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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돌교회
1/31/2021 - 사무엘하 13:1-39 본문
말씀: 삼하 13:1-39
제목: 패망한 다윗의 집안 그러나
오늘 말씀을 보면, 정말 19금입니다. 드러낼 수 없을 만큼 참담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이기에 누구든지 감사한 마음으로 본문의 말씀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시면, 누구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갖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인간이란 존재들은 거룩한 점은 죽어라 닮지 않을지라도 더러운 죄악은 고스란히 완전 쏙 빼어 닮아버리더라는 것입니다. 특히 자녀들이 부모의 나쁜 점만을 훔쳐가듯이 가져갑니다. 다윗의 큰 아들 암논도 보세요! 아버지 다윗 왕처럼, 충신 우리아의 아내가 그날 , 그 모습이 너무나 보암직스러워 결국 선을 넘어버립니다. 바로 자기가 마음에 음란한 마음을 품으면 안 되는 한 남자의 아내인 밧세바, 한 가정의 아내인 밧세바인 줄을 알게 되었으면서도 결국 범하여 충신의 한 가정을 쑥대밭이 되게 합니다. 아무나 사랑하여 소유하고 맙니다. 물론 이렇게 말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다윗이 여러모로 잘 낫기에 그래서 어느 여인이든지 다윗이 원하면 몸까지도 기꺼이 아끼지 않았는지는 모릅니다. 게다가 다윗이 왕까지 되었으니 누가 다윗을 통제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막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을 누가 정신을 완전히 차리게 합니까?
대쪽 같은 나단 선지자를 통하여 죄상을 밝혀 주시면서 회개를 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회개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저지른 죄악이 얼마나 극악한지를 죄가 얼마나 더럽고, 철저히 뽑지 않으면 안 되는 죄의 세력인지를, 그 다음에는 바로 자기를 쏙 빼어 닮은 아들 암몬이 다윗을 노하게 하지만 넘어갑니다. 야비한 암논도 야비한 다윗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아니 어떻게 여동생 다말을 연애하여 결국 거짓말까지 해서 범하고 난 후에, 그것도 모자라, 그 즉시 내 쫓아버립니까? 야비한 다윗 자신의 죄가 야비한 암논을 통하여 점점 더 간교하고 더러워지고 있습니다.
여동생 다말이 오빠라는 암논의 그 괴악한 범행으로 얼마나 괴로웠했을까요? 그 옛날에 다말이 얼마나 부끄러웠을까요?~ 그것도 한 가족 안에서 말입니다. 그러다 참지 못합니다. 다말을 범한 야비한 암논을 배다른 아들, 다말의 오빠인 압살롬이 결국 다윗처럼, 다윗이 군대장관 요압을 통하여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여 왕의 권세로 충신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죽였듯이 압살롬이 암몬을 이런 식으로 결국 위장을 하여 죽입니다. 그리고 압살롬은 아람나라 그술로 망명을 합니다.
다윗의 죄악을 자신의 배다른 아들들이 더 간교하게 더 무섭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런 집안이 어떻게 하나님의 가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완전 막장 드라마도 이 정도는 아닌데, 완전 막장 드라마보다 못한 다윗의 가정이 이렇게 최악도 안 되는 이 야비한 가정이 버젓하게 3000년이 지나도록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다윗 왕에 대하여 그렇게 큰 자랑을 하고 있는 유대인으로써, 완전히 감추고 싶은 사건입니다.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드러낼 수 없는 치욕 그 자체인 다윗의 가정이 이렇게 고스란히 온 역사에 고발된 상태입니다. 다윗의 온 자손과 다윗을 자랑하던 유대인들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어야 되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기록하던 유대인 선지자들도 이렇게 고스란히 가감 없이 남겨두고 있습니다. 더러운 역사를 감추고 고치는 자들도 허다한데, 그렇지 않은 성경을 보면, “참으로 성경이구나”를 알게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런 다윗 가정도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으로 쓰임을 받았다면, 일반인 우리로써는 다윗의 가정이 오히려 위로와 격려와 소망이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마찬가지로, 우리 예수님의 그 당함이 우리에게 어떤 기적이 되어 버렸나요? 그렇게 형편없이, 유대인들이 유대인으로 오신 예수님을 욕하고, 그분을 배반하고 조롱하고 무시하는 배은망덕의 극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당시 제자들을 비롯한 모든 유대인들의 더러움도,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집안의 수치고 나라의 수치였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보여주시는 것도 바로 그 이유입니다. 그대로 가감 없이 폭로하십니다. 왜요? 미워서 그런다고요? 저주하시는 것이라고요? 아닙니다.
그런 야비한 다윗과 그의 아들들과 유대인들을 당장 심판하여 세상을 살기 좋게 하시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알고 있듯이, 자기의 그 악한 점을 드러내서 다윗을 다윗 되게 하십니다. 배반한 배신자 베드로가 사도 베드로가 되게 하십니다. 버리기는커녕 오히려 은혜와 언약으로 믿음의 빛이 되게 하신다는 것을 우린 항상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우린 어떻게 생각하던가요?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죄를 미워하고 세상의 세력과 싸워야 하는데, 세상의 성공과 출세를 위하여 악한 세상의 힘과 벗 삼지 못하여 안달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다윗의 집안이 이제는 부끄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꼴이, 꼴이 아닙니다. 말이, 말이 아닙니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렸습니다. 삼하 13장을 통하여 달콤한 죄가 어디까지 무너지게 되는지를 여지없이 보여주시는데, 우린 죄를 더욱 좋아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아니 죄를 저지를지라도 은혜로 덮어버리면, 해결이 된다고 착각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세상은 갈수록 흑암, 혼돈, 공허 그 자체입니다. 은혜란 죄를 미워하는 능력입니다. 은혜란 오직 주님하고의 동행이 그 목적입니다.
그런데 멋대로 살아버립니다. 다윗과 암논과 압살롬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죄악은 결코 간단하게 끝나지 않습니다. 다윗의 그 죄악으로 다윗의 집안에 대한 말씀이 삼하11장에서 시작하여 삼하19장까지 연결이 됩니다. 그런데 악을 선으로 갚아 주시는 은혜의 주님만 바라볼 생각은 못하고, 어떤가요? 다들, 막장 드라마를 곳곳에서 모두가 만들지 못해 안달하고 있습니다. 결국 멋대로 살자~ 우린 특별한 존재야~ 하면서 온 우주를 무섭게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완전 막장 가정도, 막장 제자들도 완전 새롭게 만들어 복이 되게 하셨지만, 죄의 달콤함을 이겨내지 못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그 사랑하심을 뭉겨버렸습니다. 이제는, 미안해 하지도 않습니다. 암논과 압살롬을 향하여 책망이 아니라 너희들은 왕자라서 좋겠구나~ 하면서 오히려 부러움을 가지고 박수를 보내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다말을 향하여, 하는 소리가, 마치 다말아! 울지 말고 너도 즐겨~라고 오히려 부추기고 있는 듯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말씀을 준비하면서 어떤 느낌이 들었는가 하면, 마치 달걀로 바위 깨기 식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배신자 베드로를 사도로, 살인자 사울을 이방 사도로, 그리고 그 제자들을 통하여 지금까지도 일을 하시면서 우리들을 변화시키시고 계시는 그 놀라우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소망을 갖고 당당함으로 말씀을 준비했고 이렇게 이 자리에 서서, 선포하게 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다윗의 가정이나 너희들의 가정이나 다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모든 가정들의 감춰진 그 실태를 밝히시고 있는 것입니다. 달콤한 죄를 이겨내지 못하여 우리도 다윗처럼 야비했고, 우리들도 암논과 같은 자식, 다말과 같은 자식, 압살롬과 같은 자식들 때문에 모두들 힘들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밝히시는 또 다른 이유로는 그런 말도 할 수 없는 감춰진 악한 모든 사실들을 하나님께서 전혀 모르시지 않고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전혀 모르시지 않으신데, 버리지 않으시고 다윗과 같은 말도 안 되는 그런 우리들의 가정이었을지라도 결국, 어떻게 하시고야 마시겠다는 말씀이라고요?
존귀케 하시고야 말겠다는 것을 꼭 알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다윗이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40편입니다. 1-2입니다.
(시 40:1) |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
(시 40:2) |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
하나님의 은혜로 죄 때문에 생긴 그 기막힌 고통을 그대로 고백 드렸더니, 회개케 하시더니 그런 나, 다윗을 버리지 않으시고 건저 구원까지 해 주셨다는 말씀인데 단지 구원만 해 주셨는가? 아닙니다.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다는 것이 아닙니까? 이런 은혜가 있습니까? 간음과 살인으로 버려져야 되는데, 오히려 구원하여 주시고 인자하심으로 지켜주십니다. 그러니 구원의 하나님께 찬송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결국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달라진 다윗을 보면서, 이렇게 역사하신 하나님을 경외,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시 40:3) |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
결국 구원의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하셨다는 시40:3의 말씀에 대하여 감히 누가 조금이라도 의심할 수가 있고, 누가 부인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린 어느 자리에 서 있나요? 권세로 무너진 다윗인가요? 은혜로 세워진 다윗인가요? 중요한 점은 다윗처럼 악하고 악한 자요 그런 형편없는 가정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하신 언약으로 존귀한 자로 만들어 버리시고 맙니다. 죽사발 된 그런 가정까지도 하나님의 언약으로 거룩한 가정으로 새롭게 변화되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택함을 받은 성도라면 어떤 처지에서도 어떤 고통 속에서도 낙심과 좌절과 포기는 있을 수가 없어야 된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끝까지 믿음으로 살아내라는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인간의 방법과 원리로 해결 해 나가지 말고 오직 믿음으로 감당해 나가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시40:4의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지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세상의 방법과 원리를 이용하여 잘 살고 있는 자들을 부러워하지 말고 믿음으로 감당하는 자가 복되다는 것입니다. 죄로 죽사발이 된 가정을 버리지 않으시고 존귀한 가정으로 만들어 주셨는데, 이를 확인한 자가 어떻게 5절의 고백을 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5절입니다.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의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도소이다 내가 들어 말하고자 하나 주의 앞에 베풀 수도 없고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Many, O Lord my God, are the wonders you have done. The things you planned for us no one can recount to you" 하도 많아서 이것들을 셀 수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까?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들의 가정도 다윗의 가정처럼 그렇게 형편없는 가정이었는데,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존귀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무엇이 중요한 점입니까? 우리들도 다윗의 가정처럼 죄로 무너져야 된다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의 가정은 괜찮은 가정이요 정직한 가정이요 그렇게 손가락질을 받을 만한 그런 가정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라고 그렇게 말한다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그 능력과 사랑과 은혜를 맛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들의 가정을 보면, 다윗의 가정과 무엇이 다를까요? 설령 나의 가정은 다윗의 가정처럼 그 정도는 아니다! 라고 나름대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분이 있으시다면, 그 가정은 버림을 받은 가정이 됩니다. 너무나 위험한 확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거짓말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일1:8-10입니다.
(요일 1:8) |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
(요일 1:9) |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요일 1:10) |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
만약에 어떤 분이 우리 가정은 그리고 나는 은혜와 상관없이 정결합니다. 라고 한다면, 시40:12의 말씀을 보세요! 우리들의 악함과 더러움이 얼마나 지독스러운지 아십니까? 시40:12입니다. “무수한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내게 미치므로 우러러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 마음이 사라졌음이니이다”
이 고백이 틀림없이 나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이 고백이 있는 자는 죄를 지을 때마다 어떤 고백으로 이어질까요? 시40:13입니다.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다윗과 같이 형편없는 가정을 하나님께서 언약 때문에 거저 구원하여 주셨을 때에, 그 깊은 구덩이에서,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려 주셨을 때에, 빛을 받은 우린 하나님만을 의지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요, 그 다음부터는 자신이 지은 죄를 숨길 수 없을 것입니다.
숨겨봐야 그 결과는 뻔하다는 것을 알기에 다 고백하고 쥐고 있던 세상의 헛된 것들을 내려놓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에 자신이 지었고, 짓고 있는 죄들이 얼마나 허다한지, 많은 지를 제대로 통감할 것입니다. 반드시 통감해야 합니다.~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하여 다윗의 지은 죄를 밝히신 것이나 이제 다윗의 아들이 짓는 죄들이 이렇게 폭로되고 있는 것은, 미워서도 아니요 그들의 죄 값에 대한 저주와 재앙을 초점으로 두고 하시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 더럽고 악한 현실을 그대로 여과 없이 폭로하시는 것은 시40:17의 고백을 위해서입니다.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오 건지시는 자시라” 나의 힘과 능력이 돈도 아니요 권세도 아닌 오직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자랑하라고 하셨던 가요? 렘9:23-24입니다.
(렘 9:23) |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
(렘 9:24) |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은 이 땅에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행하시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심을 아는 이것을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자랑할 때에, 당연히 죄를 미워하게 되겠지요! 하나님만을 바라보겠지요!
특히 무엇이 죄인지를 알려고 발버둥을 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죄인지를 알지 못하면 죄를 미워하지 못하게 되고, 죄를 미워하지 못하면, 결국 무엇이 나의 기막힌 웅덩이요 수렁인지를 모르기에, 하나님의 뜻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잘못된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보다 큰 불행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죄는 내 방법과 원리대로 살게 하여 질서를 무너뜨립니다. 내 방법과 원리가 아무리 선할찌라도 그것은 다윗과 다르지 않은 동일한 죄가 됩니다.
그래서 시40:6입니다.
(시 40:6) |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 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 |
내 방법과 원리로 드리는 예물은 예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니기에 시40:7-8에서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시던가요?
(시 40:7) |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
(시 40:8) |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
좀 더 자세한 내용을 가진 말씀을 봅니다. 히10:1-7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10:1-7입니다.
(히 10:1) | 율법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일 뿐이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할 수 없느니라 |
(히 10:2) | 그렇지 아니하면 섬기는 자들이 단번에 정결하게 되어 다시 죄를 깨닫는 일이 없으리니 어찌 제사 드리는 일을 그치지 아니하였으리요 |
(히 10:3) |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
(히 10:4) |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
(히 10:5) | 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
(히 10:6) |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
(히 10:7) |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하셨느니라 |
무슨 뜻입니까?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했는데 그것이 무엇이라고요?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다는 것입니다. 죽으러 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두루마리의 말씀이요 그래서 예수님은 두루마리의 말씀처럼 죄 없이 죽어 주셨던 것입니다. 두루마리의 말씀처럼 예수님이 왜 죽어야 했습니까?
너희들이 다 다윗과 그의 두 아들들처럼 그 흉악한 죄들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요 그 흉악한 수많은 죄들을 씻을 능력과 방법이 구약의 제사로는 결코 할 수 없기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히10:10입니다.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그렇기 때문에 나의 죄를 모르면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가치와 평가를 바르게 내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저지른 다윗 간음과 살인과 다윗의 자녀들의 그 기막힌 자녀들이 지은 죄들을 신랄하게 낱낱이 고발하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거룩한 책이 이런 지저분한 모든 죄들을 낱낱이 기록한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입니다. 인간의 가장 큰 복은 나의 죄를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은혜를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찬송만 드리고 좁은 길, 십자가의 길, 자신을 부인하는 선택을 따라가지 않는다면 그 찬송, 기도 그리고 모든 종교 행위는 어떤 하나님의 하소연을 듣게 될까요? 말1:10입니다. “만군의 여호와로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시고, 지금, 우린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에 생명의 말씀으로 향하고 있고 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 이기려고 찾고 구하고 두드리고 있지 않던가요? 우린 놀랍게도 죄와 싸우면서 기적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주님과 동행하고자 미련한 길을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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