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오늘의 말씀에서 중요한 복음의 틀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이 조문객을 암몬에 보낸 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과 그 뜻을 같이 하며, 다윗의 조문객이 하눈으로부터 조롱과 조소를 받은 것은 주님께서 유대인에게 조롱과 조소를 받은 사건과 동일하게 이해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눈은 다윗의 조문객을 조롱하여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 하였지만,그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끝나는 것을 보면서, 복을 저주로, 승리를 패배로, 생명을 죽음이 되게 합니다.
그러나 언약의 사람들은 저주를 복으로, 패배를 승리로, 죽음을 생명으로 이루어버리는 것을 보면서 언약으로 인하여 세상에서의 고통은 어렵게 하지만그 결과는 그 고통과 비교할 수 없는 상급이기에 항상 감사하면서 끝까지 책임을 다하셔야 합니다. 아니 그 과정이 비록 힘들지만 그 과정이 어떤 복인지를 잊지 말고 끝까지 방심치 말고, 깨어 기도하고, 경계하고 삼가고 근신하면서 이김의 복된 행보를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하눈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던가요? 무슨 생각이 나시던가요?아니 작은 일로 이럴 수가~,또는 성도된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복을 받은 존재인지를 제대로 느끼게 하시지 않던가요?우리 주변을 보세요! 하눈과 동일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던가요? 그들이 어떻게 보이던가요?혹시 있는 지도 모르고 계시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정말 유감입니다. 그러나 하눈과 다른, 다윗과 같은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눈과 전혀 다른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성도된 자신은 누구를 만나며, 누가 자기의 친구요, 동업자요 또는 누구를 배우자로 택할까요?빛의 사람은 결코 망하는 자를 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선택은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까? 네, 불가능합니다. 은혜를 입은 성도는 말씀을 근거로 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차이점을 분명히 알고 계십니까?~그 차이는 현실에서는 나타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러나 그 누구도 마지막 날의 심판은 피할 수 없습니다.그 마지막 날은 그간의 그 사람의 시작과 끝의 발자취를 두고 심판자로부터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날입니다.
그때,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요? 무엇이 나를 살릴 수 있을까요? 우리가 좋아하던, 늘 감사하다고 하던, 은혜와 믿음만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다윗처럼 언약으로 인한 공과 의를 행한 그간의 삶이 그날의 심판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신앙의 사각지대로 인한 실패를 당연시 할 수 있는데, 우린 살아가면서 그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이 중요합니다. 특히 믿음에 대한 오해로 우리의 현실은 좌충우돌하면서 천지를 요동케 하고 있습니다.믿음에 대하여 정확한 이해를 하지 못하여 교회는 더 이상 신뢰보다는 믿지 못할 자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조소와 조롱을 받고 있습니다.하눈이 가득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믿음은 나의 실력과 능력이 아닙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믿음은 내가 할 수 있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나는 보지도 듣지도 먹지도 사랑도 감사도 기쁨도 전혀 할 수 없다는 그 고백이요 완전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게 되면, 받기 보다는 주기를 원하게 됩니다. 사납지 않고 따뜻한 자가 됩니다. 나서지 아니하고 조용히 자기의 일을 끝까지 감당하게 됩니다. 누구의 잘못에 대하여 품고 부족한 자의 도움으로 자기의 자리를 지키게 됩니다.물론 단번에 되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이 있습니다.
자기 생각과 기준과 경험으로 인한 시행착오의 과정을 힘들게 거치면서 여기까지 도달하는 것이지, 처음부터 주님하고 동행하는 믿음의 삶은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이런 믿음의 삶은 평생 훈련 속에서만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느냐, 누구와 동행하느냐, 누구의 가르침을 받느냐는이것들이 그 사람을 결정적으로 좌와 우로 나뉘게 된다는 것입니다.여기서 좌와 우는 악과 선, 버림과 택함, 저주와 복, 죽음과 생명으로 이해를 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롬10:17입니다.
악인의 규가 의인들의 땅에서는 그 권세를 누리지 못하리니 이는 의인들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아니하게 함이로다
(시 125:4)
여호와여 선한 자들과 마음이 정직한 자들에게 선대하소서
(시 125:5)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은 여호와께서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게 하시리로다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벧후 2:6)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하지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벧후 2:7)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벧후 2:8)
(이는 이 의인이 그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이 상함이라)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아무거나 인정하고 아무거나 듣고 보고 배웠다가는 사단이 난다는 것이 아닙니까?그런데 우린 왜, 전심으로 순종을 다 하지도 못하면서 이 점에 대한 고민을 전혀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다시 시편 26:1-12입니다.
(시 26:1)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시 26:2)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시 26:3)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시 26:4)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시 26:5)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시 26:6)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며
(시 26:7)
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시 26:8)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시 26:9)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시 26:10)
그들의 손에 사악함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시 26:11)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시 26:12)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그래서 이런 고백을 하도록 자녀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고,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사 부르심의 소망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하고 만의 삶과 동행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119편의 기자를 보세요! 56, 59-64절입니다.
(시 119:56)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이니이다
(시 119:59)
내가 내 행위를 생각하고 주의 증거들을 향하여 내 발길을 돌이켰사오며
(시 119:60)
주의 계명들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시 119:61)
악인들의 줄이 내게 두루 얽혔을지라도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시 119:62)
내가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밤중에 일어나 주께 감사하리이다
(시 119:63)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과 주의 법도들을 지키는 자들의 친구라
(시 119:64)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오직 말씀이 기업이고 말씀만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그런데 어떤가요? 믿음을 세상능력의 무기로 믿고 자기의 헛된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믿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master key로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하눈이요 우리의 옛 사람입니다.
그러나 선을 악을 갚는 하눈과, 같은 하늘 아래서 보기에는 완전 똑같이 살아가고 있지만 삶의 방향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시편62편입니다.
(시 62:1)
나의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시 62:2)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 62:3)
넘어지는 담과 흔들리는 울타리 같이 사람을 죽이려고 너희가 일제히 공격하기를 언제까지 하려느냐
(시 62:4)
그들이 그를 그의 높은 자리에서 떨어뜨리기만 꾀하고 거짓을 즐겨 하니 입으로는 축복이요 속으로는 저주로다 (셀라)
(시 62:5)
나의 영혼아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
(시 62:6)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
(시 62:7)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시 62:8)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시 62:9)
아, 슬프도다 사람은 입김이며 인생도 속임수이니 저울에 달면 그들은 입김보다 가벼우리로다
(시 62:10)
포악을 의지하지 말며 탈취한 것으로 허망하여지지 말며 재물이 늘어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어다
(시 62:11)
하나님이 한두 번 하신 말씀을 내가 들었나니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하셨도다
(시 62:12)
주여 인자함은 주께 속하오니 주께서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심이니이다
하나님만이 모든 것입니다.그래서 하나님만을 믿던 다윗을 보세요! 다윗은 진심으로 위로하려는 차원에서 예전에 자신을 도와 준 일이 있었기에, 그 감사를 기억하고 암몬 왕 나하스의 죽음에 애도하여, 자신의 신하들을 조문객으로 보내주었지만, 나하스 왕의 아들 하눈은 이를 의심하고 심지어 조문객을 조롱하고 맙니다.
조문객의 조롱은 다윗의 조롱이요 이스라엘의 조롱이요 하나님께 대한 조롱입니다. 여기서 우린 믿음의 사람과 세상의 사람의 차이점을 보게 됩니다. 믿음의 복된 삶은 언제나 배려와 섬김과 사랑 때문에 늘 손해를 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승리로 끝납니다.그러나 하눈이 다스리는 세상의 삶은 어떤가요? 도우려는 따뜻한 믿음의 마음을 믿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의심으로 상대방의 뜻을 왜곡하면서이런 미련하고 악한 짓으로 얼마나 큰 손해를 보던가요! 망하기까지 하고 죽기도 합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세력을 이겨보려고 하다가 더 망하는 것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복을 받은 자인지 실감이 되어,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하눈처럼 진심도 의심하여 모두를 망하게 하던, 이 꼴이, 바로예전의 세상의 내가 아닙니까? 그런데 은혜로 모두를 살리게 하고, 화목을 이루게 하는 믿음의 나 자신이 되었다는 이 사실을 안다면, 어떤 하루가 되어야 할까요?여전히 암몬의 하눈처럼 망하는 길을 가지 못하여 안달할 수 있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단언하건데, 결코 안 됩니다.
그런데 아니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하눈과 동일한 옛 자신과 동행이 가능할까요? 가능할 수 없습니다. 가능할 수 없다는 것을 시편64편을 통하여 확인하여 봅니다.
(시 64:1)
하나님이여 내가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시 64:2)
주는 악을 꾀하는 자들의 음모에서 나를 숨겨 주시고 악을 행하는 자들의 소동에서 나를 감추어 주소서
(시 64:3)
그들이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시 64:4)
숨은 곳에서 온전한 자를 쏘며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는도다
(시 64:5)
그들은 악한 목적으로 서로 격려하며 남몰래 올무 놓기를 함께 의논하고 하는 말이 누가우리를 보리요 하며
(시 64:6)
그들은 죄악을 꾸미며 이르기를 우리가 묘책을 찾았다 하나니 각 사람의 속 뜻과 마음이 깊도다
(시 64:7)
그러나 하나님이 그들을 쏘시리니 그들이 갑자기 화살에 상하리로다
(시 64:8)
이러므로 그들이 엎드러지리니 그들의 혀가 그들을 해함이라 그들을 보는 자가 다머리를 흔들리로다
(시 64:9)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여 하나님의 일을 선포하며 그의 행하심을 깊이 생각하리로다
(시 64:10)
의인은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그에게 피하리니 마음이 정직한 자는 다 자랑하리로다
이 세상의 세력이 아무리 똑똑해도 결국은 망합니다. 망하는 선을 악으로 갚는 하눈의 이런 삶이 좋습니까? ~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암몬의 왕 나하스가 죽어 다윗 왕이 조문객을 보내야 되는 이 사건이 왜 이때, 일어난 것일까요?삼하11장을 보면 무시무시한 사건이 드디어 터지고 맙니다. 다윗의 밧세바 간통과 우리아 살인 사건입니다. 암3:7의 말씀을 봅니다.
(암 3:7)
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물론 구약 자체도 다 예언의 말씀입니다. 그리고 예언의 말씀이 신약에서 와서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종말에 대한 말씀, 재림의 날, 심판의 날에 대하여 아주 자세하게 언급하십니다. 막13:23-37입니다.
(막 13:23)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막 13:24)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막 13:25)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막 13:26)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막 13:27)
또 그 때에 그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가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막 13:28)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막 13:29)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막 13:3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막 13:31)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막 13:32)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막 13:33)
주의하라 깨어있으라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함이라
(막 13:34)
가령 사람이 집을 떠나 타국으로 갈 때에 그 종들에게 권한을 주어 각각 사무를 맡기며 문지기에게 깨어 있으라 명함과 같으니
(막 13:35)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집 주인이 언제 올는지 혹 저물 때일는지, 밤중일는지, 닭 울 때일는지, 새벽일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막 13:36)
그가 홀연히 와서 너희가 자는 것을 보지 않도록 하라
(막 13:37)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 하시니라
성도들을 향하여, 죽음을 준비하라! 심판의 날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마찬가지로 이 하눈의 방자함과 미련함과 경솔함으로 암몬이 망하는 지경으로까지 가게 하신 것을 보여주시면서 늘 승리하고 있는,잘나가고 있는 다윗에게 경고입니다.하눈의 한 사람의 죄악이 즉 방자함과 미련함과 경솔함이 어떤 지경으로까지 이루게 되는지를 직접 보여주시면서, 다윗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다윗! 너도 경거망동하지 말고 조심해! 라는 경고의 조문객 사건입니다. 그냥 막 앞뒤 볼 것도 없이, 사건들이 터지는 것이 아니라,이미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하여 어떤 관심으로 지켜보시는 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와 산성과 피난처와 구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특히 시121:1-8을 보세요!
심지어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고 하시지 않던가요?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주시고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신다고 말씀을 해 주십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하여, 말씀과 삶을 통하여 보여주시고, 듣게 하십니다.그러니, 황제가 된, 다윗이 잠시 방심하는 순간에 넘어질 수밖에 없기에, 하눈을 통하여 까불지 마라!한 순간의 잘못된 판단과 과오로 암몬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망하게 되었는지, 그 미련한 하눈을 기억하라~다 한 순간에 무너지는 법이야!
정신 차려라! 다윗아~잘 나간다고 까불지 말고 방심하지 말고 늘 긴장해야 한다. 이미 다 아시고 사전에 막아주시려는 조문객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다윗과 싸우려는 하눈의 세력을 보면 자신의 못난 짓거리로 엄청난 전비를 투자하여 상대도 못할 정도였습니다.그 고용된 군인이 얼마나 막강했었는지 당대에 다윗의 최고의 군대 장관이었던 요압과 그의 동생 아비새와 어떤 이야기를 하던가요? 삼하10:11에서 알 수 있습니다. “가로되 만일 아람 사람이 나보다 강하면 네가 나를 돕고 만일 암몬 자손이 너보다 강하면 내가 가서 너를 도우리라” 그러나 그런 우려는 단지 노파심(老婆心)에 불과 했고 결국 승리를 합니다.
그런데 암몬 하눈에 의해서 고용된 아람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움에서 패하자다시 이스라엘과 더 큰 엄청난 세력을 모아서 2차로 전쟁을 도모하게 됩니다.두 전쟁을 비교해 보면, 6절에 1차 전쟁에서는 고용된 군사가 아람 사람의 보병 20,000명과 마아가 왕의 사람이 1,000명과 돕 사람 12,000을 고용했습니다. 그리고 실패하자, 2차 전쟁의 준비는 엄청납니다.
2차 전쟁인 18절에서는 아람 사람들이 싸우다가 도망하는데병거 즉 전차부대가 700승과 마병 즉 말을 탄 기마병이 40,000명이나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쟁용 말을 40,000마리나 획득하였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생각을 해 보세요!40,000마리의 말을 탄 적군의 그 위세를 말입니다. 싸울 엄두가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다 물리쳤고 게다가 적군 군대 장관 소박까지 죽이게 됩니다.2차 전쟁에서의 동원된 적군의 세력은 엄청난 세력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다윗 앞에서는 속수무책(束手無策)이었습니다.뜨거운 불 앞에 녹아내리는 눈 같지 꼼짝 못하고 당했습니다.
내가 너를 존귀케 하리라 견고케 하리라 너의 집과 나라와 왕의 자리를 영원히 보전하리라! 이 약속의 말씀이 있었기에 다윗이 그 엄청 세상의 세력을 때려눕힐 수가 있었던 것이지, 다윗의 실력과 능력과 어떤 특별한 인간의 방법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그러나 결국 방심하면서 사단이 나고 맙니다. 늘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을 잊고 자기의 자리를 지키지 못합니다. 전쟁으로 신하들이 출전을 했던 그날, 그때까지도 다윗은 침상에 있다가저녁 때, 일어나, 왕궁 지붕을 거닐다가 목욕을 하는 한 여인을 봅니다. 숨어서 살짝, 훔쳐보고 말지, 견디지 못하고 감히 그 여인을 불러들여 그날, 동침을 하고 맙니다.왕이었기에 할 수 있었던 횡포였습니다. 감히 누가 그렇게 자기 마음에 든다고 함부로 불러들일 수 있단 말입니까?왕이나 할 수 있는 공개된 포악입니다. 그 결과는 상상을 초월하게 됩니다. 제가 지금 전하고 싶은 말씀의 요지는 이미 하나님께서는 암몬의 왕 하눈을 통하여 경고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아~ 긴장하라, 경계하라, 합당하게 행하라, 위의 것만을 바라보라~ 그러나 다들 보세요! 다윗만이 아니라 심지어 목사들까지도 어떤가요? 목회 초반에는 초심을 가지고 열심히 최선을 다합니다. 발바닥에 열불이 나도록 뛰어다닙니다. 발바닥과 머리에 땀이 흐르도록 열심히 섬깁니다.그러다가 교회가 안정권에 이르면서 목회자, 다수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곳곳에서 경고하셨습니다. 깨어 있으라, 충성하라, 끝까지 구원을 이루어가라, 두려움으로 구원을 이루가야 됨을 강력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야 이길 수 있습니다. 빌2:12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그러나 이런 경고의 말씀을 알고 있었지만, 잠시 방심하는 순간에, 터집니다. 망합니다. 무너집니다. 그리고 후회합니다. 꼭 사건이 터진 다음에 후회를 하고 회개를 합니다. 순종하면서 터지는 것이 낫지 않던가요?순종하면서 터지면, 점점 믿음이 깊어지게 되고, 상처도 되지 않습니다. 잃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더욱 인정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 길은 가지 않고 꼭 하지 말라는 것을 하다가, 결국 터져서 다시 시작을 하게 되는데,~ 왕 같은 제사장으로 자리를 굳게 지켜내야지, 방심하다가 다 잃어버린 후에,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까?~다 잃고 나서 그때, 후회를 하는데, 꼭 그 전철을 밟아야지만 직성이 풀립니까?왕 같은 제사장으로, 선한 사마리아로,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하여 거룩한 수고를 하다가, 심판의 날에 만군의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으면 억울합니까?~참 이런 면이 우리 모두를 속상하게 합니다.
우린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 때문에 억울하게 붙잡혀서 당하신 그 수모 속에서도, 불평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어떤 눈길을 보내 주셨는지를 잊으면 안 됩니다. 지금 우리들이 감사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푯대를 향하여 끝까지 나아가지 아니하면, 또 제 2의 우리아, 밧세바 사건이 터집니다.다윗처럼 방심하는 순간에 간통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충신 우리아를 죽게 만드는 잔인한 제 2의 다윗이 되고 싶으십니까? 그리고 다윗처럼 눈물로 베개와 요를 적시는 회개를 하시렵니까?
그러나 그 죄악으로 다윗의 집안은 완전히 개판이 되고 맙니다.아들 암논이 배다른 여동생 다말을 겁탈하고, 다말의 오빠 압살롬은 암논을 살해 하고, 그리고 압살롬은 반역을 꾀한 후에 아버지 다윗의 후첩들을 범하는 최악이 됩니다. 이런 집안 만들고 싶으세요?~지금도 보세요!지난 7, 8일 이틀간에 코로나19인한 사망자가 미국에서 하루에 4,000명이라고 합니다.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되는데, 말이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왜요?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코로나 19의 위험에 대하여 전혀 믿지를 않고 있어요! 심지어 트럼프 대통령처럼 코로나 19를 감기처럼 여기고 있습니다.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것을 보니까, 예전과 같아 보이니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주변에서 별일이 없어 보인다고 하여장난이 아니냐고 음모라고 정치적인 음모라는 의심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하루에 4000명이 연 이틀, 7일, 8일에 걸쳐서 코로나 19로 죽었다고 합니다.세상의 음성에도 무관심하면 그 결과가 이렇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생길진대, 만약에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다윗처럼 결국 크게 후회할 일만 남을 것입니다.매일 땅 위의 생선처럼 팔딱 거리지 마시고 주님의 길을 전심으로 따라가다가 힘들어 쩔쩔매는 복된 삶을 지향하셔야 할 것입니다. 미련하고 경솔한 하눈처럼, 그리고 트럼프 대통령처럼, 자기기준으로 살다가 당하는 큰 상처와 고통으로 후회만할 것이 아니라,순종의 고통으로 맺는 거룩한 열매로 하나님 아버지와 이웃의 자랑이 되고 보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