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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돌교회
4/9/2023 아모스 3:1-16 본문
말씀: 암3:1-16
제목: 너희는 듣고 증언하라
오늘은 부활 주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죄로 인하여 절망에 놓여 영원히 버려져야 되는 자녀들을 구원하시려고 계획하신 대로 여자의 후손으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절망에 빠져 방황하던 자녀들의 부활을 위하여 대신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그 죽음은 놀랍게도 실패와 좌절과 자폭의 죽음이 아니라 승리의 죽음이셨던 것입니다. 사망권세를 완전하게 물리쳐 주시고 약속하신대로 3일 만에 부활하시면서 성도들에게 큰 희망과 용기와 믿음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날을 2000년 내내 기리고 있습니다.
그 부활의 승리가 바로 우리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심판의 주로 오실 때까지는 믿는 자들은 부활의 주님처럼 부활을 소망하면서 살게 되었는데, 그런데 어떤가요? 부활의 소망을 가진 자로서 그 역할을 잘 감당하고 계십니까? ~ 이젠 죄로 죽을 수가 없는 부활을 약속 받은 자로써 예수님처럼 힘이 아닌 오직 믿음을 가지고 거룩함을 위하여, 점과 흠이 없는 자로 돌아가기 위하여 어떤 준비를 날마다 하고 계십니까? ~ 그러나 다들 믿는다고는 하면서도 주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그 감사와 기쁨과 평안의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으시기에 그래서 오늘도 드려야 되는 말씀이 참 부담이 됩니다.
첫째로 드릴 말씀은 암3:2에서도 보면,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분이 너만은 특별하게 알았다고, 즉 사랑하신다면서, 이스라엘에게 보응 즉 화를 또 내시고, 무서운 심판을 다시 또 하시겠다고 하시는 것일까요? ~ 다른 나라 열방들은 상상도 못하는 구원이라는 큰 은혜를 이스라엘에게 주셨지만, 회개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을 배반하면서, 여전히 부패하고 타락하여 은혜를 입은 나라로써 부끄러운 짓을 끊임없이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이 점에 대한 강조가 바로 암3:1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께서 너희에 대하여 이르시되 이 말씀을 들으라” 들으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들어요? 너희들만 선택하여 구원을 이루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구약 내내 어떤가요? ~ 죄로 인하여 무너지고 맙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아서 무너졌다는, 심판을 받아 망하게 되었다는 바로 그 사실을 지금 너희들이 듣고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사실은 결국 너희들도 죄로 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과 전혀 다르지 않은 자들이 바로 너희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은혜를 주셨는데, 은혜를 입은 성도된 자들이 어떤가요? 죄를 질 때마다 회개를 하면서 죽음과 심판의 날을 위하여 날마다 떠날 그 채비를 잘하고 있던가요?
아니면 안개처럼 곧 다 사라질 세상의 부와 세상 명예와 세상 권세를 더 가지려고 무슨 짓을 하고 있나요? 교회까지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다가 보니깐, 자기에게 임한 어려운 환경, 고통스러운 시간, 실패를 어떻게 평가를 하게 되던가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 고난에 대하여 감사하고도 남아야 결국 회복과 승리를 얻게 되는데, 거의 99%가 왜 이렇게 어렵게 나를 살게 하시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불평을 하다가 나중에는 자폭까지도 하더라는 것입니다.
성도가 고난에 대하여 감사하지 못하면, 자기가 짓는 죄는 아무 상관이 없고, 심지어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뻔뻔해 진다는 것이 아닙니까? ~ 그러나 어떤가요? 다른 지체가 자기를 힘들게 하거나, 자기 마음에 들지 않게 하면, 화를 내고 짜증을 내면서 상처를 주고 심하면, 관계까지도 깨뜨리고 맙니다. 전형적인 내로남불입니다. 자기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남의 눈의 티를 보고 분노하는 삶은 하나님께서도 심하게 책망하십니다. 그런데 그 책망이 어떤가요? 무엇을 위한 책망입니까?
회개와 변화를 위한 사랑의 징계이지만, 그 점을 전혀 이해를 못하여 결국 심각한 damage를 보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책망은 직접 친히 하시지 아니하고 누군가를 통하여 하시거나 아니면 어떤 사건과 재앙, 손해나 질병 등을 통하여 지적하시면서 회개하고 승리를 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렇게 일을 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모르고, 저 인간이 왜 자기를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지 이해를 못하고, 분노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가진 자가 누구입니까? ~ 자기는 평시에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남에게 잘하라고 하는 식의 내로남불이, 늘 관계를 어렵게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성도가 자기의 맡은 일을 그리스도 안에서 잘하려고 애를 쓰게 되면, 어떤 기도와 간구를 하게 됩니까? 자기의 악함과 죄악이 하도 커서, ‘주여 살려 주세요!’ 라는 기도만 터져 나오기 때문에 남의 약점과 허물과 문제점에 대하여 지적할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을 말씀으로 확인해 봅니다. 은혜를 입은 자녀가 죄악을 저지르고 나서 드리는 기도가 바로 시편 51편입니다. 시51편은 다윗이 어떤 죄악을 저지른 다음에 쓴 시입니까? 충신 우리아의 아내를 간통하고 그 간통으로 임신을 하니깐, 그 남편을 전쟁터에서 죽도록 한 다음에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아내로 취한 다윗이었습니다.
여기서 이 죄악은 다윗, 한 사람에게만 한정된 죄악이 아니라 우리들도 다윗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전제로 한 사건이요 모든 사람들, 은혜를 입은 성도까지도 다 얼마나 악한 죄의 뿌리를 갖고 있는 그런 존재들인지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나는 다윗과 같은 죄를 짓지 않았어!’ 라고 착각하는 순간, 그 사람은, 나는 저 사람보다 낫다가 되면서, 정죄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입은 성도들은 어떤 고백을 하던가요?
렘13:22-27입니다. “네가 마음으로 이르기를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게 닥쳤는고 하겠으나 네 죄악이 크므로 네 치마가 들리고 네 발뒤꿈치가 상함이니라,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을 사막 바람에 불려가는 검불 같이 흩으리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네 몫이요 내가 헤아려 정하여 네게 준 분깃이니 네가 나를 잊어버리고 거짓을 신뢰하는 까닭이라, 그러므로 내가 네 치마를 네 얼굴에까지 들춰서 네 수치를 드러내리라, 내가 너의 간음과 사악한 소리와 들의 작은 산 위에서 네가 행한 음란과 음행과 가증한 것을 보았노라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이여 네가 얼마나 오랜 후에야 정결하게 되겠느냐 하시니라”
결코 선을 행할 수 없는 존재들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도 보면, 다윗처럼 자신이 큰 죄인임을 깨닫고 난 후에, 드린 고백인 시51:1-5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우리는 어느 쪽인가요? 다윗의 이 고백을 하고 있나요? 아니면, 남의 허물과 약점을 가지고 수군거리고 있고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있나요? 그렇다면, 아직도 은혜를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은혜를 입게 되면 은혜를 입은 성도들은 반드시 시51:1-5의 고백이 뒤따라오게 되면서 다시 어떤 간구가 나오는지 아십니까?
시51:6-10입니다.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내게 지혜를 은밀히 가르치시리이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내게 즐겁고 기쁜 소리를 들려 주시사 주께서 꺾으신 뼈들도 즐거워하게 하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왜요? 은혜를 입어야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이 간구가 가능한 이유도 바로 하나님이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죄인들이 은혜를 입게 되면, 정결, 정한 마음, 정직한 영을 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고백을 통하여 자신이 은혜를 입은 자가 되었음을 알게 되면서 삶의 우선이 무엇이 되는지 아십니까?
시51:11-15입니다.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공의를 높이 노래 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 하리이다”
이 내용의 기도가 쉬지 않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면 당장 버려진다는 점을 너무나 잘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뜻은 하나님께서 늘 함께 해 주심을 알고도 주님만을 늘 바라보지 않게 된다면, 다시 죄악에 빠져 죄의 고통을 이겨낼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 은혜를 입은 성도들은 은혜를 주신 하나님에 대한 그 큰 감사가 삶의 모든 것이기에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혜에 대한 감사 찬송을 평생에 드리게 되는데, 그 찬송 안에 무엇보다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시51:16-19입니다. “주께서는 제사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 성을 쌓으소서,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그 때에 그들이 수소를 주의 제단에 드리리이다”
바로 17절입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그렇습니다. 은혜를 입어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가진 성도들은 남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죄악의 깊이를 알게 되었기에, 자기의 그 죄악의 크기와 깊이와 많음이 상상할 수 없이 크고 가득함을 너무나 잘 알게 되었기에, 그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정결하려는 영적인 싸움을 하려고 얼마나 노심초사하게 되는지 모릅니다. 은혜를 입었어도 늘 깨어있지 않으면 다시 넘어지고 말기에 그래서 주님만 바라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상한 심령입니다. 성도만이 받은 영적 이해요 영적 차원인 이 상한 심령은 자기를 책망하시는 하나님과 그리고 그 도구로 쓰시는 일에 대하여 얼마나 감사하게 여기게 되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그 상한 심령만이, 자신을 책망하여 회개하고 승리케 하시려고 세운 나단과 같은 자, 또는 나를 괴롭히는 그 이웃들에 대하여 미움이 아니라 깊은 감사를 드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암3장에서 그 시작을 이 말씀을 들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요? 그 말씀들을 수없이 들었고 보았습니다. 들었고 보았기에 그래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떤 반응을 지금하고 계십니까? 어떤 소망을 가지고 거룩함을 위한 수고를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남의 허물을 책망하고 미워하고 있나요? 아니면 남의 허물과 약점이 오히려 자신의 신앙의 성장에 도움이 되고 있나요?
둘째로 드릴 말씀입니다. 암3:1의 말씀을 가만히 보세요! 아니 그동안에 하나님께서 그 수많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적과 기사들을 얼마나 보게 하셨고,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적과 기사들을 그동안에 얼마나 듣게 하셨던가요? 헤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아모스를 통하여 너희들만을 특별히 사랑하여 지켜주시고 보호하여 주셨다고 하시면서, 2절에서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 그래서 봐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 모든 죄악을 너희에게 보응하리라고 하십니다. 마치 거꾸로 이상의 말씀을 선지자 아모스를 통하여 들려주시고 보여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의 보응은 지은 죄로 당연히 받을 수밖에 없는 인과응보임을 3-5절에서 말씀 하십니다. 3, 4절에서, 두 사람의 동행도 이유 없이 동행하는 경우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자 역시도 부르짖는 이유가 있지 아무 일도 없는데 부르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5절에서도 보면, 새가 잡히지 않았는데, 덫이 튈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읍에서 나팔이 울리는데, 즉 전쟁 비상나팔이 울리는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고, 하나님의 허락 없이 재앙이 임할 수 있는가? 하시면서 결코 그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인과응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7절에서도 보면, 그 모든 일의 비밀까지도 다 알리고 난 후에 행하시는데, 그래서 보여주신 대로 듣게 하신대로 터질 전쟁인데, 즉 그 사자의 부르짖음과 같은 참담한 전쟁을 맞게 되면, 누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고, 그 사실을 예언하지 않을 자가 있단 말인가? 라고 합니다. ~ 그렇게 말씀을 하시면서 힘이 있는 자들의 요란함과 학대함으로 사마리아에 어떤 일이 생길지 아스돗 궁궐들과 애굽 땅의 궁궐들이 와서 보라고 9절에서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시면서 10절부터 12절까지 구체적으로 어떤 지를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고 너희들, 아스돗과 애굽은 보고 듣고 사마리아가 어떻게 멸망을 당하게 될지 야곱의 족속에게 그대로 증언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대로 다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14절의 말씀처럼 그날에 벧엘의 제단들을 벌하여 그 제단의 뿔들을 꺾어 땅에 떨어 드리셨고, 15절의 겨울 궁과 여름 궁을 치셔서 그 화려한 상아 궁들이 파괴되었고, 극심한 사치로 큰 궁, 즉 모든 사마리아의 집들이 다 무너질 것이라는 말씀인데 말씀그대로 다 무너집니다.
그 당시 북이스라엘에 상아로 가득 찬 사치스러운 궁이 있었음을 왕상22:39에서 알 수 있습니다. “아합의 남은 행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과 그가 건축한 상아궁과 그가 건축한 모든 성읍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결국 말씀 그대로 사치스러웠던 상아궁도 예언하신 대로 무너지고 맙니다. 그런데 아무도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암3:12에서도 보면, 어떤 예언과 함께 일이 있었는가 하면,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 냄과 같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서리에나 걸상의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도 건져 냄을 받을 것이라고 하여 그래서 건져 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죽음의 위기에서 구원을 받은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아무도 회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말씀이 생각이 납니까?
사6:9-10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무슨 뜻입니까?
특히 사6:10을 다시 보세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도록 보지도 듣지도 못하게 막고 있으십니다. 망하게 하시려고 작정한 하나님의 고의적인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서 전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앞뒤가 전혀 맞지 않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뜻을 듣고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 자신이 이 진리에 대하여서는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아주 잘 설명하고 있는 말씀이 바로 사1:2-9입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슬프다 범죄 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 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너희의 땅은 황폐하였고 너희의 성읍들은 불에 탔고 너희의 토지는 너희 목전에서 이방인에게 삼켜졌으며 이방인에게 파괴됨 같이 황폐하였고, 딸 시온은 포도원의 망대 같이, 참외밭의 원두막 같이, 에워싸인 성읍 같이 겨우 남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생존자를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으리로다”
너희들은 아무리 해도, 죽어라고 해도 안 된다는 것을 계시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으면 아니 되는데, 왜 아니 될까요? 인간의 힘으로 해결이 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왜 인간의 힘으로 하면 안 될까요?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면, 창3:5입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바로 이 점과 같습니다. 사단의 세력은 너희가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 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고 먹지 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사단이 한 말이 틀리지 않습니다. 선악과를 그들이 먹으므로 선악을 알게 되는 것은 맞았지만, 그 앎은 불순종으로 알게 된 앎입니다. 불순종으로 알게 된 그 앎은 더 나쁘게 할 뿐이라는 점입니다. 결국 그 앎이 어떤 태도를 취하던가요? 아담과 하와가 그 후에 하나님을 피하게 됩니다. 그리고 서로 남의 탓으로 돌리게 됩니다. 관계가 깨어지게 됩니다. 결국 어떤 저주가 임했던가요?
창3:16-19입니다.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타락한 인간의 방법과 원리인 힘과 능력은 내일이 없습니다. 좌절과 멸망만이 남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힘과 능력으로 하면 안 되기에, 자기의 힘과 능력으로 할 수 있다고 하면 결국 큰일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5:21입니다.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았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 표현을 어떻게 하셨는가 하면, 사6:10입니다.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왜요? 아직 은혜가 아닌 율법의 시기에서 해결할 믿음의 길이 아직 없는데 자기의 힘으로 하게 되면, 망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나요? 그래서 그럴까봐 염려하신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왜요? 그것이 왜 염려가 되시는데요? 진리는 자기의 힘과 능력으로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가 없는 신의 영역, 진리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그 누구도 하나님의 이 말씀을 듣고 깨달을 수가 없다면, 왜 걱정을 하십니까? ~ 그래서 예수께서 누구를 가장 삼가하고 경계하라고 하시던가요? 이스라엘에서 외식하던 영적인 지도자들인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사, 장로, 랍비들을 심히 주의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지금으로 말한다면 목사들, 신학자들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들을 왜 경계하라고 하십니까? 은혜가 아니면 알 수 없는 진리인데 자기네들이 마치 다 알고 있다는 식으로 은혜가 아닌 힘의 교육을 하면서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라고 가르치고 있기에, 오히려 천국백성들을 방해하는 장본인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마23:13-15입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도다”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던, 힘으로 대우를 받으려고 하던 그 위선자들이 결국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하여 십자가에서 죽이고 말았던 것만 보더라도, 왜 힘의 그들이 힘이면 다 된다는 식의 잘못된 가르침을 가르쳤다가는 결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위선자 그들이 결국 그들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으면 아니 되는데, 그랬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9:39-41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예수님이 왜 오셨는지에 대하여 말씀을 하시자, 바리새인들이 하는 소리가 우리도 소경인가? 즉 자기는 소경이 아니라는 뜻이 아닙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다고 하십니다. 위선자들, 죄인들의 그 실체를 이미 다 아셨기에 낱낱이 말씀을 해 주시면서,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 어떤 은혜인지를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그럴 것을 이미 다 아셨기에 구약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밝혀주셨던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진리를 듣고 보고서는 알 수 없기에 그래서 이런 말씀도 해 주시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셨다면, 자세하게 밝혀 주시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완전 뒤죽박죽되었을 것입니다. 다 알려 주셨어도 엉망진창인데,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결국 자기네가 마치 진리에 대하여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행세를 하다가 결국 감히 그분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한다는 이 점에 대하여 아무 말씀도 남겨 두시지 않으셨다면, 즉 쉽게 이야기를 해서, 구약을 남겨 두지 않게 하셨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렇게 구약이 생생하게 남아 있어도, 너희들을 보라! 여전히 힘으로 믿고 있지 않니? ~ 말씀을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한다는 이 점에 대하여 말씀을 해 주셔도 엉뚱하게 가고 마는데, 만약에 그 사실을 남겨지 않으셨다면, 제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도 순종하지도 못하여 이단들이 얼마나 더 판을 쳤을까요?~
생생한 구약의 말씀을 우리가 보고 듣고 있기에, 지금 이 정도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인류는 멸망을 당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특히 그럴 것입니다. 왜 구약의 사6장의 그런 말씀을 기록하여 남겨 두지 않았나요?’ 하면서 어떤 불평과 원망과 반감을 가졌을까요? ~ 구약의 이런 말씀을 보고도 듣고도 예수를 믿는 이유가, 믿어야 되는 이유가 세상의 성공, 형통하는데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빛을 받은 성도라면, 그래서 말씀을 이해하고 있는 성도라면, 어떤 특징을 갖게 되는지 아십니까?
지난 시간에 시간이 부족하여 제대로 말씀을 드리지 못했는데, 그리고 지난주에 드린 설교 외에 그 다음의 말씀을 집으로 돌아가서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내용이 오늘 말씀하고 연관이 되고 또 중요하기에 잠시 드립니다. 성도의 특징은 다윗의 시편 32편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3-4절입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성도가 죄를 짓고 회개를 하지 않으면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32:5의 말씀처럼 다 자복하게 됩니다. 자복하다가 보면, 무엇이 복인지를 알게 되는데, 1-2절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죄사함이 어떤 복인지를 깊이 알게 됩니다. 죄사함의 복을 알게 되면, 죄를 더 저지를까요? 그 반대일까요? 당연히 정결하려는 삶을 추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죄의 세력과 늘 싸워야 하는 성도들은 결국 힘보다 훨씬 더 어려운 믿음의 길을 목숨을 걸고 따라가게 됩니다. 전심으로 따라가지만, 어떤가요? 나아지던가요?
날마다 선한 싸움을 싸우게 되지만, 여전히 변화되지 않는 자신을 보게 되는데, 그때마다 기도가 아니라 ‘살려 달라’는 하소연을 하게 됩니다. 나중에는 너무나 힘들어서 울보 정도가 아니라 요나 선지자처럼 도망치고 싶은 마음까지도 들게 됩니다. 정말 어렵습니다. 어렵기에 못난 저를 데리고 가 주세요! 라는 기도도 절로 드리게 됩니다. 이 아픔과 과정이 없는 성도의 현실은 없습니다. 죄의 세력이 얼마나 끈질기고 집요하게 방해를 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고난이 없는 승리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고통 속에서 거하게 되는데, 끝까지 믿음을 가지고 견디면, 그 결과는 시4:7입니다.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감사와 기쁨의 열매를 넘치도록 얻게 될 것입니다. 특히 고통과 고난을 통과할 때, 풍성하고 향기롭고 맛이 일품인 열매를 맺어 최고의 인기를 얻는다면, 얼마나 기쁠까요?~
만약에 비닐하우스 안에서 자란 과일처럼 쉽게 고통 없이 편한 과정 속에서 아무리 풍성한 수확을, 거둘지라도, 맛도 없고 향기도 없고, 그래서 아무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하여 전혀 거래가 되지 않는다면, 이것만큼 짜증나는 일이 있을까요? 그래서 신신당부를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의 은혜로 듣고 볼 수 있게 되었으니, 구약에서의 실패를 통하여 더 이상 방황하지 말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자랑과 기쁨과 찬양이 되시라고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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