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1/2024 이사야 11:1-16
말씀: 사11:1-16
제목: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
지금 어떤 최악의 상황에 놓였습니까?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슬픔과 아픔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도 하고 계십니까? 억울함이 하늘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어서 자살로 자신의 순결과 정직함을 증명하고 싶으십니까? 한국에 박 원순 서울 전 시장을 아십니까? 물론 그 분이 다 잘할 수는 없었겠지만, 어떤 여인으로부터 me too 운동에 걸려 자살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모함이었다는 이야기가 시중에 나돌고 있습니다. 그 여자는 다른 나라에서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박 원순 씨가 그가 정치적 모함으로 자살까지 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그 후의 그의 그 억울함은 또 어떨까요? 그러나 그 죽음은 절망과 낙심이 준 선택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한국의 노 무현이라는 전직 대통령도 결국 정치적인 모함으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리려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가 하면, 억울하다고 하여 진정한 가치인 생명까지도 포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실은 다 밝혀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자살은 안 됩니다. 자살로 해결하는 것은 해결할 수 있는 일을 막는 경우가 되기에 안 되고 자살은 내일이 없는 죽음이기에 안 됩니다. 그리고 그간의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택하고 있는 것도 결국은 소망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있는데 자살을 해요? 아니지요 ~
그래서 오늘 사11장의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아야 합니다.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이기에 그렇습니다. 소망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점을 우린 성경의 등장인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의인들 중에 얼마나 억울한 경우가 많던가요? 제사를 같이 드렸지만 형 가인에게 돌에 맞아 죽은 아벨은 바른 제사를 드리므로 믿음의 조상으로 영원히 남았고, 특히 야곱의 11번째 아들 요셉은 어린 나이에 형들의 시기와 모함으로 애굽의 노예로 팔렸고, 게다가 그것도 모자라, 집 주인인 시위대장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흠모하여 동침하려고 하다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역시 모함하여 정직했던 그를 감옥으로 끌어넣어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그런 억울한 삶을 최소한 10년 넘게 합니다. 그러나 그는 자살하지 않았습니다. 포기하지도 않았고 끝까지 인내했습니다. 인내하면서 자신의 생명과 인생을 아주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그가 믿음의 큰 증인이 되면서 결국 하나님의 은혜로 풀렸고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리고 가족을 구하게 되고 한 나라인 이스라엘을 세우는 일등공신이 됩니다. 요셉이 최악에서도 포기하지 아니하고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에 끝까지 인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11장의 말씀을 보세요! 어떤가요? 무엇보다도 왜 하나님께서 사11장에서 이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남 유다가 절망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절망입니까?
사7:1-2입니다.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의 아하스 왕 때에 아람의 르신왕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어떤 사람이 다윗 집에 알려 이르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주전734년 그 당시 남 유다를 아하스 왕이 다스릴 때, 아람의 르신과 북이스라엘의 베가 왕이 반 앗수르 정책을 펴고 있었는데, 남 유다는 앗수르와 동맹을 맺기에 그래서 두 나라가 서로 연합하여 남 유다를 침공하게 됩니다. 그 침략으로 인한 모든 남 유다 백성들의 두려움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같이 흔들렸다고 했습니다. 그때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주신 사7장의 말씀을 보시면, 만군의 하나님이 너와 남 유다를 지킨다 일도 걱정 말아라 하셨지만, 아하스 왕은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다시 사8장에서 다시 말씀을 또 하십니다. 이사야에게 두 번째 아들까지 주시면서, 그 아들의 이름을, 침공한 두 나라가 곧 약탈을 당하여 망할 것이라는 뜻의 이름인 ‘마헬살랄하스바스’라고까지 지어 주십니다. 그러나 그래도 아하스는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너무나 화가 나셔서 남 유다와 아하스를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 다시 사9장의 말씀을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희들에게 흑암과 멸시를 지금 받고 있지만, 그러나 큰 빛으로 너희들을 영화롭게 해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물론 그래서 그들이 포기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고 싸우는 자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응원의 말씀인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신 한 아이를 약속하여 주셨지만 역시나 믿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정말 들어도 보아도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다시 사10장의 말씀을 또 주십니다. 10장을 주시면서 ‘너희들 이렇게 멋대로 살면, 망한다’라고 하면서 강력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래도 아하스는 하나님에게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포기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결국 다시 또 사11장의 말씀을 주셨던 것입니다. 어떤 말씀이었던가요?
나는 너희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만군의 하나님이신 내가 너희들을 위하여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게 하여 멸시와 흑암의 삶에서 완전하게 벗어나도록 은혜의 기적을 베풀어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 당시 남 유다 백성과 아하스 왕은 그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지만, 당장 하나도 이루어지는 것을 확인할 수 없었기에, 아니 구약 땐, 보아도 보지도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수준이었기에 그래서 하나님의 그 말씀들을 전혀 믿지 못하여 두려워 할 수밖에 없었던 아하스 왕을 우린 120%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들은 아니지 않습니까? ~ 이미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므로 인하여, 즉 그 은혜로 그간에 해 주셨던 모든 말씀들이 100% 다 이루어졌다는 것을 우리 안에 임하신 여호와의 영을 통하여 다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그 당시 남 유다 백성도 아니고 아하스 왕도 아니고 그들이 전혀 믿을 수 없었던 그 모든 예언의 말씀들이 다 이루어졌다는 것을 큰 빛이요 여호와의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일이 다 확인이 되었는데, 아니 어떻게 왜 다 확인이 된 성도된 우리들이 입김의 무게보다 가벼운 썩어질, 사라질 세상의 문제로, 그런 세상의 공격 때문에 두려워 떨고 있다면, 말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어떻게 낙심할 수 있고, 어떻게 불평할 수 있고, 어떻게 미워할 수 있고, 썩은 세상의 것들인 재물과 승리와 지식을 더 갖지 못해 안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왜 그렇게 스스로 꼬이게 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이젠 이 세상의 힘과 능력 때문에 쩔쩔맬 이유가 없는데, 왜 쩔쩔매면서 하나님의 그 영광을 가릴 수 있을까요? 빛을 받은 성도라면, 어떤 소망을 가지고 재림의 그날을 사모하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아십니까? 특히 여호와의 영을 받은 성전된 우리들의 현실이 최악일지라도, 다 무너지고 깨져서 절체절명에 놓일지라도, 어떻게 반응해야 되는지 아십니까?
시42편과 43편입니다.
자기가 최악인데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절망인데 낙심하지 않고 사슴이 목말라서 시냇물을 간절하게 찾듯이, 자기 영혼이 하나님만을 찾기에 갈급해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있음을 시42:5, 11, 시43:5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 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성도에게 가장 큰 죄악은 포기와 낙심입니다. 우린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였기에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 못했던 구약의 아하스 왕이 아닙니다. 우린 예언된 모든 말씀들이 다 확인이 되어 이젠, 하나님만을 믿고 어떤 최악에서도 주님의 뜻을 따를 수 있게 된 여호와의 영이 임한 자들이 아닙니까?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절망 가운데서도 어떤 소망을 갖게 되던가요?
시27:4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의 성전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집에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복이라고 고백하던가요? 사11장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사11장의 말씀을 요약한다면, 여호와의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어 성전된 자들로서 자기의 자리를 오직 믿음으로 지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시32:1-2를 보시면,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죄사함을 받은 자들이 복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 까지는 모든 사람들은 지은 죄로 인한 절망이었습니다. 절망인 것을 우린 아하스 왕을 통하여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회복이 불가능한 절망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소망이 없는 절체절명의 놓인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셨기에 그래서 주신 말씀이 사11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이 열심에 대한 말씀이 비록 2700년 전의 주신 사11장의 말씀이지만, 여전히 지금 우리들에게도 큰 위로와 힘이 되게 하시지 않던가요? 아니 갈수록 세상이 더욱 타락하면 할수록 사11장의 말씀은 더 큰 능력의 말씀으로 위로와 기쁨이 되게 할 것입니다.
왜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구약의 자녀들도 이렇게 사랑하심을 드러내고 계신다면, 지금 은혜를 입은 자녀들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하시는 그 마음은 구약하고는 비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렇다는 것을 어디에서 알 수 있을까요?
약4:5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아 성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무엇인들 아끼실 수가 있을까요? all in을 하셨기에 롬8:31-32, 37-39의 말씀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봅니다.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 말씀을 믿으십니까? 믿으신다면, 우리 역시 그 어떤 최악의 조건에서도, 죽도록 사랑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all in 하는 것이 당연한 선택이 아닐까요? ~ all in 하는 것이 당연한 선택이어야 하는데, 지금 우리들이 말씀에 all in이 아니라 세상의 성공에 눈을 두고 있기에 그래서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all in 하려는 성도들만이 늘 감사가 가능하게 되고 기쁨이 유지 되면서 심지어 이웃으로부터 받는 아픔과 고통까지도 기쁨으로 여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신 사11장의 말씀인 것을 생각해 보면, 언제부터 신약의 자녀들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이요 창조이었는지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세 전부터 계획된 구원이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얼마나 존귀한 자입니까? 측량이 안 되는 사랑을 입은 자녀들인데 어떤가요? 지금 우린 어떤 고백을 하고 있고 무슨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떻게 그 귀한 자들이 늘 신앙고백까지도 하면서 자기 멋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정말 은혜를 입은 것이 단지 지식적이요 감정적일 뿐이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적이 없는 것은 아닙니까?
나의 영혼은 아파 죽을 지경인데 단지 세상적으로 인정을 받는다고 하여 만족해 한다면, 누가 그를 성도라고 할까요? ~ 진정한 행복의 시작은 죄사함 없이는 시작할 수 없습니다. 죄사함을 받고 주님의 뜻을 전심으로 따라가는 것만큼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삶은 없습니다.
믿으시나요? ~ 문제는 자기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여차하면 자기 멋대로 생각하면서 행하고 있다면, 그건 스스로 속고 있는 거짓된 인생입니다. 진정한 행복과 승리는 소망을 주시고 또 소망을 이루어 주신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자에게만 허락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소망의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타락과 부패로 당장 소망이 전혀 없어, 그래서 절망에 빠져 방황할 수밖에 없었던 아하스를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말씀하신 것은 내가 반드시 너희들에게 완전한 회복과 승리를 이루어 주시겠다는 구원의 연속과 일관된 말씀이었고, 그리고 그 약속하신대로 다 이루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라 사11:6-9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기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기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기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이곳이 어디라고요? 우리들이 살 곳입니다. 우리들이 받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잠시 이곳을 상상 해 보세요! ~
그렇다면 이 큰 약속을 받고, 이 복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 우리들이 지금 자기 정도의 믿음으로 돌아가시면 될까요? 겨우 믿다가 죽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갈 때, 그곳이 천국이 될까요? 지옥이 될까요? 아마도 고개도 들지 못할 것입니다. 마치 꿔다 놓은 보리자루 같이 되고 말 것입니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 같이 되고 싶지 않으시려면, 당당하고 기뻐하며 승리자로 돌아가시려면 세상의 것들은 하나라도 붙들고 있으면 안 됩니다. 다 내려놓으셔야 합니다. 자기 부인이 되어야 합니다. 입김보다 가볍다는 세상의 부, 승리, 영광을 위하여 수고를 하실 것이 아니라, 다 맡기고 목숨을 걸고 순종하셔야 됩니다.
왜요? 주전 1000년경에 살던 구약의 어떤 성도들도 다음과 같은 고백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입은 성전된 성도들로써, 나는 그 이상인가 아닌가? 살펴볼 필요가 있어서 그럽니다.
시27:4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그의 기도 제목은 오직 한 가지인데, 그 한 가지가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이라고 합니다. 이 시편 기자가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시84편을 봅니다. 1-2절을 먼저 봅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시84편 기자의 소망도 다윗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궁전입니다. 은혜를 입은 여러분들의 소망은 어디에 있나요? 무엇입니까? 시편84편 기자의 소망인 하나님의 궁정에서의 삶이 얼마나 컸는지, 그 궁정을 너무나 사모하여 즉 자기의 모든 소망이었기에 자기의 영혼이 쇠약해졌다고 합니다. 너무나 사모하였기에, 소망하였기에 자기의 마음과 몸을 다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합니다.
쓸데없는 망상입니까? 아닙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하고도 비교할 수 없이 가장 큰 복된 소망의 부르짖음이었습니다.
특히 시84:4입니다. “주의 집에서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이 복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시편 84편 기자의 이 고백을 보시면서 무슨 생각이 듭니까? 시편기자는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이 부러워서 죽을 지경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누구입니까?
고전3:16입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나” 우리가 하나님의 집이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까? 시편기자들이 얼마나 부러워할까요? ~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 되었는데, 그렇다면 우린 얼마나 기뻐하고 좋아해야 할까요? 어떤 고백을 드려야 할까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요?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야 할까요? ~ 시편 84편 기자나 다윗 같았으면 자기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고 하면, 너무나 좋아서 평생 좋아 믿음의 감동 속에서 죽는 날까지 불평 없이 살아가지 않았을까요? 아니 누가 자기를 죽이더라도 조금도 두려움 없이 죽어 갔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었을지라도 시편기자는 감사 찬송을 쉬지 않았을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궁정을 너무나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몸이 쇠약해질 때까지 사모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린 어떤가요? 무엇 때문에 쇠약해 져야 했나요? 구약의 성도의 신앙의 크기가 어떤가요? 대단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성전된 나 자신이 세상의 성공과 재물과 즐거움이 목표였다면, 어쩌려고 합니까? 이런 시편기자의 고백과 소망을 보시면서 지금 자기의 영혼의 상태가 어떤지 느낄 수 있나요? ~ 그동안에 자기의 그 어리석음 때문에 자기의 영혼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슬퍼했는지, 참담했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까?
우린 시편기자의 소망을 보면서 왜 하나님께서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는지, 왜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셨는지, 왜 악을 선으로 갚으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너희들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거룩한 성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시편 84편의 기자와 다윗의 소망이 실은 이새의 한 줄기에서 핀 그 싹인 예수님을 통하여, 여호와의 영, 즉 지혜요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성취가 된 것입니다. 시84편 기자와 다윗이 지금 은혜를 입어 성전된 우리들을 얼마나 부러워했을까요?
그런데 우린,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우린, 하나님의 성전이 된 우린, 왜 이렇게 미련하고 어리석을 수가 있나요? 썩어질 세상의 성공과 부 때문에 나와 함께 하시겠다는 임마누엘의 주님을 외면할 수 있을까요? 아니 어떻게 주님을 따돌림, 왕따를 시켜버릴 수 있나요? 그래서 지금도 주님께서 나의 마음의 문 밖에서 두드리게 하신다면, 그건 아닙니다. 아니 어떻게 큰 빛이신 주님께서 은혜를 입은 자기 제자들에게 외면을 당할 수 있단 말입니까? ~ 그분은 여호와의 영, 즉 지혜와 총명의 영, 모략과 재능의 영,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신데, 어떻게 은혜를 입은 자가 감히 하나님 앞에서 왕 노릇하려고 합니까?~
소망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젠 구원의 소망도 지나서, 어떤 곳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나요?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기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기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기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여기가 우리가 거할 영원한 처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세상의 무엇이 나를 괴롭힐 수 있을까요? 이 세상의 무엇이 나를 기쁘게 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이제 돌아갈 나의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면, 이 하나님의 나라는 100% 보장된 나의 소망이기에, 나의 오른 뺨을 때려도 왼 뺨을 돌려댈 수 있게 합니다. 사11:6-9의 말씀은 악을 선으로 넉넉히 갚을 수 있게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신 사11장은 특히 쩔쩔매고 있는 모든 자녀들에게 인내하여 이겨내라고 주신 소망의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