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돌교회

01272019 신명기 33:7 본문

주일 설교 말씀

01272019 신명기 33:7

PastorYK 2019. 1. 28. 14:38

제목: 유다의 축복



우리는 복만 받으면 그것으로 만족 해 합니다. 그러나 복만 받으면 만족하여 좋아하는 수준은 마치 무엇과 같을까요? 죄송하지만, 짐승과 전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어른이라면 더더욱 잊지 말아야 하는데, 거저가 어디 있던가요? 은혜 말고는 거저란 없는 법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었으면 감사만 할 것이 아니라 노릇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노릇을 할 생각은 아니하고 복 그 자체만으로 만족을 한다는 것은 삶의 가치, 은혜의 가치를 전혀 모르는 뻔뻔함의 극치입니다. 후안무치(厚顔無恥)합니다. 특히 은혜를 입었으면 그 다음에는 바랄 것이 없어야 됩니다. 

더, 더, 더라고 할 수 없어야 합니다. 받은 은혜만으로도 모든 것, 가족, 가진 전 재산, 인기, 힘, 능력 아니 목숨까지도 다 점점 갈수록 내려놓을 수 있는 반응을 가져야 그것이 바로 은혜를 진정 아는 자요 은혜와 삶을 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린 다시 또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무슨 조건인가 하면, 유다가 받은 축복입니다. 유다가 잘나서 실력이 있어서 남달라서 받은 축복인가, 라는 점입니다. 우린 유다만을 보아도 알 수 있는데, 유다라는 인물이 어떤가요? 큰 복을 받았지만 그가 저지른 죄악은 실로 황당하였다는 것입니다. 

창37:25-28입니다. 25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떼 이스마엘 족속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약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26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은익한들 무엇이 유익할까 27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육이니라 하매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28때에 미디안 사람 상고들이 지나는지라 그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올리고 은 이십개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고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 동생 요셉을 노예로 팔아 버린 것입니다. 

게다가 창38:1-2입니다. 1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서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에게로 나아가니라 2유다가 거기서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을 보고 그를 취하여 동침하니 

동생을 노예로 판 그 후에는 집을 나가 이방여인과 혼인을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도 부족하여 창38:12-30입니다. 며느리 다말과 동침하여 두 아들, 베레스와 세라를 낳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자를 축복하시는데 그 축복이 엄청나지 않던가요? 그래서 은혜입니다. 첫째인 르우벤도 어떤 자격으로 받은 축복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물론 위광이 초등하고 능력이 탁월하였지만 끓는 물과 같은 성격으로 아버지 야곱의 첩 빌하와 동침하므로 장자권을 잃게 되었고 받은 축복은 저주에 불과하였지만 역시 은혜로 살아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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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보살핌 속에서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어갔기에 복이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유다도 보세요! 그의 행실을 보면 엉망이었지만, 엄청난 복을 받습니다. 그래서 은혜입니다. 특히 그가 받은 복을 보면 대단합니다. 원래 유다는 야곱의 12 아들들 중 4번째입니다. 첫째는 르우벤, 둘째는 시므온, 셋째는 레위입니다. 그런데 그가 두 번째로 나오는데 그 이유는 그에 대한 역할과 몫의 중요성과 가치 때문입니다. 유다, 즉 유다 지파의 축복을 보면, 야곱의 축복과 모세의 축복의 내용이 다르지 않습니다. 창49:8-12의 내용을 간추려 보면, 야곱은 유다를 전쟁의 승리자로, 그리고 메시야가 올 때까지 왕위를 누릴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리고 모세는 신33:7에서 유다 지파가 늘 대적을 이길 수 있도록 축복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유다 지파는 초대 사울 왕을 예외하고는 이스라엘의 모든 왕들이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하여 다 유다 지파에서 나왔고, 특히 왕 다윗과 솔로몬 때에는 천하를 다스렸습니다. 수많은 이방 세력 대적, 즉 우상 숭배하는 주변 나라들을 지배하고 결국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다 지파로 오시는데 그 몫을 받았기에 복중의 복을 받았던 지파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써, 복다운 복입니다. 그러나 이 엄청난 복을 받은 유다지파로서 그 여정이 어떻습니까? 어떤 책임이 주어졌습니까? 택함을 받은 이스라엘을 믿음으로 지켜야 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주변의 모든 우상나라들을 제압해야  했던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로서의 삶의 본이 되어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최고요 진정한 창조주시요 구원의 주가 되심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냥 가만히 앉아서, 거저 받은 하늘의 복을 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우상을 믿는 이방 세력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더러운 마음과 싸워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받은, 은혜로 받은 그 승리의 복을 영적인 전쟁이 없이는 만족할 수 없는 복입니다. 왜요? 늘 악의 세력이 공격하고 방해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복이, 복이 되려면 자기 자신이 또는 교회가 연합하여 함께 끝까지 싸우면서 만들어 가야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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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된 우리들이 살아오면서 늘 실수하는 허점이요 약점입니다. 승리의 복, 왕의 복을 받았으면 그 책임을 다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늘 거저먹으려고 합니다. 거지 심보가 발동합니다. 거지 심보는 아무리 큰 복일지라고 복으로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승자요 왕된 그 영광과 칭송과 권세가 거저 된 상급이 아닙니다. 받은 그 복, 주신 그 복을 만들어가야 하고 이루어가야 합니다. 그 복을 이루기 위하여, 목숨을 걸고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상상을 초월하는 모진 훈련의 고통을, 왕으로서, 승리자로서, 어떨 때에는 심한 모욕으로 좌절까지도 맛보면서 끝까지 인내하고 싸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구어낼 수 없는 것이 유다가 받은 복(福)입니다. 복을 받았으니까, 그냥 놀고먹어도 그 복이 유지된다는 생각은 꿈에서조차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았으면서도 실패하는 이유도, 주신 복이 열매 맺기까지는 책임을 가지고, 고통과 인내의 수고를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보세요! 요즘 미국이나 한국을 보면, 복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전의 삶과 비교하면 아니 북한(北韓)같은 나라와 비교하면 엄청난 복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특히 성도들은 자신들이 거저 받은 구원이, 전 역사와 온 우주의 모든 보물을 다 모아 구원을 구입하려고 해도 한 사람의 구원도 살 수 없는 것이 구원의 복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흔들릴 수가 없어야 하고 세상의 것으로 조금도 머뭇거려서도 안 되는 복입니다. 그런데, 거룩한 성도라는 자들이 세상적인 자랑과 기쁨과 존재를 위해서는 전심전력(全心全力)으로 수고를 하면서도, 더욱 우선되고 더욱 중요한 신앙을 위한 삶은 책임 없이, 쉽게 거저 얻었기에 거룩함을 위한 노력을 전혀 하지 않고 있습니다. 죄와 싸울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냥 복이 뚝! 뚝! 떨어질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은혜란 무엇입니까? 이젠 신앙중심으로 살아가라는 뜻에서의 은혜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받은 승리와 왕의 복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도 보세요! 엄마 뱃속으로부터 받은 그 실력, 그 은사일지라도, 성공하고, 달인이 되려면 뼈를 깎아내는 각고(刻苦)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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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부분에서는 특별한 천재이지만, 하루 온종일 또 연습하고 미치도록 노력하고 있지 않던가요? 우리는 복을 참으로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상세력과 싸울 준비가 없는, 빛과 소금의 책임이 뒤따르지 않는 복은 복이 안 됩니다. 조롱과 조소만을 받을 것입니다. 오히려 잘못하면 받은 그 복들이 큰 재앙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아내를 얻는 것은 하나님의 복이요 하나님께 은총을 받은 자라고 잠18:22에서 말씀합니다. 

그럼, 아내를 얻은 남편이 복일지라도 남편으로, 아내로서 서로가 그 책임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요 결국 상처를 주고받고 깨어지는 큰 슬픔, 재앙이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자식도 주신 하늘의 큰 복이지만 자식이 자식의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복이 아니라 재앙덩어리가 됩니다. 때문에 거저 구원의 상상할 수 없는 그 큰 복을 받은 성도일지라도, 그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 복이 안 됩니다. 오히려 성도의 책임(責任)없는 삶은 구원을 받지 않은 편이 나을 정도로, 엄청난 고난을 주십니다. 때문에 책임을 가지고 그 목표를 위하여 열심히 수고를 할 때에 받은 복이 성취가 되는 것이지, 그냥 가만히 있어도 또는 인본주의적인 열심만으로도 하나님께서 주신 그 신령한 하늘의 복이 굴러서 들어오는 법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유다 지파를 모세와 야곱을 통하여 축복하셨지만 유다지파가 하나님의 복을 이루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습니까? 유다의 자손 다윗부터 볼까요? 

다윗의 경우에 삼하7:1-17입니다. "1여호와께서 사방의 모든 대적을 파하사 왕으로 궁에 평안히 거하게 하신 때에 2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찌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3나단이 왕께 고하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무릇 마음에 있는 바를 행하소서 4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5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네가 나를 위하여 나의 거할 집을 건축하겠느냐 6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나니 7무릇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행하는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 8그러므로 이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을 따르는데서 취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고 9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의 이름 같이 네 이름을 존귀케 만들어 주리라 10내가 또 내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한 곳을 정하여 저희를 심고 저희로 자기 곳에 거하여 다시 옮기지 않게 하며 악한 유로 전과 같이 저희를 해하지 못하게 하여 11전에 내가 사사를 명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때와 같지 않게 하고 너를 모든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케 하리라 여호와가 또 네게 이르노니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이루고 12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잘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자식을 네 뒤에 세워 그 나라를 견고케 하리라 13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 나라 위를 영원히 견고케 하리라 14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15내가 네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것 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 16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 17나단이 이 모든 말씀과 이 모든 묵시대로 다윗에게 고하니라"  유다가 모세와 야곱으로부터 받았던 왕과 승리자의 복을 다시 재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왕이 될 다윗은 어린 시절 때부터 왕이 되기 전과 왕이 된 후에도 죽을 때까지 파란만장한 고난과 환란을 지납니다. 물론 그 과정 속에서는 개인의 과오와 실수와 악행까지도 포함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누구든지 시행착오를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때로는 이유 없이도 손가락질도 받아야 합니다. 이유 없이 자기의 것을 빼앗기기도 할 것입니다. 자기가 해 놓고도 남이 가로채가는 경우도 허다할 것입니다. 복은 받았지만 그 복은 결코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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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복을 받은 유다지파의 다윗 후손의 모든 왕들도 보세요! 믿음으로 나라를 지키고 세워가는 그 책임을 고수해야 했습니다. 그 책임을 못할 때에 나라는 전체가 다 흔들리는 험악한 공격을 무지막지하게 받았습니다. 복은 각자가 만들어 가는 과정이 남아 있기에 언제나 피할 수 없는 그 책임이 따릅니다. 이 원리는 유다 지파에만 국한 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지파, 모든 자녀들에게 다 적용 되고 있습니다.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도 보세요! 처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을 것이라는 복을 꿈에서 받습니다. 

창37:5-11입니다. 요셉이 꿈을 꾸고 자기 형들에게 고하매 그들이 그를 더욱 미워하였더라 6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청컨대 나의 꾼 꿈을 들으시오 7우리가 밭에서 곡식을 묶더니 내 단은 일어서고 당신들의 단은 내 단을 둘러서서 절하더이다 8그 형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하고 그 꿈과 그 말을 인하여 그를 더욱 미워하더니 9요셉이 다시 꿈을 꾸고 그 형들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또 꿈을 꾼즉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내게 절하더이다 하니라 10 그가 그 꿈으로 부형에게 고하매 아비가 그를 꾸짖고 그에게 이르되 너의 꾼 꿈이 무엇이냐 나와 네 모와 네 형제들이 참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겠느냐 ” 

그러다가 요셉이 형들로부터 미움을 받아서 어떤 시련을 받습니까? 애굽의 상인들에게 팔려서 노예가 됩니다. 그러나 다시 자신의 주인인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모함을 받아서 감옥에까지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총리가 되지 않습니까? 17세의 어린 소년이 13년간의 모진 훈련 속에서 결국 총리가 되어 자신의 아버지의 전 가족을 구하게 되고 결국 이스라엘 나라가 세워지는데 지대한 공로자가 되게 하십니다. 복을 받았다고 하여 그 복 때문에 고난이 도망가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고난이 더 깊이 더 심하게 옵니다. 

그 유명한 시105:17-19의 말씀을 보세요! “17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18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19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라도 그 책임, 즉 보디발의 아내가 동침하자는 악의 세력과 싸워야 했고 그래서 모진 모욕을 받아내야 했고, 그 속에서 요셉은 주신 복을 현실로 만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라면 이에 합당한 훈련을 받아야 됩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교인들이 책임 없이 가만히 앉아 기도라는 도구만을 통하여 복을 받으려고 합니까? 


정말 곤란합니다. 그것도 어떤 복을 구하고 있습니까? 태반이 세상의 보이는 물질과 건강과 출세를 훈련(訓練)없이 구하고 있습니다. 신앙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 있으니 당연히 온갖 욕을 먹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무런 가책도, 부끄럽지도 않고, 당당하다는 것입니다. 양심이 마비된 좀비가 된 것입니다. 좀비 된 자가 하나님에게 기도해 보세요! 들어 주실 리가 있어요? 물론 자녀들이 원하는 모든 충만한 복들을 나아가도 들어가도 넉넉하게 넘치도록 채워주시고 싶으셔서 안달이 나신 분이 바로 우리들의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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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양심도 없는 좀비와 같은 자들의 기도를 다 들어주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이 아니시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양심도 없고, 순종할 마음도 없는 좀비와 같은 나 같은 놈은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하여, 기도를 하지 않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것은 무엇과 같다고요? 나는 사람 같지 않기에 물도 마시지 않겠고 밥도 먹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말이 됩니까? 쓸데없는 고집과 아집에서 오늘 당장 벗어나 주시기를 당부를 합니다. 자기라는 존재가 얼마나 무식하고 무지하고 방탕하고 방임하여 자기와 가정과 이 세상을 지독하게 썩게 하는, 그래서 애당초 세상에 태어나지 말아야 되는 그런 존재였는데, 놀랍게도 구원을 주셔서 예수 때문에 왕 같은 제사장으로 세상의 세력과 싸우면 이길 수밖에 없는 승리자로 살아가도록 해 주신 것을 생각해 보면, 아니 어떻게 세상을 따라갈 수 있고, 자기 멋대로 삽니까? 참 똑똑한 여러분들에게 질문합니다. 능력이 탁월하고 위광이 초등한 여러분들에게 질문합니다. 자기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장담합니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망하게 하고 더럽히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못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하여 새 마음, 말씀을 듣고 이젠 항복하여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썩은 타락한 마음을 도려내서 새 마음을 주시어 결국 율법을 지키게 하셨던 길이 십자가요 새 언약의 목적입니다. 

렘31:31-33, 겔36:26-28, 롬8:1-4의 말씀입니다. 

"31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세우리라 32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세운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파하였음이니라 33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26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찌라 28내가 너희 열조에게 준 땅에 너희가 거하여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3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도란 자기가 생각했던 자기 자신이 아닙니다. 새롭게 창조된 자들입니다. 
고후5:17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 
그러므로 성도란 복을 받았지만 새로운 길, 좁은 길, 십자가의 길만을 꼭 가야 합니다. 세상의 세력과 무섭게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무엇이 필요하다고요? 구원의 복을 이루시려고 그 모진 훈련의 과정 속으로 이런 저런 모양과 사건으로 정신없이 인도해 주십니다. 훈련을 받으면서 타락한 마음, 더럽고 이기적인 자기의 근본적인 죄의 문제점을 인식하게 하시고, 그런 한심스런 자신을 철저하게 부인하도록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만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이 되는 가장 중요한 깨달음의 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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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외적인 헌금, 봉사, 전도 전에 내적 준비를 요구하십니다. 성경을 먼저 배우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하여 자기를 부인하고 세상의 화려함과 그 능력에 결코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과정을 지나지 않을 경우에, 어떤 증세가 나타납니까? 신앙생활이 힘이 들어서 못합니다. 갈수록 힘들어서 결국 피하게 됩니다. 심하면 실족도 합니다. 신앙이 자라지 못합니다. 영적장애자가 됩니다. 그래서 준비 없이 외적인 종교행위를 우선으로 하면 안 됩니다. 헌금, 봉사, 특히 전도, 선교를 못하도록 막아야 합니다. 고후8:1-5의 말씀을 봅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란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봉사나 헌금이나 전도는 환란에 대한 감사와 극심한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풍성한 연보를 드리는 내적 준비가 된 성도들만이 드릴 수 있고 섬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전까지는 훈련을 받으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한없는 복을 받은 교회가 감당해야 되는 사명이요 역할입니다.  헌금, 봉사, 선교, 전도가 우선이 아닙니다. 자기가 철저하게 깨어지고, 자신을 부인하는 과정 없이, 만약에 성도들을 봉사와 헌금과 전도와 선교하게 했다면 그것은 잘못될 수 있습니다. 

신앙이란 기적과 초월이 아닙니다. 신앙은 내가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그 과정이 우선입니다. 힘든 시간과 고달픈 장소를 능력으로 넘어서 초월이 신앙이 아닙니다. 부딪히면서, 당하면서, 하나씩, 하나씩, 그 아픈 경험을 통하여 믿음이 자라가도록 하십니다. 어떤 고통일지라도 주신 기회로 알고 이겨내려고 몸부림을 치는 이것이 신앙입니다. 끝까지 그 과정을 반듯하게 겪어 내려는 그 자세가 바로 올바른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더 이상 속지 마시고 속았다면, 미련하고 멍청한 자신에 대하여 이를 갈면서, 곧, 당장, 결심하시고 뼈를 깎아내는 고달픈 여정을 지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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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속에서 강건해 지고 온전해 지고 지혜로워 질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의 복을 입은 성도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말씀입니다. 바른 말씀만이 변화를 줍니다. 자라게 됩니다. 롬10:17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말씀은 단비와 같고 아침 이슬과 같습니다. 산천초목이 이슬과 단비없이 자라던가요? 

사람도 같습니다. 말씀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즉 사랑, 감사, 기쁨, 평안, 섬김, 배려, 따뜻함의 열매를 맺을 수 없기에 그런 열매가 없는 삶은 인생(人生)이 아니라 견생(犬生)이라고 합니다. 지금 목사 된 제가 여러분을 무시하며, 짐승 취급하여 기분 나빠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여러분들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를 짐승으로 만들고 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볼까요? 

시49편입니다. 12절-사람은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20절-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유다지파라도 신앙의 책임을 다하지 않으므로, 자기의 자식까지도 불에 태우거나 심지어 자기 민족, 형제자매들이 이스라엘의 왕들의 타락으로 자식을 삶아 먹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유다의 축복은 죄와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과정이 없이는 임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40년 광야 생활에서 언제 하나님께서 제사를 원하셨습니까? 내내 훈련을 받다가 가나안 땅에서 들어간 다음에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출12:25, 13:5의 말씀을 보세요!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여 가나안 사람과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땅 곧 네게 주시려고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시거든 너는 이 달에 이 예식을 지켜"

그런데 요즘 교회를 보세요!  성경을 배워야 되는 훈련, 기도훈련이 없이 자기 뜻대로가 우선이 되어 하나님의 뜻이 전혀 분별이 안 되는 어린 자녀들에게 종교행위인 헌금과 봉사와 전도의 역할을 미리 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위험합니다. 잘못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빠지면 돌아 나오기도 쉽지 않습니다. 신앙, 믿음은 행함으로 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한심스런 족속인지, 이 점에 대한 말씀을 듣고, 듣고, 또 듣는 가운데 자기를 부인하고 이치를 분별하게 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긴 세월이 훈련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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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길은 없습니다. 쉽게 인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미련하시기에 광야 40년을 명하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든지 광야 40년을 지나야 합니다. 이점을 잘 생각 해 보시고, 잘라낼 것은 과감하게 잘라 내시고 새로 시작하시는 굳은 결단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유다의 복을 성취하는 방법입니다. 거저 받은 복에는 늘 책임이 따릅니다. 훈련이 없는, 그래서 책임도 없고, 고난도 감사하지 못하는 자에게의 복은 복이 아닙니다. 

한 곳만 더 봅니다. 이스라엘의 제사장이라는 엄청난 축복을 받았지만, 책임을 다하지 못한 엘리 제사장과 그 가족의 결과를 보세요! 

삼상1:12-16, 2:22-36입니다. 12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리가 그의 입을 주목한즉 13한나가 속으로 말하매 입술만 동하고 음성은 들리지 아니하므로 엘리는 그가 취한줄로 생각한지라 14엘리가 그에게 이르되 네가 언제까지 취하여 있겠느냐 포도주를 끊으라 15한나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여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나는 마음이 슬픈 여자라 포도주나 독주를 마신 것이 아니요 여호와 앞에 나의 심정을 통한것 뿐이오니 16당신의 여종을 악한 여자로 여기지 마옵소서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원통함과 격동됨이 많음을 인함이니이다” 

예언하신대로 이루어집니다. 삼상4:10-18입니다. 10 블레셋 사람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이었으며 11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12당일에 어떤 베냐민 사람이 진에서 달려나와 그 옷을 찢고 그 머리에 티끌을 무릅쓰고 실로에 이르니라 13그가 이를 때는 엘리가 길 곁 자기 의자에 앉아 기다리며 그 마음이 여호와의 궤로 인하여 떨릴 즈음이라 그 사람이 성에 들어오며 고하매 온 성이 부르짖는지라 14엘리가 그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 가로되 이 훤화하는 소리는 어찜이뇨 그 사람이 빨리 와서 엘리에게 고하니 15때에 엘리의 나이 구십 팔이라 그 눈이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16그 사람이 엘리에게 고하되 나는 진중에서 나온 자라 내가 오늘 진중에서 도망하여 왔나이다 엘리가 가로되 내 아들아 일이 어찌 되었느냐 17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18하나님의 궤를 말할 때에 엘리가 자기 의자에서 자빠져 문 곁에서 목이 부러져 죽었으니 나이 많고 비둔한 연고라 그가 이스라엘 사사가 된지 사십년이었더라” 

그 무서운 집안의 재앙이 책임을 다하지 못한 엘리 제사장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이 재앙이 솔로몬에 의하여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왕상2:26-27입니다. "26 왕이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네 고향 아나돗으로 가라 너는 마땅히 죽을 자로되 네가 내 부친 다윗 앞에서 주 여호와의 궤를 메었고 또 내 부친이 모든 환난을 받을 때에 너도 환난을 받았은즉 내가 오늘날 너를 죽이지 아니하노라 하고 27 아비아달을 쫓아내어 여호와의 제사장 직분을 파면하니 여호와께서 실로에서 엘리의 집에 대하여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함이더라” 

물론 제가 드리는 제사장 엘리에 대한 이 말씀이 많은 오해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말씀의 요지는 복은 받았지만, 책임 없는 복은 오히려 이런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인간이 말하는 운명이라든가 팔자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늘 공부를 못하는 자들이 말씀의 point를 벗어나서 내용에 대하여 반감하고 반발하는 경우가 많은데, 물론 이해는 합니다. 그러나 말씀과 다른 생각을 하면 방해를 받게 되고, 자기 손해가 될 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말씀을 듣고 나면, 언제나 “나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운명론에 빠질 수가 있기에, 그런 오해를 막기 위하여 잠시 언급을 합니다. 

성경에서 엘리, 제사장과 같은 말씀은 운명이라든가 팔자의 차원이 아닙니다. 물론 모든 사람은 자신의 장래가 정해 졌지만, 그 정해진 길은 결국 자신이 그 책임을 다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각자가 할 수 있는 그 시작을 하나님께서 십자가로 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엘리 제사장과 가문의 패망에 대한 말씀은 운명이 아니라 불완전한 인간 제사장직의 폐지와 하나님의 충실한 제사장 그리스도의 도래를 예표하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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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을 이루시려고 성경 안에 2, 3중적인 말씀들이 섞여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구분을 분별하지 못하면 혼란스러워 지면서, 심각한 영적방해를 받게 됩니다. 성경은 인간의 팔자나 운명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의지에 대한 말씀은 그간에 많이 해왔었기에 오늘은 시간상 더 이상 언급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연을 드린다면, 인간의 지혜와 능력과 힘으로는 신령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고 더욱 순종할 수 없는, 그 한계를 실제로 게으르고 미련한 엘리 제사장과 그의 가문의 실제 경우를 들어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이런 문제점들을 다 깨끗하게 해결하여 주시겠다는 말씀을 하시려고 동원된 한 가정의 사건입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와 무지로 끝까지 받아야 하는 그 저주를 하나님께서 풀어 주시려고 동원된 엘리요 그의 가문이지, 인간의 정해진 운명을 피할 수 없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들이 엘리 제사장과 그의 두 아들처럼 멋대로, 하고 싶은 대로,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엘리 가문처럼 저주를 받아야 맞지요! 그러나 그 저주의 사슬이 십자가로 이제 해방된 것입니다. 

성경 안에서의 엘리 가정은 우리의 실체를 대변하는 것이요 모세나 요셉, 사무엘 등의 인물들은 이제 구원을 받은 우리 성도들이 가야할, 한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실제의 인물들인 것입니다. 무슨 뜻인지 더 알고 싶으신 분은 성경 공부 시간을 이용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여튼 오늘의 말씀의 내용은 하나님이 주신 복은 반드시 그 책임이 동반된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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