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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돌교회
8/29/2021 열왕기상 21:1-29 본문
말씀: 왕상 21:1-29
제목: 아합에게도 끝까지 베푸시는 자비
어떻게 해서라도 승리케 하시려는 하나님이신데,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나?
지난 주일저녁부터 오늘 말씀 때문에 고민하고 앓은 생각을 하면, 아찔합니다. 그냥 죽여주세요! 이렇게 망망하게 두시려면 이젠 다른 종을 보내주세요~라고까지 기도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때가 아니라면 지금까지 도와주셨듯이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죽을 때까지 포기하거나 낙심하고 싶지 않습니다. 끝까지 이 복된 사명을 감당할 수 있도록 무엇보다도 이 말씀을 제대로 전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지난 주, 수요일 저녁 늦은 시간까지는 말씀이 풀리지 않자, 숨이 턱 막혀서, 그 답답함이 커, 죽었으면 오히려 낫겠다는 생각까지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고민하다가 수요일 늦은 밤에 잠자리에 들었는데, 목요일 새벽에 꿈에서 전할 내용을 주셨습니다. 벌떡 일어나 시계를 보니 새벽 4시경이었습니다.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open하고, 까먹지 않으려고, 잊으면 안 되니까, 후다닥 그 틀만 타이핑하고 나니, 얼마나 좋았는지, 그 기쁨은 표현이 안 됩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행복 감사 그 이상입니다. 풀리면 그런 행복과 감사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말씀이 풀리지 않아서 가장 힘들어 할 때, 응답을 받는 순간이 오면, 그때 가장 큰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하여튼 ~ 그날 새벽에 받은 말씀을 선포합니다.
물론 다 아는 말씀이요 내용입니다. 전혀 들어 보지도 못한 그런 기상천외한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단지 제가 그렇게 이 말씀 때문에 고민하던 중에 새벽에 저에게 주신 말씀이기에 기쁜 마음으로 준비했다는데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오늘 말씀 때문에 진실 되고 복의 근원이 되고 지혜와 인자하심이 넘치는 하나님 아버지의 총명한 바보들이 되어 주세요! 아멘!~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여러분들은 그분을 얼마나 잘 알고 계십니까? 오늘은 악질 중의 악질인 아합을 통하여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특히 하이에나에 불과한 아니 그 짐승보다 못한 아합이란 존재가 다른 왕에 비하여 다윗도 아니고 솔로몬도 아닌 자를 얼마나 많이 등장시키고 있는지 아십니까? 왜 그가 이스라엘의 역사의 마치 주인공인 것처럼 많이 나오는지 생각해 보셨나요? 오늘도 이런 점들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우린 아합에 대하여 잘 살펴야 할 것입니다. 아합 왕이란 자가 누구입니까? 특히 오늘 말씀을 보면, 아니 이 놈도 왕이라고, 하는 짓이 한심하여 절로 화가 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아닌가요?~ 정말 참을 수가 없게 합니다.
농부 나봇이란 자의 포도원을 갖지 못하여, 근심하므로 죽게 만든 이 아합은 인간 망종입니다. 아니 망종도 되지 못한 쓰레기 왕입니다. 티끌로 태어나 티끌로 돌아가도 전혀 아쉬워할 것이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아니 지옥 불속으로 푹 빠져서 영원히 타 영원히 고통을 당해도 시원치 않는 존재입니다. 지옥이 없었으면 이 놈의 이 악함 때문에 너무나 아쉬워할 뻔 했단 말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공감이 되나요?~ 결국 하나님께서도 두고 보시다가, 하시는 말씀을 보면, 무섭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을 갖기 위하여 나봇을 고의로 죽인 이 사건으로 하나님께서는 아합, 이 놈에게 내린 저주를 보세요! 그리고 내린 저주가 실제가 되어 버립니다. 왕상21:17-19입니다.
21:17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21:18 너는 일어나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의 아합 왕을 만나라 그가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나니
21:19 너는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고 하셨다 하고 또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였다 하라
전쟁에 나가 흘린 그의 피를 개들이 핥아 어떻게 처참하게 죽을 것을 하나님의 예언대로 저주가 현실이 됩니다. 왕상22장에서 확인이 됩니다. 35-38절의 말씀을 봅니다.
22:35 이 날에 전쟁이 맹렬하였으므로 왕이 병거 가운데에 붙들려 서서 아람 사람을 막다가 저녁에 이르러 죽었는데 상처의 피가 흘러 병거 바닥에 고였더라
22:36 해가 질 녁에 진중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어 이르되 각기 성읍으로 또는 각기 본향으로 가라 하더라
22:37 왕이 이미 죽으매 그의 시체를 메어 사마리아에 이르러 왕을 사마리아에 장사하니라
22:38 그 병거를 사마리아 못에서 씻으매 개들이 그의 피를 핥았으니 여호와께서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 거기는 창기들이 목욕하는 곳이었더라
결국 무서운 저주대로 아합은 전쟁 중에 심판을 받고 피를 흘렸는데, 개들이 핣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합이 누구입니까?
놀랍게도 바로 옛 나하고 무엇이 다르던가요? 야비하고 썩은 세상의 것들을 물불을 가리지 않았고 더럽고 썩은 고기를 좋아하는 하이에나와 전혀 다르지 않은, 그 존재가 바로 나이지, 않았나요? ~ 그런데 우린 지금 어디에 와 있나요? 아합처럼 버려져 죽어 지옥에 가서 통곡하고 있나요? 버려져서 하이에나처럼 조롱과 조소를 받으면서 참담하게 살아가고 있나요? 다 아니잖아요! 잘 먹고 잘 입고 잘 자고 잘 배우고 온갖 대접을 부족함이 없이 받으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자가 되어 이렇게 오늘도 하나님의 교회로 인도함을 받아, 아합과 전혀 다르지 않았던 그런 나를 살려 주신 그분에게 감사예배, 찬양예배를 드리고 있더라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기적과 은혜가 또 어디 있을까요?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언제나 놓쳐서는 안 되는 결정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자기는 이런 야비하고 썩은 고기를 좋아하는 하이에나와 같은, 아니 그보다도 더 못한 자임에도 불구하고, 아합하고 차원이 다른 존재로 착각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결국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맙니다.
아합이 이렇게 저주를 왜 받는지 아십니까? 자기는 괜찮은 존재로 여기고 있다는 착각 때문입니다. 왕상18:15-19입니다.
18:15 엘리야가 이르되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오늘 아합에게 보이리라
18:16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그에게 말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가다가
18:17 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18:18 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18:19 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
누가 누구에게 흉을 잡고 있나요? 감히 하나님을 배반하고 죽은 신 바알을 믿는 그래서 나봇의 포도원까지 가지려고 사람을 죽이고 마는 악한들이 하나님의 종 엘리야를 향하여,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만을 보더라도 자기는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밝히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것만을 보더라도 아합이 어떤 인물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왕상20:26-34입니다.
20:26 해가 바뀌니 벤하닷이 아람 사람을 소집하고 아벡으로 올라와서 이스라엘과 싸우려 하매
20:27 이스라엘 자손도 소집되어 군량을 받고 마주 나가서 그들 앞에 진영을 치니 이스라엘 자손은 두 무리의 적은 염소 와 같고 아람 사람은 그 땅에 가득하였더라
20:28 그 때에 하나님의 사람이 이스라엘 왕에게 나아와 말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아람 사람이 말하기를 여호와는 산의 신이요 골짜기의 신은 아니라 하는도다 그러므로 내가 이 큰 군대를 다 네 손에 넘기리니 너희는 내가 여호와인 줄을 알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20:29 진영이 서로 대치한 지 칠 일이라 일곱째 날에 접전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하루에 아람 보병 십만 명을 죽이매
20:30 그 남은 자는 아벡으로 도망하여 성읍으로 들어갔더니 그 성벽이 그 남은 자 이만 칠천 명 위에 무너지고 벤하닷은 도망하여 성읍에 이르러 골방으로 들어가니라
20:31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말하되 우리가 들은즉 이스라엘 집의 왕들은 인자한 왕이라 하니 만일 우리가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테두리를 머리에 쓰고 이스라엘의 왕에게로 나아가면 그가 혹시 왕의 생명을 살리리이다 하고
20:32 그들이 굵은 베로 허리를 동이고 테두리를 머리에 쓰고 이스라엘의 왕에게 이르러 이르되 왕의 종 벤하닷이 청하기를 내 생명을 살려 주옵소서 하더이다 아합이 이르되 그가 아직도 살아 있느냐 그는 내 형제이니라
20:33 그 사람들이 좋은 징조로 여기고 그 말을 얼른 받아 대답하여 이르되 벤하닷은 왕의 형제니이다 왕이 이르되 너희는 가서 그를 인도하여 오라 벤하닷이 이에 왕에게 나아오니 왕이 그를 병거에 올린지라
20:34 벤하닷이 왕께 아뢰되 내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버지에게서 빼앗은 모든 성읍을 내가 돌려보내리이다 또 내 아버지께서 사마리아에서 만든 것 같이 당신도 다메섹에서 당신을 위하여 거리를 만드소서 아합이 이르되 내가 이 조약으로 인해 당신을 놓으리라 하고 이에 더불어 조약을 맺고 그를 놓았더라
패한 벤하닷이 두려워 숨어 있다가 살길을 찾으려고, 아합 왕을 향하여 당신은 인자한 자라고 올려주니깐, 자기가 인자한 그런 존재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는지, 아닌 인정하고 있었기에, 인정해 주는 벤하닷을 향하여 형제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니지 않습니까? 아합이 인자한 자라고 할 수 있나요? 아무도 동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조차 “선한 선생님이시여~”라고 하자,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하시던가요? 막10:17-18입니다.
“예수께서 길에 나가실새 한 사람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묻자오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선한 분은 자기가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이심을 밝혔던 것을 늘 기억하고 있으셔야 합니다. 그런데 감히 자기가 인자한 자인 것처럼 행세를 하는 아합을 보면, 자기를 올려 주니깐 너무나 좋아하는 그런 아합을 보면, 지금 우리들 하고 무엇이 다릅니까?
잘 모르는 사람들이 와서 달콤한 말로 옆구리를 살살 긁어 주면, 좋아하는 우리들하고 무엇이 다릅니까? 선악을 떠나서 무조건 자기편을 들어 주면 좋아하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아합이요 우리들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길을 가자고 하니깐, 가기 싫다고 하면서 온갖 핑계를 다 갖다 대면서, 해서는 안 되는 짓을 멋대로 하던, 아합하고 우리들이 무엇이 다르단 말입니까? 우리는 돈과 힘이 없어서 그렇지, 아합 왕처럼 만약에 힘과 재물을 갖고 있다면 아합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할 자들이 아닌 것을 인정하시나요?~인정하기 싫은 표정인데, 스스로 잘 생각해 보세요!
아니 누구처럼 드러낼 힘과 마음대로 쓸 돈이 있나요? 없잖아요~ 없는데도 마음대로 하고 있다면, 아합보다 낫다고 할 수 있나요?~아닙니다. 우리들도 아합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들에게서 거의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다 갖고 있는 그래서 모르고 있다고 해야 맞는, 심각한 문제점 한 가지를 더 봅니다. 지금 우리 주변은 삶의 수준이 빈익빈, 부익부로 점점 나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우리의 삶의 수준은 전혀 모자람이 없는 상황이지만, 전혀 만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자연스럽게 아합 왕처럼 더, 더, 더 가지려고 하던가요? 그런 자신을 보고 기겁이라도 하셨다면 다행인데, 어떤가요?~ 지금의 수준이 만족하지 못하여 더 가지려는 것은 아합처럼 힘없는 자들의 것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갈취하는 자신이라는 것을 알기는 아시는 것입니까? 우리가 아합보다 나은 점이 무엇입니까? 나은 점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참 미운 짓을 악한 짓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태연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합만이 아니라 우리도 상종 못할 얼마나 비열하고 비겁하고 이기적인 존재들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왕상21:17-29의 말씀을 보세요!
21:17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21:18 너는 일어나 내려가서 사마리아에 있는 이스라엘의 아합 왕을 만나라 그가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러 그리로 내려갔나니
21:19 너는 그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죽이고 또 빼앗았느냐고 하셨다 하고 또 그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개들이 나봇의 피를 핥은 곳에서 개들이 네 피 곧 네 몸의 피도 핥으리라 하였다 하라
21:20 아합이 엘리야에게 이르되 내 대적자여 네가 나를 찾았느냐 대답하되 내가 찾았노라 네가 네 자신을 팔아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21:21 여호와 말씀이 내가 재앙을 네게 내려 너를 쓸어버리되 네게 속한 남자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매인 자나 놓인 자를 다 멸할 것이요
21:22 또 네 집이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집처럼 되게 하고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의 집처럼 되게 하리니 이는 네가 나를 노하게 하고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까닭이니라 하셨고
21:23 이세벨에게 대하여도 여호와께서 말씀하여 이르시되 개들이 이스르엘 성읍 곁에서 이세벨을 먹을지라
21:24 아합에게 속한 자로서 성읍에서 죽은 자는 개들이 먹고 들에서 죽은 자는 공중의 새가 먹으리라고 하셨느니라 하니
21:25 예로부터 아합과 같이 그 자신을 팔아 여호와 앞에서 악을 행한 자가 없음은 그를 그의 아내 이세벨이 충동하였음이라
21:26 그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아모리 사람의 모든 행함 같이 우상에게 복종하여 심히 가증하게 행하였더라
21:27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
21:28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21:29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내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아합 왕이 경고와 저주의 말씀을 듣고 나서 회개, 한 번하였는데, 또 그럴 줄 하나님이 모르셨을까요? 아셨지만, 그러나 아합을 또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회를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죽이시려는 하나님이 아니라, 살리지 못하여 안달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사실 아합 왕의 그간의 행실을 보면, 두고 볼일이 아닐 것입니다.
서로를 위하여 가차 없이 심판해야 맞습니다. 지금까지 아합은 이미 죽어도 몇 번 죽어야 했고 죽어도 그 누구하나 자신의 가족을 빼놓고는 거의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갈멜 산에서 하나님이 진정하신 신이심을 엘리야를 통하여 확실하게 보여주셨고, 수년의 가뭄까지도 그날, 해결하여 주시면서 그리고 그것도 부족하여 벤하닷과의 전쟁에서 적은 인원으로 수많은 적 대군을 단번에 멸하여 주시면서 대승으로까지 올려주시고 세워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에, 아합 왕이 다시는 바알과 아세라 신이 아니라 회개하고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봇의 포도원을 빼앗는 것을 보시면서, 이젠 아니 되겠다 하여, 엘리야를 다시 보내 저주로 무서운 경고를 하십니다. 이 경고의 목적은 심판이 아닙니다. 돌이키라는 하나님의 마음이십니다. 왜냐하면 왕상21:27-29의 말씀만을 보더라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봅니다.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의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또 풀이 죽어 다니더라, 여호와의 말씀이 디셉 사람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아합이 내 앞에서 겸비함을 네가 보느냐 그가 네 앞에서 겸비하므로 내가 재앙을 저의 시대에는 내리지 아니하고 그 아들의 시대에야 그의 집에 재앙을 내리리라 하셨더라”
이런 아합같은 자들에게도 늘 관심을 가지고 두고 보시면서 이런 놀라운 기회를 결국, 끝까지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회개를 하여 순종을 할까, 이 점에만 집중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특히 아합에 대한 이야기가 한두 줄이 아니라 왕상17장부터 22장까지 자그만치 6장에 걸쳐서 적지 않게 나옵니다. 그가 무엇이 잘났다고 하여 이렇게 길게 등장케 하시는지 아시나요? 그가 얼마나 악하고 미련한 존재인지를 아주 정확하게 드러내 주시면서 그러나 그 반대로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에게도 어떤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지를 보여주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얼마나 내내 참고 인내하시면서 구원을 이루어주시려는 인내하시는 하나님이신지를 알 수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멋대로 할지라도 그 즉시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아합을 보면서 생각나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12:20입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기를 심판하여 이길 때까지 하리니”
어떻게 해서라도 승리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떤 생각을 하던가요? 두 가지로 말씀을 드리면,
(1)나는 아합과 다른 자라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를 괜찮은 자로 위장해 버리고 말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근본적인 실태를 보면 하나님께서 아합 왕에게 기회를 주신 것처럼, 더 주시면 주셨지, 덜 주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회개하여 합당한 자로 살아가고 있나요? 아니면 얼마나 많은 죄를 저지르면서 두려움 없이, 아합처럼 살아가고 있나요? 우리들의 생각, 하나, 하나, 행동 하나, 하나가 그대로 노출된다면, 과연 어떨꺼라고 생각하십니까? 노출되는 순간 우리 주변은 쑥대밭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핵폭탄 떨어져서 30년간을 쓸 수 없게 된 그 주변보다 더 황폐해 져서 영원히 쓸모없는 땅이 되고 말 것입니다.
(2)한없이 자비하신 하나님에 대한 이런 말씀을 드리면, ‘회개가 아니라, 아하! ~ 약간만 해도 인정을 받겠구나!’ 이런 안일무사한 고약하고 얕은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아합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럴수록 자신을 강하게 통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비하신 하나님을 드러내주시는 것은 멋대로 하라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이렇게까지 자비를 베풀어주시니, 아합과 같은 자신을 은혜의 줄로 완전 묶어, 끝까지 구원을 이루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력한 조치를 스스로 취하라는 것으로 이해를 하셔야 맞습니다. 그것이 합당한 믿음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꾸 미련하고 악한 자기 식으로 자기를 끌고 가면 안 됩니다.
믿음은 언제나 책임이라는 조건이 따르는데, 성도의 책임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영광이요 자랑이요 복이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잊으면 또 아합처럼 더 가지려고 하면서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게 되고 말 것입니다. 성도로써 주님의 것으로써, 주님의 뜻을 전심으로 찾고 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지금 자기의 발걸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나요? 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수고하고 있나요? 무엇 때문에 일희일비하고 있나요? ~
이 모든 질문에 대하여 그대로 지금 100% 노출을 시켜버리신다면, 그 누구도 아합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자기의 지금까지의 삶을 그대로 노출해도 상관없다는 분이 있다면 자신 있게 손을 들어 보세요! 아마도 싹~다 노출이 된다면 끔찍할 것입니다. 다시는 근처에도 가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우리들이 어떻게 아합을 향하여 조롱과 조소를 보낼 수 있고, 자기가 아합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다고 착각할 수 있을까요? ~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얼마나 나의 악한 행실을 보시면서 늘 참아주셨는지, 감이 잡히기는 하십니까? 아니 지금까지도 눈감아 주신 것도 부족하여, 얼마나 더 도와주시고 베풀어 주시고 지켜주셔야지만, 비로소, 회개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고 의지하면서 주님의 뜻을 따라가시려고 하십니까? 벌써 추수할 때가 되었는데, 지금 어떤 열매를 맺었나요? 아무 열매가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닌가요? 잎은 무성한대, 열매가 없는 것을 보시고 나서는 어떤 말씀을 하셨는지 기억이 나십니까?
막11:12-14, 20-21입니다.
11: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1: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1: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11:20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11: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그리고 눅13:6-9의 말씀도 보세요!
13:6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13:7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13:8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13:9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잎만 풍성하고 열매가 없으면 영원히 저주를 받거나 찍혀 뽑혀버리고 맙니다. 심판 날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끝도 아주 마지막 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이 돌아오기를 원하시기에 심판을 연기하셨던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구원하시려고 애쓰시는 하나님이신데, 이 기회를 놓치시렵니까? 이제 아주 조금 남은 우리의 시간일진데, 그간 하고 싶은 대로 살던 부끄럽고 헛된 옛 삶에서 철저하게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시던 일을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하던 공부도 하지 말라는 것도 아닙니다. 하시던 운동도 하시고 즐기던 게임도 하시되, 그러나 하루의 시간의 균형, 절제, 분별로 깎을 곳은 깎고 좀 덜 시간을 사용하시면서, 최소한 하루에 두 시간 정도는 하나님하고 만나보자는 것입니다. 하루 한 시간은 기도로 그리고 한 시간은 말씀을 마음 판에 새겨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쓰시는 생활비에서도 하루에 어느 정도 저축이 가능할까요? 버리고 낭비하고 덜 쓸 수 있는 그 어떤 것들을 자세하게 찾아보시면, 확신합니다. 하루에 1불 정도는 따로 뽑아낼 수 있지 않나요? 그렇게 해서 한 달에 모은 30불은 가난한 이웃들에게 자기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보내드린다면, 시돈 사르밧 과부와 같은 이웃들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르시나요? 이런 계획과 결단으로 무엇인가 조금씩, 삶의 가치를 이루어갈 생각도 없으면서,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누가 인정할까요? 하나님께서 인정하실 것이라고 여기십니까? 꿈도 꾸지 마세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상상할 수 없는 은혜를 입은 자들일진대, 받은 은혜에 대하여 너무나 당연시 하여 저주와 사망이 주관하는 넓은 길에서, 마냥 즐거워하고 있으면서도 괴롭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면 이런 재앙과 저주는 없습니다. 동의하지 않습니까? 아멘이어야 합니다. 책임이 없는 믿음은 없습니다. 성도의 책임은 곧 믿음에서 가능케 하기에, 책임을 감당하는 성도된 우리들의 현실은 예전과 달라도, 큰 면에서가 아니라 아주 작은 점에서부터 달라져야 합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특징이요 가치입니다. 기독교는 힘의 종교가 아닌 약한 자로써 약한 자들을 위한 믿음입니다. 그것을 알고 가난한 자들 편에서 가난함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그 신비함으로 들어가는 놀라운 시작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까? 기독교는 의인을 위한 종교가 아닌 죄인을 위한 삶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면, 자기는 이미 아합과 동행하고 있다는 것을 속히 눈치를 채시고 속히 돌이키세요! 정신을 차리시고 큰 힘을 소유하려는 자신에서 작은 자로 가능한 빨리 돌이켜, 가난한 이웃의 격려와 위로와 따뜻한 마음으로 돌아가서 섬기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성도로써 힘없는 시돈 사르밧 과부와 같은 이웃들을 위하여 수고를 하고, 힘 것 절약하여 나누면서 또는 대신 굶고 절망의 내일을 피할 수 없게 되는 자신에 대한 가치를 믿음을 가지고 기뻐하고 감사를 해야 하는데, 그것이 기독교의 믿음이요 신앙이요 주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감사를 갖지 못하면, 우리들은 나봇처럼 왕 아합의 막강한 그 요구에 대하여 맞설 수 없게 됩니다. 사르밧 과부처럼 마지막 양식을 포기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감사의 삶을 감당해 나가야지만 되는 우리들인데, 우린 그런 상황이 너무나 괴롭고 힘들어서 육신이 너무나 연약하여 감사까지는 할 수가 없어서, “하나님 아버지~너무나 죄송합니다” 라고 하면서도 포기하지 말고, 사르밧 과부처럼 끝장나는 그런 드림과 섬김이 아니니깐, 그 작은 조금이라도 떼어낼 수만 있다면, 그래서 사르밧 과부에게 나누게 된다면, 그 마음을 이미 다 보시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실까요? “그래 내가 알지~ 너의 그 따뜻한 마음을 기억하고 있단다!” 이런 칭찬을 하시지 않으실까요?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린 그 칭찬을 듣기 위하여, 우리 함께 쉽지 않지만 힘겨운 선택을 하시지 않으시렵니까? 이런 어려운 선택이야말로 그것이 종말론적인 삶이 아닐까요? 그것이 바로 기름을 준비하는 슬기로운 5처녀에 속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
그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수많은 사르밧 과부와 같은 이웃들에 대하여서는 관심과 배려도 없이, 자기들만 먹고 쓰고 즐기고 남아서 낭비하는 것도 모르고 아합처럼 살고 있는데, 어느 날, 별안간 주님께서 천사장들과 심판의 주로 오시거나, 아니면 누구누구야! 너는 여기까지야! 하시면서 별안간 나의 목숨을 거둬 버리신다면, 열매 없이, 빈손으로 나갈 것이 뻔한데, 그럼 어떻게 될까요?~ 말라버린 무화과나무 꼴이 되고 맙니다. 아합의 그 무서운 저주가 열매 없이 죽은 자들에게 돌아올텐데, 이런 저주는 살아있을 때, 철저하게 대비해 두어야 되지 않을까요?
여러분! 이제 종말입니다. 마지막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부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주 작은 마음까지도 얼마나 기쁘게 여기시고 계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아신다면, 남는 것이 아닌, 아주 빠듯한 가운데에서도, 아주 조금씩이라도 준비하여 나눈다면, 그 드림은 누군가에게 우리들의 그 작은 마음이 그들의 큰 고통인 굶음과 추위에서 벗어날 수 있는 힘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빌려드리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잠14:31, 19:17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우리의 작은 마음이 이렇게 귀합니다. 참 신앙은 큰마음이 아니라 작은 마음에서 이루어지기에, 작은 마음을 칭찬합니다. 신앙의 완성은 지배하는 큰 힘이 아니라 지배당할 줄 아는 작은 힘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신비요 가치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이 연합이 되지 않고 싸우고 다투고 아니 그런 세상을 보지 말고, 교회와 가정만 보더라도 왜 연합과 사랑과 위로가 없는지 아시나요? 힘과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루 1불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욕심과 이기심과 낭비 때문에 서로간의 협력과 연합과 화목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가만히 보면, 적지 않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얼마든지 귀한 만남이 생기면, 그 귀한 만남을 위하여, 바쁨 중에도 자기의 유익이 되기에, 시간을 만들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단지 바쁘다는 그 핑계를 가지고 일초를 우습게 여기면서 일초의 소중함을 까맣게 잊은 체, 아합과 전혀 다르지 않았던 그런 나를 구원하여 주시므로, 늘 은혜가운데 주일예배에 참석하게 하시기까지 해 주시는데, 그 큰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말로만으로 대신하고 있다가보니, 하루에 두 시간도 주님과 동행하지 못하게 되면서 이런 혼돈 자체의 삶이 되고 만 것입니다. 아이들이 마스크를 써야 하고 아무하고 만날 수 없는 이런 기막힌 꼴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렇다고 포기하시렵니까? 아니면 하나님 아버지의 끝없으신 그 자비하심으로 인하여 오늘의 이 기회를 놓치지 않니 하고 서로 함께 회복과 승리의 내일을 위한 준비를 해야 할까요? 어느 쪽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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