼습니다. 감춘 과거, 잊은 과거는 미래가 없습니다. 

 

없다가보니, 예언하신대로 우연히 쏜 적군 화살을 맞고 피를 흘려 죽습니다. 아합이 적군의 화살을 맞고 흘린 피를 예언대로 개들이 핣아 버립니다. 미가야의 경고를 장난으로 여겼는지 몰라도, 이렇게 될 줄은 전혀 예상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이 되고 맙니다. 죽기 전까지는 우습게 여겼는지 몰라도, 목숨이 끊어진 후에, 자기가 얼마나 미련하고 악한 존재였는지 비로소

알았을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땐, 주시는 말씀에 대하여 완전 무시하던 아합은 이렇게 목숨이 끊어지면서, ‘아이고~’하지 않았을까요? 그때 가서, ‘아이고~’ 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이런 아합과 같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가득합니다. 아니 우리 주변이 아니라 우리 모두도 다 아합처럼 말씀을 믿지 못하고 세상을 믿고 있기에, 하나님께서 미가야를 대신하여 드리는 신신당부의 말씀들을 얼마나 믿고, 내일을 상상하고 있나요? ~ 말씀을 듣고 순종하지 않으면, 아합 대신에 자기 이름이 들어갈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슨 방법이 있나요? ~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남 유다 왕 여호사밧처럼 북이스라엘 아합 왕에게 내려가면 될까요? 질문합니다. 

 

왜 당시 최고의 부와 영광을 누리던 여호사밧이 북이스라엘 아합 왕에게로 내려갔을까요? 형제관계이기에 내려갔나요? 조금 후에 말씀을 자세하게 드리기로 하고, 먼저 아합에 대하여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믿지 못하면, 아합의 그 운명을 피할 수 없습니다. 아합의 그 참담한 운명을 해결하는 길은 오직 한 길입니다. 미래와 과거를 품고 있는 진리의 말씀을 떠나면 안 됩니다. 말씀을 떠나면 제 2의 아합이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의지하면당장 승리하고 복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 미가야처럼, 과거와 미래가 연결이 안 되는 힘의 아합으로부터 당하게 됩니다. 고생의 떡과 고생의 물로 어쩌면 평생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미가야를 옥에 가둔 아합은 어떤가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다가, 우연히 쏜 화살에 맞아 부상을 입고 피를 다 흘리고 왕의 마차 위에서 죽는 것을 우린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약에 아합처럼 미래를 기억하지 않는다면, 아합이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들었던 그 소리, 미가야가 전쟁 전에, 아합이 전쟁에 대하여 가야 될지 말아야 될지, 물었을 때, 그때, 들은 하나님의 그 말씀, “군사들은 다 성읍과 본향으로 돌아가라”였는데, 그 말씀 그대로 누군가가 그 명을 내리고 있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아합이, ‘아니 이럴 수가~’ 죽어가면서도 얼마나 놀랐을까요?~ 우린 아직 당해 보지 않아서, 죽어본 경험이 없어서, 아합이 느꼈던 그런 두려움을 제대로 느낄 수가 없겠지만, 그러나 상상은 가능하지 않나요? 미가야에게 똑바로 말을 하라고 해서, 한 그 마지막, 한 마디를, 죽어가면서 똑같이 들었을 때, 어떻게 끔찍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런 경험을 원하는 사람이 있나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떠난 자들의 그 마지막은 가장 큰 두려움 그 이상일 것입니다. 부탁합니다. 말씀을 죽기 살기로 의지하셔야 합니다. 말씀을 떠나면 안 됩니다. 물론 말씀을 의지하면, 선지자 미가야처럼 세상의 세력에게 당합니다. 그래서 무서워 아합 편에 서시려는 분이 계십니까? ~ 아합이 죽어 가면서, 어떤 느낌이었는지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 사람은 천하를 다 준다해도 당연히 거절할 것입니다. 당연히 거절합니다. 

 

동의하시나요? 아멘입니다. 그런데 왜 아합의 길을 따르지 않겠다고 거절한 사람들이 왜 아합을 다시 따르고 있나요? 거절하셨다면, 미가야와 같이 가야 되는데, 나중에 가만히 보니까, 다 아합을 따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아니 또 다른 아합이 되어 더럽고 악한 과거를 열심히 만들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건 아닙니다. 지금 아합이 비웃고 있습니다. 결정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주를 위하여 싸워, 내일을 준비하셔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느 쪽에 서 있나요?~

 

아니면, 이 쪽인가, 저 쪽인가? 하면서 기웃거리고 있나요? 그러나 머뭇거려도 안 됩니다. 머뭇거리다 늙어버리면, 아합의 그 꼴로 끝납니다. 당장 당하더라도, 당장 고생의 떡과 물을 갖고 평생 살지언정 약속의 땅, 미래를 준비해야 합니다. 생명의 샘인 말씀은 말씀을 믿는 자들을 좁은 길로 인도합니다. 주님의 푯대가 성도의 삶의 방향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입은 우리들에게 이렇게 매 주일이면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이 주일에, 초청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자기라는 존재가 어떤 큰 복, 놀라운 복을 받은 자인지, 느끼지 못하고 있다면, 아합이 참 선지자 미가야의 진실된 예언을 듣고서도, 감사하지 못하고 멋대로 살려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이런 아합의 종말을 보고도 실감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 갈 길만을 가려고 한다면, 망할 세상의 분주함으로 낭비는 하면서, 사르밧 과부를 위하여 하루 1불도 만들지 못하고, 아합에 불과했던 자신이 세상의 망할 길에서 완전 벗어나 승리한 자로써, 이겨내고자, 싸워 승리하고자, 미래를 맞고자 하루 하나님과의 2시간정도를 유지해야 되는데, 포기하고 있다면, 자기는 아합과 동일한 인물이요 결국 동일한 결과만을 얻게 되고야 말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참담한 결과를 막아주시려고 어떤 희생과 어떤 고통을 당하여 주신 하나님이십니까? 상상하시고 기억하셔야 합니다. ~ 그렇지 않으면 아합처럼 다시 영원히 돌아오지 못합니다. 어느 쪽에 서시렵니까? 

 

아합입니까? 미가야입니까? 축복의 그리심 산과 저주의 에발 산 중에 선택하셔야 합니다. 중간 산은 없습니다. 아합 자신도 당연히 승리하고 돌아올 것이라고, 아무 일이 없을 것이라고 믿고 큰 소리를 치면서 아람을 치러 갔지만,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괜찮았기에 괜찮을 것이라고 했다가 결국 아합처럼 됩니다. 생명과 복이 아니면 저주와 사망 중에 한 쪽을 선택하셔야 합니다. 

 

두 번째로 드릴 말씀은 부와 권세가 최고였던 여호사밧이 아합 왕에게로 내려간 이유입니다. 오늘 등장하는 남 유다의 4대 왕 여호사밧 그는 누구입니까?  46절에 보면, 우상 신전의 남자 창기들을 쫓아내는 역할도 했었지만 자신의 아들 여호람을 아합의 딸인 아달랴와 혼인하는 결정적인 정략적 불법혼인도 서슴지 않았던 왕입니다. 대하18:1입니다.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이 극하였고 아합으로 더불어 연혼하였더라”

 

여호사밧이 자신의 아들인 여호람과 아합의 딸인 아달랴와 혼인을 하게 됩니다. 먼저 아달랴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아달랴는 바알 숭배자 북이스라엘 7대 왕인 아합과 아합의 아내인 악녀 이세벨의 딸입니다. 아달랴는 남유다 4대 왕인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인 남유다 5대 왕과 결혼하여 왕비가 됩니다. 아달랴는 엄마 이세벨을 닮아 매우 포악하였을 뿐만 아니라 남 유다의 5대 왕인 남편 여호람과 남 유다의 6대 왕인 아들들 중의 막내인 아하시야까지도 제멋대로 움직인 아내요 엄마였습니다. 왕하8:16-18에서 말씀을 봅니다.

 

8:16 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들 요람 제오년에 여호사밧이 유다의 왕이었을 때에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이 왕이 되니라

8:17 여호람이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삼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팔 년 동안 통치하니라

8:18 그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가서 아합의 집과 같이 하였으니 이는 아합의 딸이 그의 아내가 되었음이라 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나

 

남편 여호람 뿐만이 아니라 아들 아하시야까지도 이세벨의 영향을 입어 바알을 믿게 되었고 그리고 권력도 제멋대로 휘둘렀던 것을 대하22:1-3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22:1 예루살렘 주민이 여호람의 막내 아들 아하시야에게 왕위를 계승하게 하였으니 이는 전에 아라비아 사람들과 함께 와서 진을 치던 부대가 그의 모든 형들을 죽였음이라 그러므로 유다 왕 여호람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더라

22:2 아하시야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사십이 세라 예루살렘에서 일 년 동안 다스리니라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아달랴요 오므리의 손녀더라

22:3 아하시야도 아합의 집 길로 행하였으니 이는 그의 어머니가 꾀어 악을 행하게 하였음이라

 

그 모든 남 유다의 두 왕들의 악한 일들은 다 이세벨의 딸, 아달랴의 사주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아달랴는 참으로 악의 근본이요 뿌리요 제거될 왕비요 태후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결혼은 남 유다 왕 여호사밧의 인간적인 판단과 기준으로써 남 유다의 군사적 필요성 때문에 한 결혼이었습니다. 아합과 동맹을 맺어서 군사력을 굳건히 하여 당시 북쪽에서 세력을 크게 확장하고 있는 앗시리아의 세력을 견제하려는 차원에서 내린 혼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이 누구입니까? 

 

믿음의 왕임을 대하17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1-6절입니다.

 

17:1 아사의 아들 여호사밧이 대신하여 왕이 되어 스스로 강하게 하여 이스라엘을 방어하되

17:2 유다 모든 견고한 성읍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또 유다 땅과 그의 아버지 아사가 정복한 에브라임 성읍들에 영문을 두었더라

17:3 여호와께서 여호사밧과 함께 하셨으니 이는 그가 그의 조상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여 바알들에게 구하지 아니하고

17:4 오직 그의 아버지의 하나님께 구하며 그의 계명을 행하고 이스라엘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였음이라

17:5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나라를 그의 손에서 견고하게 하시매 유다 무리가 여호사밧에게 예물을 드렸으므로 그가 부귀와 영광을 크게 떨쳤더라

17:6 그가 전심으로 여호와의 길을 걸어 산당들과 아세라 목상들도 유다에서 제거하였더라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사밧은 그것으로도 부족하다는 인간적인 판단을 내린 것이, 근처도 가서는 아니 되는 아합의 딸 악녀 아댤랴와 결혼을 성취하여 남 유다의 군사력을 보충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만으로 부족하다고 하여 아합과 동맹을 맺은 것입니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인간적인 판단입니다. 그런데, 왕상22:48의 말씀도 보세요!

 

“여호사밧이 다시스의 선박을 제조하고 오빌로 금을 구하러 보내려 하였더니 그 배가 에시온게벨에서 파선하였으므로 가지 못하게 되매” 

 

여호사밧이 부귀와 영광이 극에 달하였는데도, 이렇게 더, 더, 더 합니다. 경제적으로도 넘쳤지만, 부를 더 원하여 금을 들어오려고 배를 건조까지 합니다. 아합의 길을 따르고 있습니다. 과거를 상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합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미래를 기억하지 못하는 여호사밧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아람과 전쟁에서도 죽지 않았다는 점과 금을 위한 선박 제조를 파선하여 방해한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왜 아합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고 점점 나빠지는 여호사밧은 끝까지 보살핌을 받고 있습니까?~ 특히 남 유다의 4대왕인 여호사밧이 바알만 믿는 완전 타락한 아합 집안과의 혼인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를 아십니까? 그 혼인에 대하여 잠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귀와 영광이 극에 달하였던 여호사밧으로써 우상에 빠진 아합의 딸 아달랴와 이룬, 정략결혼은, 하나님의 나라의 남 유다의 왕으로써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결혼입니다. 

 

원래 정략적 결혼이란 자신의 부족함을 막으려고 하는 결혼입니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부귀와 영광이 극하였던 믿음의 왕이었는데, 왜? 그런 잘못된 결혼을 하게 되었는지 의아(疑訝)하다는 말씀입니다. 분명 잘못된 결혼이었기에 남 유다에 우상을 가져온 것뿐만이 아니라 또 다른 어떤 무시무시한 결과를 가져왔는지 봅니다. 왕하11:1을 보세요! 

 

“아하시야의 모친 아달랴가 그 아들의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왕의 씨를 진멸하였으나”

 

왕의 씨 즉 아달랴의 아들인 아하시야의 아들들이니까, 아달랴의 친손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친손자들을 다 죽인 것입니다. 왜요? 왕하9:1-10입니다. 

 

9:1 선지자 엘리사가 선지자의 제자 중 하나를 불러 이르되 너는 허리를 동이고 이 기름병을 손에 가지고 길르앗 라못으로 가라

9:2 거기에 이르거든 님시의 손자 여호사밧의 아들 예후를 찾아 들어가서 그의 형제 중에서 일어나게 하고 그를 데리고 골방으로 들어가

9:3 기름병을 가지고 그의 머리에 부으며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노라 하셨느니라 하고 곧 문을 열고 도망하되 지체하지 말지니라 하니

9:4 그 청년 곧 그 선지자의 청년이 길르앗 라못으로 가니라

9:5 그가 이르러 보니 군대 장관들이 앉아 있는지라 소년이 이르되 장관이여 내가 당신에게 할 말이 있나이다 예후가 이르되 우리 모든 사람 중에 누구에게 하려느냐 하니 이르되 장관이여 당신에게니이다 하는지라

9:6 예후가 일어나 집으로 들어가니 청년이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며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여호와의 백성 곧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노니

9:7 너는 네 주 아합의 집을 치라 내가 나의 종 곧 선지자들의 피와 여호와의 종들의 피를 이세벨에게 갚아 주리라

9:8 아합의 온 집이 멸망하리니 이스라엘 중에 매인 자나 놓인 자나 아합에게 속한 모든 남자는 내가 다 멸절하되

9:9 아합의 집을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과 같게 하며 또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과 같게 할지라

9:10 이스르엘 지방에서 개들이 이세벨을 먹으리니 그를 장사할 사람이 없으리라 하셨느니라 하고 곧 문을 열고 도망하니라

 

예후가 왕이 되기 전에 이미 선지자 엘리사를 통하여 바알을 믿는 자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죽이라는 하나님의 명을 받았습니다. 결국 남 유다의 왕 여호사밧의 손자인 아하시야가 어미 아달랴의 영향으로 바알을 믿게 되면서 결국 예후에게 죽습니다. 왕하9:27-28에서 말씀합니다.

 

9:27 유다의 왕 아하시야가 이를 보고 정원의 정자 길로 도망하니 예후가 그 뒤를 쫓아가며 이르되 그도 병거 가운데서 죽이라 하매 이블르암 가까운 구르 비탈에서 치니 그가 므깃도까지 도망하여 거기서 죽은지라

9:28 그의 신복들이 그를 병거에 싣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다윗 성에서 그들의 조상들과 함께 그의 묘실에 장사하니라

 

아달랴의 친손자인 아하시야도 바알을 믿으므로써 예후의 손에 죽자, 아달랴는 자신의 아들 아하시야가 죽음을 당하자, 어떤 판단을 하게 되었는가 하면, 자신이 남 유다의 왕비요 태후로써 권력을 끝까지 유지하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려면, 결국 왕의 혈육인 친손자까지도 다 죽이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왕하11:1입니다. “아하시야의 어머니 아달랴가 그의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 일어나 왕의 자손을 모두 멸절하였으나” 이 원인 제공자가 바로 여호사밧 왕입니다. 한 사람의 인간적인 선택이 이런 지경으로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여호사밧은 끝까지 보호하여 주시고 아합은 버림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왕하8:19입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종 다윗을 위하여 유다 멸하기를 즐겨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에게 항상 등불을 주겠다고 말씀하셨음이더라” 

 

결국 여호사밧은 택함을 받은 자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다윗의 축복이 이어지는 한 왕으로 남아 있게 되었지만 그러나 힘으로 북이스라엘의 6대왕이 된 오므리는 자신의 아들 아합을 7대왕으로 세웁니다. 그리고 바알을 숭배하던 아합은 최악의 왕으로 남습니다. 왕으로써 온갖 만행을 저지르던 아합은 결국 버려지는데, 신학적으로 말씀을 드린다면 이미 만세 전에 버림을 받았던 자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합이나 여호사밧이나 다 죄를 지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론적으로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대조는 이후에도 거듭해서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북이스라엘은 왕조 자체가 반란과 모반(謀叛)으로 계속 바뀌면서 멸망 당하는 시기에는 민족적 존재까지도 거의 소멸하게 됩니다. 왕하17:24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와 야와와 하맛과 스발와임에서 사람을 옮겨다가 이스라엘 자손을 대신하여 사마리아 여러 성읍에 두매 그들이 사마리아를 차지하고 그 여러 성읍에 거주하니라

 

그러나 남 유다의 경우에는 왕조가 바뀐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물론 우상과 타락으로 남 유다도 주전 587년에 바벨론에 멸망을 당하지만 70년 바벨론 포로 이후에도 남 유다는 뚜렷한 민족적 존재를 유지하면서 회복이 됩니다. 똑같이 타락하였지만 그래서 멸망을 당했지만 남 유다는 결국 70년 만에 회복됩니다. 그 회복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다윗과의 그 언약을 잊지 아니하셨고 이 언약 때문에 끝까지 남 유다를 지켜주십니다. 시78:67-72입니다. 

 

78:67 또 요셉의 장막을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78:68 오직 유다 지파와 그가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며

78:69 그의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도다

78:70 또 그의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78:71 젖 양을 지키는 중에서 그들을 이끌어 내사 그의 백성인 야곱, 그의 소유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78:72 이에 그가 그들을 자기 마음의 완전함으로 기르고 그의 손의 능숙함으로 그들을 지도하였도다

 

unconditional love,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남 유다의 회복의 원인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행위로 구원이 좌지우지 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정말 죽이고 싶은 원리이겠지만, 그러나 어쩔 수가 없습니다. 

 

결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구원을 받은 성도는 더 이상 멸망을 당하였던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어져 가야 할 것입니다. 아합과 같은, 인본주의자들은 자기의 뜻을 이루려고 변장을 하고 형제의 동맹을 맺어도 심지어 가지 말라고 이야기를 정확하게 알려 주어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든 노력이 얼마나 헛된 일인지를 알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실패와 죄악으로 넘어지는 것 같아도 결국은 회복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여호사밧을 통하여 오늘도 또 말씀하십니다. 신앙의 능력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고 방언, 예언을 하고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 사랑이 힘이 되어서 보이는 세상의 것으로 흔들리지 않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면서 능력입니다.

 

병 들어도, 가난해도, 당해도, 배고파도, 억울해도, 전혀 알아주지 않아도, 감사하고 기뻐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합과 여호사밧같은 같은 우리들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하나님과 연합 되는데 있지, 세상의 건강, 출세, 형통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원할 뿐입니다. 그래서 하시는 말씀은 인간적인 방법, 원리, 뜻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거나 다가오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합처럼 인간적인 방법, 원리, 목적이 모든 것이 되면, 선한 그 무엇을 한다고 해도, 진실을 듣지도 보지도 못하고 있기에 실패만이 남습니다. 물론 언제나 거짓이 진리보다 늘 우세하게 보인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이길 것 같았던 악의 세력이 율법으로 넘어지고 맙니다. 버려지고 맙니다. 잠16:9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자기 마음대로 살지 마세요!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말씀을 모르는 그래서 은혜를 외면한 채, 살아가는 자들을 보세요! 

 

자기의 잘못과 허물에 대하여 우기기에 바쁘지만, 은혜를 의지하는 성도들은 자기의 잘못을 가지고 성장케 하고 감사의 삶을 이루어가게 되면서 하나님만을 높이더라는 것입니다. 어디를 보아도 우길 줄만 아는 무지한 자들하고는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왜 은혜를 입고서도 망하고 마는 세상의 세력들을 따르지 못해 안달 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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