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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돌교회
03102019 신명기 33:22 본문
제목: 단 지파의 축복
우리가 아무리 신속한 걸음으로 열심히 살려고 뛰어다니고 할지라도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요 아무리 애를 써도 그것이 다 헛된 것이라는 것을 아십니까?
시39:6에서 인생은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임을 우린 지난 시간에 확인한 바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단 지파의 축복이 사자와 뱀과 같다는 축복입니다. 무슨 뜻에서의 사자와 뱀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야곱과 모세를 통하여 단과 단 지파를 축복하는 내용이 사뭇 달라 보입니다. 창49:17에서의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신33:22의 말씀에서는 “단은 바산에서 뛰어나오는 사자의 새끼로다” 야곱은 단을 뱀으로 모세는 사자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에 대한 야곱과 모세의 축복에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민첩성, 신속성입니다. 뱀을 보세요! 얼마나 신속하게 사람의 뒷다리를 물던가요? 그 빠른 말의 뒷다리도 물 정도라면 설명이 필요가 없습니다. 먹이를 잡을 때도 보면 그 신속함이란 눈 깜짝 할 사이입니다. 순식간에 잡아채 버립니다. 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먹이를 찾으면 그 큰 몸집이 순식간에 날아가서 단번에 숨통을 끊어 놓고 맙니다. 뱀이나 사자의 생명은 신속성과 민첩성입니다.
민첩하고 신속한 움직임 때문에 먹고 삽니다. 그 민첩성을 단지파가 받은 것입니다. 삿18장의 말씀을 보시면 예언대로 기습공격으로 자신의 자리를 확보를 합니다. 단 지파였던 삼손도 보세요! 얼마나 신속하고 빠른지 블레셋 사람 1000명을 나귀 턱뼈로 쳐 죽였다고 삿15:16에서 말씀합니다. “가로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일천 명을 죽었도다” 빠르지 않으면 혼자서 적 1000명을 쳐 죽일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단 지파는 민첩한 지파로 모세와 야곱으로부터 축복을 받습니다. 사실 우리가 신속함만을 갖추었어도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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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선물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미국 football 선수, soccer ball 선수, 야구 선수, 수영 선수, 육상 선수, 특히 car racer를 보세요! 민첩하고 신속한 선수의 대우는 엄청납니다. 권투 선수 역시도 같습니다. 얼마나 빠른 펀치를 가지고 있는 가에 승패가 달려 있습니다. 운동뿐만이 아닙니다. 사업도 같습니다. 얼마나 먼저 누가 신속하게 만들어 내는가? 에 따라서 그 결과는 달라집니다. 그래서 빨리, 빨리를 좋아하는 한국 민족이 잘 살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신속함과 민첩성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신속함이 잘못 사용되면 심각한 문제가 생깁니다. 도둑질하는데, 남의 지갑을 훔치는데, 속히 부자가 된 자, 급한 성격의 소유자 등의 빠름은 불행입니다. 은사로 받은 그 신속함, 민첩함을 어디에다가 쓰고 있는가? 에 따라서 완전하게 달라집니다. 우리는 어디에서 뱀과 사자처럼 빠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까? 무엇을 위한 빠른 행동을 하고 있습니까? 남 죽이고 나 살려고 빠르게 움직이고 있지 않습니까?
단지 손해 보지 않으려고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면 안 됩니다. 우리들의 신속함은 생명을 살리는데 있어야 합니다. 도움을 주는데 신속하게 움직여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말들은 멀쩡하게 다 하면서도, 본인이 남을 도울 그런 처지에 막상 맞닥치게 되면, 그때부터는 빠져나가려고 얼마나 머리를 팍팍 돌리는지 모릅니다. 식당에서도 보면 어떻습니까? 다 먹고 나면 자기가 돈을 내지 않으려고 돈이 있는데도 머뭇거리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신앙생활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30, 60, 100배로 이익을 주시겠다고 하셔도 아예 믿지 않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주신 민첩함과 신속함을, 영혼을 살리기 위하여 쓰지 못하고, 늘 손해 볼 것 같아서 머뭇거리다가 후회와 원망만을 구구절절(句句節節)이 하고 있는 어리석은 교인들을 보게 됩니다. 나만 편하게 쉽게 잘 먹고 살려고,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만 그 민첩함을 끄집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신 신속함을 함부로 무분별하게 사용했다가는 꼭 봉변을 당하고 맙니다. 한 예로, 먼저 나오려고 달려가다가, 또는 좋은 자리를 가지려고 달려가다가 넘어져서 다치기만 하면 다행인데 밟혀 죽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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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로 빨리 가려다가 남의 그 귀한 생명을 쳐 죽이기까지 하여 이웃과 자신에게도 큰 상처를 주는 경우를 어디 한 두 번 보고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남보다 먼저 만들지 않으면 특허권을 얻지 못하기에 거짓 문서로 속였다가 그간의 쌓았던 공을 한 순간에 무너뜨렸던 서울 수의대 황 우석 교수를 보지 않았습니까? 황 우석 연구팀으로 통칭되던 서울대 수의대 생물공학 실험실은 교수가 한명도 남지 않게 돼 자연스럽게 해체 수순을 밟게 될 전망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잘 모르겠지만, 이 사건을 남의 이야기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들이 황 교수팀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에서 비롯되는 신속함과 민첩함은 결코 이익이 되지 않습니다. 해(害)가 될 뿐입니다.
사59:7-8의 말씀에서 경고하십니다. “그 발은 행악하기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며 그 사상은 죄악의 사상이라 황폐와 파멸이 그 길에 끼쳤으며, 그들은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며 그들의 행하는 것에는 공의가 없으며 굽은 길을 스스로 만드나니 무릇 이 길을 밟는 자는 평강을 알지 못하느니라” 보세요! 욕심과 이기심 때문에 빠르고, 무죄한 피를 흘리기에 신속하면, 황폐와 파멸이 오고, 평강이 없고 공의가 없는 무법천지가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하면 죽고 망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복과 기쁨과 평강을 얻게 되는지 가르쳐 주시는 말씀입니다. 사59:7-8의 말씀을 잊지 마시고 망하시고 싶으시면 자기 마음대로 살면 됩니다. 그러나 이김과 승리와 기쁨의 삶을 원하신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이 신속함과 민첩함은 자기를 낮추고 부인하는데 발 빠르게 사용하셔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못남을 늦추지 않고 빠르게 고백하면 할수록 은혜가 됩니다. 하는 일들이 쉽게 풀릴 것입니다. 자신을 부인하면 자신이 설 곳과 갈 곳이 정확하게 보일 것입니다. 말씀을 봅니다.
(1)시55:8입니다. “내가 피난처에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하나님께서 주신 신속함과 민첩함은 자기를 살리는데 사용하시면 됩니다. 세상에 두지 마시고 오직 하나님께 두시면 폭풍까지도 잠잠케 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기에 그 어떤 흉악한 폭풍과 광풍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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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하나님께서 주신 신속함과 민첩함은 이웃을 살리는데 사용하셔야 됩니다. 사16:5입니다. “다윗의 장막에 왕위는 인자함으로 굳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공평을 구하며 의를 신속히 행하리라” 그 누구라도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불의를 행하면 눈이 어두워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신속함과 민첩함은 자신의 더러운 죄와 특히 게으름을 볏겨 내는데 필요할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신속함과 민첩함은 말씀을 보고, 기도드리기 위하여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신속함과 민첩함은 주님의 성품을 닮는 도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3)말씀을 지키는데 신속해야 할 것입니다 시119:60입니다. “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치 아니하였나이다”
(4)하나님께서 주신 신속함과 민첩함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입니다. 에(에스라)6:1-13(8, 12, 13) 에(에스라)7:11-21(17, 21)
(5)요21:7의 말씀도 보세요!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부활하신 주님에게 가려고 겉옷을 두른 채로 신속하게 바다로 뛰어내리는 베드로를 보세요! 비록 배움이 적고 성격이 급한 인물이었지만 결국 어떤 인물로 하나님께서 쓰시던가요? 모든 사도 중에서도 수석 사도로 쓰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것을 얻으려고 뛰어다니기에 바쁘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 잃을 것입니다. 아니 다 빼앗기고 말 것입니다. 거룩한 결과를 위하여 신속한 조치와 반응을 가져야 영원히 보존될 것입니다. 그러려면 언제나 열심히 돈이 아니라 믿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시간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면 길어야 100년이란 시간이 주어지지만, 그 시간이 얼마나 신속하게 지나가고 있는지 아무도 부인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우리의 남은 시간은 너무나 적지 않습니까? 쓸데없는 세상의 것들은 신속하게 버리시고 거룩함을 위한 선택은 신속하게 반응을 하셔서 주님의 성품을 닮아 가셔야 할 것입니다. 독수리를 보세요! 먹이를 찾으면 어떤 속도로 날아오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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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는 언제나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다. 늘 정신을 바짝 차리시고 기회를 위하여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일꾼들만이 신속한 반응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복된 모든 것들을 즉시 얻게 될 것입니다. 준비하지 않으면 영광의 길도, 승리의 길도 보이지도 않습니다. 거룩한 준비를 해야 내일이 정확하게 보입니다. 늘 죄에는 인색하고, 거룩함에는 신속한 행동을 발 빠르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죄는 머뭇거리지 말고 곧 말아야 되고, 믿음의 선행은 속히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 날이 속히 임하기 때문입니다. 요엘2, 3장의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합2:3, 계2:16, 3:11, 22:7, 20입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찌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정녕 응하리라”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
"내가 속히 임하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마냥 방심하시거나 안주하셨다가는 안 됩니다. 우리는 지금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속히 부르짖지 않으면 안 됩니다. 왜요? 온 세상이 심한 타락으로 보이지 않는 무서운 불길이 곳곳에서 타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곳곳에서 수없는 존귀한 생명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어디 피할 곳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는 기막힌 현실입니다. 그래서 부르짖어야 합니다. 어떻게 부르짖어야 합니까?
시22:19입니다. “여호와여 멀리 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시38:21-22, "여호와여 나를 버리지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하지 마소서 속히 나를 도우소서 주 나의 구원이시여"
시40:13,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시69:17,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서 숨기지 마소서 내가 환난 중에 있사오니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시70:1과 5,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건지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하나님이여 속히 내게 임하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니 여호와여 지체치 마소서"
시71:12, "하나님이여 나를 멀리 마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
시79:8, "우리 열조의 죄악을 기억하여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가 심히 천하게 되었사오니 주의 긍휼하심으로 속히 우리를 영접하소서 "
시102:2, "나의 괴로운 날에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주의 귀를 기울이사 내가 부르짖는 날에 속히 내게 응답하소서"
시141:1, "여호와여 내가 주를 불렀사오니 속히 내게 임하소서 내가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내 음성에 귀를 기울이소서"
2700년 전인 시편기자의 시대에서도 죄악 때문에 속히 응답을 원하는 기도를 드렸다면, 오늘 우리들의 이 시대는 죄악이 더욱 심하기에 쉬지 말고 속히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죄악 때문에 곳곳에서 얼마나 괴롭힘을 받고 있습니까? 얼마나 시급한 때입니까?
너무나 수많은 생명들이 속아서 처참하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죄의 문제를 속히 해결받기 위한 신속한 부르짖음을 적극적으로 드려야 할 때입니다. 주님이 곧 오십니다. 한눈 팔 여지가 없습니다. 지금은 돈 버실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잘 살려고 땀을 흘릴 때가 아닙니다. 재물 때문에 바쁘게 살지 마시고 거룩함을 위한 신속한 반응과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머뭇거릴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속히 신속하게 부르짖으면서 더욱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발 빠른 하루하루가 되셔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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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살지 않으시면 주님의 능력의 팔을 붙잡아야 될 때에 붙잡을 힘도 생기지도 않고, 붙잡았을지라도 끝까지 붙잡고 가지도 못합니다. 더 이상 쓸데없는 곳에 수고하는 일이 없도록 하셔야지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2. 우리, 즉 옛사람이 생각하는 신속함은 결국 아무 것도 못하는 완전하게 묶인 가운데의 신속함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뛰고 있는데 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완전하게 묶여 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삶 자체가 창살 없는 감옥에 불과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닌가요? 보이지 않는 악한 세력에 꽁꽁 묶여서 진리와 생명과 의를 전혀 생산할 수 없는 죽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니던가요?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행복할 수 없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그 묶임은 저주요, 사망의 그늘입니다. 벗어나지 않으면 노예의 삶이 될 뿐입니다. 자유가 없기에 뛰어도 뛰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묶인 저주와 사망의 그늘은 무엇일까요? 죄입니다. 인간이라면 죄의 사슬, 저주, 사망의 그늘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세상의 헛된 것들로부터, 그리고 자기의 고집과 욕심과 이기심의 죄로부터 벗어나야지만 진정한 자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9:1-3과 눅2:25-32입니다. “1전에 고통하던 자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당케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편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3주께서 이 나라를 창성케 하시며 그 즐거움을 더하게 하셨으므로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누는 때의 즐거움 같이 그들이 주의 앞에서 즐거워하오니” "25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시므온이라는 경건한 자가 어떤 고백을 하던가요? 아기 예수님을 보더니, 비로소 고백하기를, “종을 편하게 놓아주시는도다!” 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8:31-36에서 하시는 말씀을 봅니다. “31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32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33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3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하리라”
예수로부터,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결국 자유를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인하여, 자유로울 수 있는 그래서 진정한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있게 되지, 그렇지 않으면 그 누구라도 완전 자유로울 수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제가 본 영화로 설명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말씀하고 연관이 되어 지난주에 본, 미국 영화 한편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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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 중에 mine-지뢰-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까?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중동지역인지, 아니면 아프카니스탄 지역이었던 것으로 아는데 하여튼 영화의 장면은사막 한 가운데서 두 명의 미국 저격수가 적군을 사살하는 명을 받지만 그 저격수가 사살할 그 당시에 저격을 당할 아들이 혼인하는 날이라, 결국 저격을 포기하고 그 적군 지역 안에서 발각되어 겨우 목숨을 건져 도망쳐 나오게 되는데, 부대로 돌아오다가 동료 한 사람이 mine 즉 지뢰를 밟아 두 발목이 잘려지면서 결국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자살합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지뢰를 밟는 동시에, 영화 주인공 mike도 지뢰-mine-를 밟게 됩니다. 그 순간 mike은 frozen이 되고 맙니다.
자신의 한 쪽발이 밟고 있는 mine를 수습을 해 보려고 애를 써 보지만, 단지 자신이 지녔던 검, 칼로 지뢰가 있다는 것만을 확인 할 수 있을 뿐, 어떻게 수습을 못합니다. 당연히 인간 동상-statue-이 됩니다. 그리고 몇 시간을 견디다가 살기 위하여 떨어져 있던 군대전화기를 힘겹게 끌어와서, 부대로 구원을 요청하지만, 대답은 거기에서 57시간은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막 한 가운데서 물도 없이 마냥 57시간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것도 꼼짝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한 시간도 견디기가 어려운데 생지옥이 따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몇 시간이 지난 후, 그 사막의 어느 부족이 와서 말을 건 냅니다. 왜 그렇게 서 있냐고, 군인 mike는 이야기 합니다. 자기는 지금 mine 지뢰를 밟고 있어서 움직이면 나도 지금 저렇게 죽어 있는 나의 친구처럼 발목이 잘려서 결국 죽게 된다고 설명을 하는데, 그 남자는 그 말을 듣고서는 아니라고 합니다. 여기는 지뢰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mike 주변을 막 돌아다닙니다. 아무렇지 않으니 너도 한 발을 내디뎌보라고 합니다.
내 말을 믿고 한 발자국을 내디뎌보라고 계속해서 말을 연이서 연 이틀간을 찾아와서, 내디뎌보라고 여기는 지뢰가 없으니까, 괜찮다고 자기 딸까지 보내서 물까지 주면서 이야기를 해 보지만, 주인공 mike는 자기 친구가 그렇게 발목이 잘려서 자살을 한 것을 바로 보았기에 그 부족에 사는 그 남자의 말을 전혀 믿지 못하고, 단지 부대동료가 와서 지뢰를 제거해 주기만을 기다립니다. 죽은 친구 때문에 아무 것도 못하는 동상이 되어서, 물도 없이 내내 서서, 또는 한 쪽 무릎만을 꿇은 체, 마냥 기다라는데, 정말 그 처절함이란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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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화를 본 사람이나 사막에서 경험을 해 본 사람이외에는 그 고통을 설명하기가 불가합니다. 그러다가 57시간이 되어 더 이상 견디지를 못하다가 혼수상태에서 발을 내딛게 되었는데, 터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밟고 있던 그 부분을 파 보니까, 글쎄 뚜껑이 덮인 깡통인데 그 깡통 안에 플라스틱 군인이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하면서 영화가 끝이 납니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노래가 상당한 의미가 있더라고요!
‘너희들이 내딛는 그 한 발자국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아는가?’ 라는 그런 노래가 이어서 나오면서 끝납니다. 그렇기 신속하게 적군을 단번에 사살할 수 있었던 자격수가, ‘딱! 묶이니까, 아무 것도 못하더란 말’ 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렇게 신속하게 자기의 일을 잘 감당하던 자들이 그래서 인정을 받고 잘 살고 있는지는 몰라도, 세상에서의 신속함은 신속함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가치 있는 신속함이 신속함입니다. 말씀을 다시 봅니다.
시119:60, "주의 계명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치 아니하였나이다"
시55:8, "내가 피난처에 속히 가서 폭풍과 광풍을 피하리라 하였도다"
사16:5, "다윗의 장막에 왕위는 인자함으로 굳게 설 것이요 그 위에 앉을 자는 충실함으로 판결하며 공평을 구하며 의를 신속히 행하리라"
스6:8, "내가 또 조서를 내려서 하나님의 이 전을 건축함에 대하여 너희가 유다 사람의 장로들에게 행할 것을 알게 하노니 왕의 재산 곧 강 서편 세금 중에서 그 경비를 이 사람들에게 신속히 주어 저희로 지체치 않게 하라"
스6:12-13, "만일 열왕이나 백성이 이 조서를 변개하고 손을 들어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을 헐찐대 그곳에 이름을 두신 하나님이 저희를 멸하시기를 원하노라 나 다리오가 조서를 내렸노니 신속히 행할찌어다 하였더라 다리오왕의 조서가 내리매 강 서편 총독 닷드내와 스달보스내와 그 동료들이 신속히 준행한지라"
스7:17, 21입니다. "그 돈으로 수송아지와 수양과 어린 양과 그 소제와 그 전제의 물품을 신속히 사서 예루살렘 네 하나님의 전 단 위에 드리고" "나 곧 나 아닥사스다왕이 강 서편 모든 고지기에게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하늘의 하나님의 율법의 학사겸 제사장 에스라가 무릇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신속히 시행하되"
다시 말을 드리면, 나를 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없는 신속함은 신속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완전하게 묶여 꼼짝을 못하던 mike와 전혀 다르지 않은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속함은 나를 능하게 하신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서의 신속함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먹고 살려고 이름을 날려서 성공하려고 그래서 나타나는 신속함은 죽음이라는 boundary에서의 신속함이기에 mike처럼 아무 것도 못하는 처지와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요?
지금 당장 주님의 길로 한 발자국을 내디뎌보라고 해도 전혀 내딛지 못하고 지옥의 삶을 살고 있지 않던가요? 사실, 사막 한가운데서 아무 것도 못하던 mike와 무엇이 다르던가요?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단 지파의 신속함 즉 사자와 같고 독사와 같은 신속함은 우리가 아는 세상에서의 그런 신속함이 아닌 것입니다. 주님을 위한 주님 때문에 참 가치를 가진 신속함입니다. 진리를 위한 신속함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라면 머뭇거림이 없는 신속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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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단 지파를 축복할 때, 그 거룩함을 위한 신속함과 민첩함이 독사와 사자 같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무엇을 위하여 신속하던가요? 세상 사는 모든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얼마나 신속한지 모릅니다. 이렇게 모두가 열심히 뛰어서 잘 살기 위하여 눈에 불을 켜고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정말 복된 뜀이요, 생명을 낳고 영원한 기쁨이 되는 신속함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mike처럼 완전하게 묶여 사망의 그늘 안에서 그림자에 불과한 삶을 위하여 무가치하게 뛰고 있는데 그런 삶에 무슨 소망이 있을까요? 사망의 그늘 안에서 단지 살기 위한 그 신속함은 낙심만을 얻게 됩니다. 뛰어 봐야 너는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신속하게 뛰고는 있지만 전혀 뛰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완전하게 세상의 저주에 묶여서 아무 것도 못하고 단지 마음만 쩔쩔매고 있었던 예전의 자신의 그 무서운 처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mike처럼 그런 상태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삶이란 mike의 삶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여기저기 뛰는 것이 아니라 다람쥐 쳇바퀴처럼 맴도는 그런 삶일 뿐입니다. 자신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헛고생만을 하고 있는데, 그들을 보는 성도로서는 답답함이 끝이 없습니다. 예전의 자신, 세상에서 완전 빠져 사망의 그늘에서 헛되게 살던 자신을 보게 되면 하나님에게 항복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묶임에서 그 죄악에서 완전 풀어났기에 자유라고 분명하게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나중에 자신이 바로 mike와 같은 존재이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억울함이 어떨까요? 원하던, 바라던 그래서 그렇게 열심히 살던 모든 것이 다 꼼짝하지 못했던 mike와 같은 자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어떤 슬픔이 자신을 견디지 못하게 할까요? 아마도 그렇게 산 전 인생이 너무나 한심해서 포기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그런 mike의 삶을 살던 우리가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그 자유는 이젠 나를 위한 내디딤이 아니요 신속함이 아니라 이웃의 종 된 자로 살아가는 놀라운 기회를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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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진리와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말입니다. 오직 예수만이 자유의 삶을 주시고, 그분 때문에 진정한 한 발자국을 내디딜 수 있다는 그 진리와 사실을 알려하기에 우린 희생하고 섬기고 양보해야 할 것입니다. 그 큰 자유, 계산이 안 되는 자유를 받았기에 당연히 한 알의 썩은 밀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얻은 자유가 너무나 소중하기에 나 하나 희생하여 이웃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얼마든지 주님이 주시려고 가신 그 십자가의 길을 살아가면서 불쌍한 mike와 같은 이웃들에게 충분히 신속하게 제시할 수 있어야 맞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어떻게 신속할 수 있는 놀라운 그 자유를 얻었는데 어떻게 머뭇거릴 수 있단 말입니까? 머뭇거릴 이유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우린 모든 삶을 다 바쳐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위한 삶이 우리의 먹이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우리 예수님이 요4:34에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 양식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듯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우리하고는 전혀 다른 양식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된 우리들의 양식도 신속하게 그 사실을 알려서 더 이상 사망의 그늘에서 묶여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이웃에게 진정한 자유를 알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린 먹지도 못하고 자지도 못하는 고난의 길을 선택하셔야 할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주시는 먹잇감을 놓치지 않으려고 자다가도 새벽 2, 3시라도 신속하게 벌떡 십여 차례를 반복적으로 일어나서 주신 말씀을 그때마다 타이핑을 합니다. 왜요, 주신 먹잇감을 놓치지 않으려고 신속하게 일어나게 됩니다.
몸은 얼마나 피곤한지 몰라요 그러나 마음은 너무나 기쁘다는 것입니다. 먹잇감을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컴퓨터에 저장해 두었기에 든든한 마음으로 잠자리를 기쁘게 눕게 됩니다. 그래서 바로 그 축복을 하는 야곱과 모세입니다. 당연히 세상의 더러운 부분은 신속하게 잘라내야 합니다. 한 눈을 팔 사이가 없습니다. 눈코 뜰 새가 없습니다. 먹잇감을 놓치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세상의 더러운 부분을 제거하려고 늘 바쁘게 살아갑니다. 이보다 큰 축복이 있을까요? 이보다 가치 있는 삶이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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