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92019 여호수아 8:1-35
제목: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의 전투 차이
이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십니다.
1절입니다.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라 군사를 다 거느리고 일어나 아이로 올라가라 보라 내가 아이 성과 그 백성과 그 성읍과 그 땅을 다 네 손에 주었노니, 너는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하되 오직 거기서 탈취한 물건과 가축은 스스로 취하라 너는 성 뒤에 복병할지니라”
이제 아이 성에서의 실패한 문제가 해결이 되어 그 싸움을 허락하십니다. 그런데 보세요! 아이 성에서의 얻은 모든 전리품은 다 너희들의 몫이라고 하시면서 아이 성 뒤에 복병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물론 7장에서도 아이 성을 공격할 때, 여리고 성처럼 성을 돌면서 성이 무너지게 하신 것이 아니라 이젠 너희들이 공격하여 그들과 싸워서 이겨내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여리고 성처럼 이번 아이 성 전쟁도 해 주시지, 그렇게 해 주시지 않는 것일까요? 수8장에서도 확인을 하셨듯이, 전략을 짜도록 하여 아이 성과의 전쟁을 하라고 명하십니다. 어떤 전략인지 자세한 내용은 수8:3-23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에 여호수아가 일어나서 군사와 함께 아이로 올라가려 하여 용사 삼만명을 뽑아 밤에 보내며 그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성읍 뒤로 가서 성읍을 향하고 매복하되 그 성읍에 너무 멀리 하지 말고 다 스스로 예비하라 나와 나를 좇는 모든 백성은 다 성읍으로 가까이 가리니 그들이 처음과 같이 우리에게로 쳐 올라 올것이라 그리할 때에 우리가 그들 앞에서 도망하면 그들이 나와서 우리를 따르며 스스로 이르기를 그들이 처음과 같이 우리 앞에서 도망한다 하고 우리의 유인을 받아 그 성읍에서 멀리 떠날것이라 우리가 그 앞에서 도망하거든 너희는 매복한 곳에서 일어나서 그 성읍을 점령하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에 붙이시리라 너희가 성읍을 취하거든 그것을 불살라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명하였느니라 하고 그들을 보내매 그들이 복병할 곳으로 가서 아이 서편 벧엘과 아이 사이에 매복하였고 여호수아는 그 밤에 백성 가운데서 잤더라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서 백성을 점고하고 이스라엘 장로들로 더불어 백성 앞서 아이로 올라가매 그를 좇은 군사가 다 올라가서 성읍 앞에 가까이 이르러 아이 북편에 진 치니 그와 아이 사이에는 한 골짜기가 있었더라 그가 오천명 가량을 택하여 성읍 서편 벧엘과 아이 사이에 또 매복시키니 이와 같이 성읍 북편에는 온 군대가 있고 성읍 서편에는 복병이 있었더라 여호수아가 그 밤에 골짜기 가운데로 들어가니 아이 왕이 이를 보고 그 성읍 백성과 함께 일찌기 일어나서 급히 나가 아라바 앞에 이르러 정한 때에 이스라엘과 싸우려 하고 성읍 뒤에 복병이 있는 줄은 알지 못하였더라 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이 그들 앞에서 거짓 패하여 광야 길로 도망하매 그 성 모든 백성이 그들을 따르려고 모여서 여호수아를 따르며 유인함을 입어 성을 멀리 떠나니 아이와 벧엘에 이스라엘을 따라가지 아니한 자가 하나도 없으며 성문을 열어 놓고 이스라엘을 따랐더라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아이를 가리키라 내가 이 성읍을 네 손에 주리라 여호수아가 그 손에 잡은 단창을 들어 성읍을 가리키니 그 손을 드는 순간에 복병이 그 처소에서 급히 일어나 성읍에 달려 들어가서 점령하고 곧 성읍에 불을 놓았더라 아이 사람이 뒤를 돌아 본즉 그 성읍에 연기가 하늘에 닿은 것이 보이니 이 길로도 저 길로도 도망할 수 없이 되었고 광야로 도망하던 이스라엘 백성은 그 따르던 자에게로 돌이켰더라 여호수아와 온 이스라엘이 그 복병이 성읍을 점령함과 성읍에 연기가 오름을 보고 다시 돌이켜 아이 사람을 죽이고 복병도 성읍에서 나와 그들을 치매 그들이 이스라엘 중간에 든지라 혹은 이편에서 혹은 저편에서 쳐 죽여서 한 사람도 남거나 도망하지 못하게 하였고 아이 왕을 사로잡아 여호수아 앞으로 끌어 왔더라”
이렇게 다른 작전으로 아이 성과 싸워서 승리케 하시는 데에는 그 이유가 있습니다.
신앙의 균형입니다. 초월성과 내재성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여리고 성은 하나님의 전쟁이고, 아이 성은 사람의 전쟁이라고 하면서 여리고 성만이 믿음의 전쟁이요, 진정한 승리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두 전쟁이 동일한 전쟁이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쟁인 여리고 성만 믿음이고 사람이 한 아이 성은 믿음이 아니다, 라고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눌 수 없다, 다른 표현을 쓰자면 아이 성은 지성의 전쟁이라면 여리고 성은 영성의 전쟁이 되는 것으로 둘 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같다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믿음의 합리성, 즉 현실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오히려 지성을 향하여 열려 있는 신앙을 가지고 있어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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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만 있으면, 현실을 무시하고 교만해도 된다거나, 믿음이 있으면 배울 필요도 없기에 지성의 불필요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전8:1-13입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시는바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분 밖에 없는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성함이 없으리라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믿음이 있기에 무엇이든지 다 먹을 수 있으나 그러나 믿음이 약한 성도가 보고 실족하게 된다면 그 성도 앞에서는 결코 죽어도 우상 제물은 영원히 먹지 않겠다는 겸손한 선택이 올바른 신앙, 건강한 성도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도 그러는지는 몰라도 아마도 그러고 있을 것입니다. 여전할 것입니다. 나는 구원을 받았고, 너는 받지 못했다고 하면서 건방을 떠는 자들, 또는 나는 방언하는데 너는 못하니? 하면서 상처를 주고 비교하여 관계를 무너뜨리는 그런 자들이 있기에 여리고 성도, 아이 성도 다 믿음의 전쟁이지, 이 두 전쟁은 다르다고 하면서 여리고 성 전쟁만 믿음의 전쟁이라고 고집하고 주장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전14:1-14입니다.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방언을 말하는 자는 사람에게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하나니 이는 알아 듣는 자가 없고 그 영으로 비밀을 말함이니라 그러나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혹 저나 거문고와 같이 생명 없는 것이 소리를 낼 때에 그 음의 분별을 내지 아니하면 저 부는 것인지 거문고 타는 것인지 어찌 알게 되리요 만일 나팔이 분명치 못한 소리를 내면 누가 전쟁을 예비하리요 이와 같이 너희도 혀로서 알아 듣기 쉬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그 말하는 것을 어찌 알리요 이는 허공에다 말하는 것이라 세상에 소리의 종류가 이같이 많되 뜻 없는 소리는 없나니 그러므로 내가 그 소리의 뜻을 알지 못하면 내가 말하는 자에게 야만이 되고 말하는 자도 내게 야만이 되리니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하기를 구하라 그러므로 방언을 말하는 자는 통역하기를 기도할찌니 내가 만일 방언으로 기도하면 나의 영이 기도하거니와 나의 마음은 열매를 맺히지 못하리라”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는 방언을 보세요! 완전 영적인 초월적 은사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무엇이라고 하던가요? 고전14:4-5에서 방언은 덕을 세우는 데 있기에 꼭 통역을 세워야 한다고 하시면서 만약에 세우지 아니하면, (1)알지 못하게 되고 (2)허공에다 말하는 것이 되고, 심지어 (3)야만이 된다고 합니다.
특히 고전14:19의 말씀을 보세요!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신앙이란 소통입니다. 그런데 소통이 되지 않는다면 방언의 방언을 주시더라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부딪치고 있는 자신의 어떤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나님의 능력만을 구하는 기복신앙은 소통이 되지 않는 세상의 원리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을 위한 고난이기 때문에 고난에서 벗어나려는 기복신앙은 마치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하는 것과 같기에, 지성 없는 영성만을 주장하면, 통역 없는 방언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지금 교회의 문제점, 성도라고 하는 지체들이 늘 어디에서 문제가 되고 있습니까? 여리고 성에서 보여주신 그 능력만을 가지고 자기의 세상 고민과 고통들을 해결하려고 전심으로 매달리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으로 땀 흘린 아이 성 전쟁은 아예 상관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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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무시한, 원칙이 없이 오직 믿음으로만 만사 해결하려고 합니다. 아이 성 전쟁처럼 땀을 흘리는 그런 수고를 하지 않는 것이 고급 신앙이라고 착각하는데 아닙니다. 그럼, 다 버리고 오신 예수님은 저급 신앙이고 오직 앉아서 은사로 귀신을 쫓고 능력을 발휘하면서 돈을 받고 온갖 음란한 짓을 하면서 돈으로 해결하고 있는 그런 목사들은 고급 신앙입니까? 그러나 이미 그런 식으로 신앙이 나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런 어리석은 구분과 교만을 부려서는 안 되기에 아이 성 전쟁도 주신 것입니다. 아이 성을 성도들이 땀을 흘리면서 무너뜨리게 하신 것입니다. 믿음의 전쟁을 위하여 밤새도록 아이 성 주변에서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하게 하셨고, 다 잠복케 하신 것에 대하여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배워야 할 것입니다. 아이 성과의 전쟁에서 이룬, 그 승리가, 행함이 없이 기도로만 이룬 것이 아니다, 믿음의 너희들이 흘린 땀, 고통스러운 순종도 믿음이다!라는 것입니다.
같이 슬퍼하고 같이 즐거워할 수 있는 겸손하고 따뜻한 믿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을 받은 성도로서 당연한 반응이요 선택이어야 했던 것입니다.
약2:1-5의 말씀을 봅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 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구분하지 말라! 교만하지 말라! 는 것입니다.
그리고 약2:18입니다.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믿음이 있느냐? 그럼 행함을 보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우린 어떤 착각을 하고 있던가요? 동고동락으로 땀 흘리는 목사보다는 기도 하나 만으로 해결하는 목사를 능력의 목사로 오해를 하고 있기에 결국 문제가 되어 큰 교회 선호 사상이 팽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판 차원이 아닙니다. 이해가 되세요?
만약에 모든 문제점들을 여리고 성에서처럼 하나님께서 다 해결하여 주신다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요? 하나님의 목적과 전혀 다른 타락한 기복신앙만이 남고 말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출19:5-6입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1)언약을 지켜야 하고 (2)제사장 나라가 되어야 하고 (3)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자기 부인입니다. 전부 다 맡겨버리라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동행하라는 것입니다. 넓은 길을 좋아하는 옛 자기를 제거하여 좁은 길을 가야 되는 새로운 목표를 가진 자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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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성도 된 너희들의 그 인격이 자기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의 변화가 목적이신데, 여리고 성에서처럼 다 해 주신다면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인격의 변화가 이루어질까요? 훈련을 전혀 받은 일이 없는 군인이 군인으로서의 책임과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군인다우려면 어떤 훈련을 받아야 되던가요? 콧물 눈물 심지어 뼈를 깎아내야 되는 지옥훈련까지도 받아야 됩니다. 그런데 성도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면 어떤 훈련과 과정이 있어야 할까요? 두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해 주시는 말씀이 시24:1-6입니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여호와께서 그 터를 바다 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데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저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야곱의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로다(셀라)”
(1)너희들의 손은 깨끗해야 하고 (2)마음도 청결해야 하고 (3)뜻을 허탄한 곳에 두지 말아야 하고 (4)거짓 맹세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된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 있으면 우리들의 한없이 더러웠던 죄의 손이 저절로 깨끗해지고, 새까맣게 더러운 죄로 뒤덮여 있던 우리들의 마음도 청결하게 되고, 늘 헛된 세상의 욕망을 이루려던 자신의 허탄한 뜻이 사라지고, 노력과 훈련이 없이 단지 하나님의 능력만으로 그동안에 늘어놓았던 자신의 그 거짓 맹세들까지도 다 해결이 됩니까?
천지가 개벽이 되어도 안 됩니다. 하늘의 별이 다 떨어져도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취소되기 전에는 안 될 것입니다. 그 전에는 불가능합니다. 구원을 받았어도 결코 깨끗해질 수 없기에, 우린 평생 훈련 속에서 힘겹게, 그러나 기쁘고 당당하게 살아가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바른 말씀을 늘 배워야 하고 그 말씀을 근거로 하여 골방에서의 기도를 결코 쉬어서는 안 됩니다.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습관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러나 해 보셨는지 모르지만, 얼마나 유지할 수 있던가요? 말씀을 보고 기도하는 선택이 가장 절대 우선인데도 얼마나 유지하기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지, 아는 성도만이 알기에, 솔직히 말씀을 드리면 말씀을 보고 기도하는 날마다의 그 피할 수 없는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지옥으로 떨어지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까지도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겨내셔야 합니다. 지면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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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과정이 아무리 힘들어도 끝까지 이겨내야지만 점점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서서히 주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이 기본적인 선택이 몸에 배지 아니하시면, 오직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하나님만을 바라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거룩하신 하나님을 무당으로 여기게 되는데, 그것보다 끔찍한 죄는 없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은혜로 구원은 받았지만 자신의 옛 세상 것들이 얼마나 뿌리 깊이 박혀 있는지 다윗이 어떤 고백을 하던가요?
시51:5입니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이 고백은 다윗이 하나님 말씀을 제대로 깨닫고 있다는 증거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이렇게 제대로 깨닫게 되면, 그다음에 어떤 기도와 고백이 터지는지를 아세요?
시51:9-19입니다.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도말하소서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그러하면 내가 범죄자에게 주의 도를 가르치리니 죄인들이 주께 돌아오리이다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주여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주의 은택으로 시온에 선을 행하시고 예루살렘성을 쌓으소서 그 때에 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 저희가 수소로 주의 단에 드리리이다”
때문에 기적과 기사로 능력을 행하시는 그 이유는 하나님의 그 능력을 알고, 더 이상 너희들이 하고 싶은 대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쉽게 살지 말라! 현실도피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그 능력을 알았다면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도망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변명, 핑계 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고집을 피우면서, 마치 하나님이 아니 계신 냥, 사랑의 하나님은 자기에게 저주를 하시는 분이 아닌 냥, 다들 썩어버렸기에 다 그렇게 멋대로 살고 있으니, 그래서 나도 괜찮을 수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데, 아간을 보세요! 몰래 도둑질하고 괜찮을 것이라고 했다가 온 가족이 몰살을 당했습니다. 아간이 당한 이 무서운 저주를 보고 두려워하지 않으신다면, 그 사람은 제2의 아간이 됩니다. 아간의 자손이 되지 않으시려면, 자신의 치유와 회복의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시려면, 고통을 유발하는 그 원인을 다윗처럼 찾아내서 심히 아파할 때, 비로소 진정한 치유와 회복이 시작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드리는 경고의 말씀인데,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여전히 아간의 탐욕으로 인한 그 저주를 보고서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면, 조만간에 사달이 나도 날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생각하는 그 사랑과 같고 하면 안 됩니다. 전혀 다릅니다.
신27:11-15입니다. “모세가 당일에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가 요단을 건넌 후에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요셉과 베냐민은 백성을 축복하기 위하여 그리심산에 서고 르우벤과 갓과 아셀과 스불론과 단과 납달리는 저주하기 위하여 에발산에 서고 레위 사람은 큰 소리로 이스라엘 모든 사람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장색의 손으로 조각하였거나 부어 만든 우상은 여호와께 가증하니 그것을 만들어 은밀히 세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응답하여 아멘 할찌니라”
이 말씀이 다시 수8:31-35에서도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 말씀을 봅니다.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대로 철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와 화목제를 그 위에 드렸으며 여호수아가 거기서 모세의 기록한 율법을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서 그 돌에 기록하매 온 이스라엘과 그 장로들과 유사들과 재판장들과 본토인 뿐 아니라 이방인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레위 사람 제사장들 앞에서 궤의 좌우에 서되 절반은 그리심산 앞에, 절반은 에발산 앞에 섰으니 이는 이왕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축복하라고 명한대로 함이라 그 후에 여호수아가 무릇 율법책에 기록된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모세의 명한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인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거하는 객들 앞에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아니한다면, 택함을 받은 자녀들일지라도 하나님의 저주에서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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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우린 저주가 아닌 축복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결코 아닙니다.
신27:16-26의 말씀을 보세요!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그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소경으로 길을 잃게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객이나 고아나 과부의 송사를 억울케 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계모와 구합하는 자는 그 아비의 하체를 드러내었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무릇 짐승과 교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그 자매 곧 그 아비의 딸이나 어미의 딸과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장모와 구합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그 이웃을 암살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무죄자를 죽이려고 뇌물을 받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찌니라”
그런데 이단세력들과 거짓말을 하는 선지자들이 어떤 식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미혹했던가요?
렘14:13-14, 렘23:16-17입니다. “이에 내가 가로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칼을 보지 아니하겠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이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시리라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선지자들이 내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도다 나는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고 그들에게 명하거나 이르지 아니하였거늘 그들이 거짓 계시와 복술과 허탄한 것과 자기 마음의 속임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도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17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저주가 없다고 이렇게 백성을 미혹하는 자들을 향하여 하나님께서 무엇이라고 하시던가요!
겔13:17-18입니다. “너 인자야 너의 백성 중 자기 마음에서 나는대로 예언하는 부녀들을 대면하여 쳐서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고자 하여 방석을 모든 팔뚝에 꿰어 매고 수건을 키가 큰 자나 작은 자의 머리를 위하여 만드는 부녀들에게 화 있을찐저 너희가 어찌하여 내 백성의 영혼을 사냥하면서 자기를 위하여 영혼을 살리려하느냐”
사람의 영혼을 사냥하는 자라고까지 합니다. 그러나 참 선지자들을 보세요!
미3:8입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
지금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능력의 하나님만을 믿고 흘려야 되는 믿음의 땀을 흘릴 생각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지 기도로 세상 문제만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 전쟁에서도 그런 전술을 가지고 잠도 자지 못하고 나아가서 싸우게 하셨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초월 기적만이 아니라 내재적인 신앙을 가지고 현실 속에서 부딪치면서 깨닫고 주님의 인격을 닮아, 하나님의 날, 심판의 날에 칭찬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나를 괴롭히시고 힘들게 하시냐고 불평을 하는데, 그것은 신앙의 기적과 능력만을 구하는 기복신앙 때문에 나타나는 반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헛된 복을 이야기하는 그 복음은 다른 복음입니다.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속고 있는 자기가 자기의 영혼을 사냥하는 꼴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구원을 통하여 인격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인격의 변화인 거룩함과 점과 흠이 없는 성도가 되려면, 능력과 초월의 하나님을 믿기에 어떻게 해야 된다고요?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려놓지 못하면 아간이 될 뿐입니다. 자기의 탐욕을 제압할 수 없게 됩니다.
기생 라합의 목숨을 건 선택을 못합니다. 그런데 이방 여인 기생 라합도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듣고 나서 목숨을 걸고 정탐꾼을 살려 주는데, 왜 이스라엘은 여전히 멋대로 하지 못해 구약 내내 실패 속에서 방황해야 했을까요? 실패한 이스라엘 민족은 단지 믿음을 국가적, 민족적, 혈통적으로만 생각했던 것입니다. 다른 표현으로는 선택받지 못했기에 실패했던 것입니다. 선택을 받지 못하면 욕심과 이기심과 고집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경건의 훈련을 원하지 않게 됩니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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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아간도 결국 도둑질을 합니다. 그러나 택함을 받은 성도라면,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즉 거룩한 백성, 점과 흠이 없는 성도가 되시라고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스도의 말씀, 다른 복음이 아닌 복음만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옛 자신과 싸워야 하는데 그 싸움의 시작은 골방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지만, 성도라도 진정한 승자가 됩니다. 진정한 승자는 사람과 세상의 기준에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요?
사51:7-8입니다. “의를 아는 자들아, 마음에 내 율법이 있는 백성들아, 너희는 나를 듣고 사람의 훼방을 두려워 말라 사람의 비방에 놀라지 말라 그들은 옷 같이 좀에게 먹힐 것이며 그들은 양털 같이 벌레에게 먹힐 것이로되 나의 의는 영원히 있겠고 나의 구원은 세세에 미치리라”
돈에 빠지고 세상의 즐거움으로 사는 옛 자기와 세상의 것들은 결국 다 사라지고야 말지만, 하나님의 의, 구원은 영원히 남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초월성, 그 능력은 하나님의 존재 여부를 위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을 믿게 하는데 초보적인 신앙 단계에서나 필요한 것이 하나님의 기적과 기사입니다. 물론 특별하게 역사하셔서 더욱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여 더욱 큰 신앙인으로 변화시킬 때도 있지만, 성도로서 놓치지 말아야 되는 것은 가장 일반적이고 평범한 자기의 역할과 책임을 끝까지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여, 일상적인 자기의 역할과 책임들을 메꾸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자랑도 아니고, 쉽게 사는 것도 아니고, 삶의 변화입니다. 삶의 변화는 즉 타락한 성품을 변화시키는 길은 모진 훈련과정 속에서 준비가 되기에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자녀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전쟁, 질병, 배고픔, 사고, 화재, 지진, 폭풍, 재앙들과 불치병 등 여러 가지 환란을 다 겪게 하십니다.
히12:5-13, 벧전2:18-20, 4:12-16, 5:10의 말씀을 봅니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체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여 살려 하지 않겠느냐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예케 하시느니라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달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그러므로 피곤한 손과 연약한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너희 발을 위하여 곧은 길을 만들어 저는 다리로 하여금 어그러지지 않고 고침을 받게 하라”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특히 롬5:1-5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구원을 받은 성도들에게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방법은 여리고 성과 같은 그런 하나님의 능력만으로는 안 되기에 세상 사람들이 사용하는 힘든 매복까지도 동원하셔서 어려운 전쟁을 치르게 하셨던 것입니다. 자녀들을 거의 늘 아니 평생을 힘들게 합니다. 특히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도 얼마나 주도면밀한 작전을 세우시는지 수 8장을 보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만약에 신앙의 핵심이 능력과 초월이었다면 하나님께서도 여리고 성처럼, 아이 성 전쟁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쉽게 이긴 전쟁 이야기만을 기록해 놓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기적과 기사로 쉽게 승리한 여리고 성 전투만을 생각하여 현실 안에서 누구든지 지나야 되는 그 힘든 삶, 어려운 길을 원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원리하고는 아주 거리가 먼 잘못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궁극적인 뜻이 단지, 기도, 금식, 헌금, 봉사, 또는 능력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 금식, 헌금, 봉사, 각종 여러 은사들까지도 결국은 일상적인 생활을 남들처럼 같이 힘들게 수고하면서 서서히 다듬어 가는 데 있는 것입니다.
삶의 본(本)은 기도, 금식, 헌금, 봉사, 또는 능력이 아니라 보편적인 힘들고 어려운 현실을 열심히 요령 피우지 않고 야무지게 최선을 다할 때, 그리고 대충이 아닌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워서 수고하는 그것이 바른 신앙인의 역할이 되기에 주도면밀한 계획 하에 어렵게 싸운 아이 성 전쟁 이야기를 기록해 놓으신 것입니다. 능력만을 의지하여 고통스러운 힘든 현실의 역할과 책임을 열심히 하지 않으려는 현실도피 자인 성도들 때문에 수8장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