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설교 말씀

10/3/2021 열왕기하 4:1~44

PastorYK 2021. 10. 4. 08:10

말씀: 왕하 4:1-44                                 

제목: 엘리사의 기적들

 

왜 많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많은 기적들을 행하여 주시는 것일까요? 기적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몇 가지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먼저 어떤 기적인지를 봅니다. (1) 빚으로 과부의 두 아들이 종이 될 형편을 알고 가지고 온 주변의 모든 그릇에 기름을 가득 채워 주시므로 가족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시는 기적입니다. (2) 자식 없는 부부에게 자식까지도 낳게 해 주시고 그리고 주신 그 아들이 죽게 되자, 다시 살려 주신 기적입니다 (3) 가뭄으로 배고파하는 선지 동산 신학생들을 위하여 준비한 국에 발견된 독을 제거해 주시므로 먹게 하여 주시는 기적입니다. 그리고 (4) 얼마 안 되는 보리떡과 채소로 배고파하는 무리들을 넉넉하게 먹게 한 기적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연상케 합니다. 

 

이런 놀라운 기적이 지금도 교회에서 행하여진다면, 그 교회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어떤 맹독이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질문합니다. 왜 종교인들을 비롯하여 기독교인들까지도 아니 모든 사람들은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그런 기적들을 좋아하는 것일까요? 왜 기적이 자기 신앙의 중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나요? 기적을 좋아하고 신앙의 중심이 되는 이유는 지금 놓인 자기의 고달픈 그 현실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모르기 때문이요 자기의 현실을 비교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요? 그러나 자기의 고된 현실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오늘의 안전과 내일의 성장을 막는 아주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기의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자들이 그래서 얼마나 위험했었는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쉽게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 저지른 짓을 보면, 능력을 받으려고 40일 금식기도를 하다가 죽기까지도 하고, 어떤 목회자들처럼 죽은 교인, 아내를 기도로 살려보겠다고, 하다가, 시체 유기죄로 구속되었고, 능력의 목사 기도로 질병의 문제 해결을 받으려고 찾아다니다가 더욱 병이 깊어져 불구가 되어 버리는 지경까지 가서, 속았다고 울고불고 통곡하는 경우도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보지 않았습니까? 이런 사례를 보면, 성경에서 하나님의 종들을 통하여 하시는 하나님의 기적들에 대한 바른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기의 필요를 채우려고 한다거나, 쉬운 승리를 얻게 하시려고 주신 기적들이 아닙니다. 

 

시작과 과정을 건너뛰어서 원하는 열매, 결과를 가져보겠다는 것이 아닙니까? 도둑이지요! 우리 예수님께서 오셔서 바다 위를 걸으시고, 폭풍을 잠잠케 하시고, 병든 자를 고쳐 주시고 장님의 눈이 뜨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수천 명이 먹고도 남는 것을 보면서, 허다한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녔지만, 결국 나중에는 배신하고 돌아간 것만을 보더라도, 쉬운 승리로 형통해 보겠다는 심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기 없는 성장을 바라고 있고, 통증 없는 치료를 받으려고 합니다. 특히 십자가 없는 부활을 다들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웅이 나타나면 어떤 반응을 보이던가요? 대대적으로 반깁니다. 그런 기적을 행하는 인물을 만날 때마다, 환호를 보내고 단지 보기만 하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모여드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대리만족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해결되지 않고 늘 그대로입니다. 현실이 힘들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결 해 보라고 주신 기적이 아니라 그 반대입니다. 기적의 하나님을 믿고 현실의 참담한 아픔을 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능력의 나, 만군의 하나님을 믿고 쉽게 해결하려고 하지 말라는 차원에서의 기적입니다. 자기의 당면한 문제,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한 현실의 고통 때문에, 성도라면, 도망가지 말고 부딪칠 때, 인정하고, 자기의 역할을 끝까지 믿음을 가지고 지켜낼 때, 그 자녀에게 아픔의 오늘이 가득 덮인 눈이 녹듯이, 제거되면서 회복과 승리의 맛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을 위한 기적입니다. 그래서 말씀 곳곳에서 어떤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던가요?

 

시18:1-2입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시68:19입니다.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시81:6입니다. “이르시되 내가 그의 어깨에서 짐을 벗기고 그의 손에서 광주리를 놓게 하였도다” 

 

우리는 자기의 현실의 아픔을 믿음으로 견디면서 이런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쉽게 해결하려고 방법을 동원하거나 쉬운 승리를 찾는다면, 시편기자들의 이런 고백은 근처도 가지 못할 것입니다. 아니 그 사람은 죽을 때까지 지옥을 방불 하는 삶을 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쉬운 길, 쉬운 승리는 그래서 위험합니다. 능력을 받아서 고난을 받지 않는 것이 복이라고 했던, 예수님의 십자가가 자녀들의 고난을 해결하는 것이라고 했던 주변의 목사들의 삶을 보세요! ~ 예수님의 십자가와 기적은 성도들의 현실의 고난을 해결하시려는데 있지 않습니다

 

능력의 말씀과 치유의 손길로 오셔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위로로 위안을 주셨지만, 그렇다고 하여 따르던 모든 사람들의 당면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여 주셨나요?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원하는 세상적인 현실의 만족과 형통을 이루어 주시려고 그래서 행하신 기적들이셨나요? 역시나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 반대로, 현실의 고통을 통하여 성장과 회복을 이루어야 된다고 보여주신 기적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도 보세요! 

 

영웅들처럼, 승리자들처럼 대대적인 환영의 퍼레이드와 함께 멋진 말을 타고 입성하신 것이 아니라, 롤스로이를 타고 오실 수 있고, 천사들과 같이 구름을 타고 오실 수도 있었지만, 그러나 어릿광대처럼 당나귀를 타고 오신 것을 우린 기억해야 합니다. 왜요? 왜 그런 모습으로 오셔야 했나요? 쉬운 승리에서 벗어나, 인내하는 성숙한 성도가 되라는 것이었습니다. 쉬운 승리에 집착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미련한 선택이기에 그래서 그렇게 입성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날의 예루살렘 입성을 깊이 길이길이 기억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기적들은 현실의 문제를 쉽게 풀어, 쉬운 형통, 승리를 하게 하시려는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기적들이 주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자녀들, 모두가 스스로 기만하지 말고, 쉽게 승리하려고 하지 말고, 기적의 하나님을 믿고 자기의 그 고통을 부딪쳐 견디면서 끝까지 버텨나가라는 뜻에서의 기적입니다. 우리들은 엘리사의 이 기적들을 보면서 지난 저녁에 어떤 생각을 하셨습니까? 나의 필요를 채워주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 보이셨나요? 네~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쉬운 승리를 바라는 그 자체가 위험한 것입니다. 더 더러워지고 더 부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쉬운 성공을 바라는 지금 어떤 영화가 인기를 받고 있던가요?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인의 인기를 받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그만큼 세상이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 알게 합니다. 힘의 삶이 그렇듯이, 힘의 신앙도 결국 나눔과 여유와 감사가 만들어지지 않기에 위험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능력의 하나님께서 이런 고통스러운 현실을 우리들에게 허락하신 것에 대하여 다른 각도로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이런 놀라운 기적의 하나님만을 믿고 거저먹으려고 하지 말고, 피할 수 없는 고통의 현실 때문에 의심, 불평, 원망을 하게 되지 마시고, 쉬운 승리를 위하여 망각을 버리시고, 자기의 그 힘든 현실을 통하여 인내하면서 참 승리와 복을 이루어보라는 차원에서의 기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예수님께서도 결국 보여주시지 않았나요?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서 온갖 고생을 하시다가, 결국 사역을 다 마치시고, 33세가 되시면서 종려주일 즉 예루살렘 성 안으로 죽으러 들어오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까지의 전 과정을 보면, 인내의 길이요 고난 그 자체이셨습니다. 고난이 가득한 현실 속에서 끝까지 인내하셨기에 부활이라는 기적이 이루어지신 것입니다. 인내라는 뜻은 ‘고통당하다’입니다. 그 의미를 좀 더 살펴보면, “그 어떤 고생에도 저항하지 않는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종려주일을 맞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요? 마21:1-9입니다.

 

21: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1: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

21: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21:4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21: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21:6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대로 하여

21: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21:8 무리의 대다수는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다른 이들은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21: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높여 이르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이 간단하고 편한 방법인,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로 자신의 현실의 고통을 계속하여 감추고 쉽게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능력의 하나님을 믿고 자기의 현실의 고난들을 쉽게 해결하려고 하다가, 어떻게 되었나요? 결국 복된 인내, 즉 “그 어떤 고생에도 저항하지 않는다”의 그 가치를 놓치므로, 그 인내를 감당하신 주님을 외면하게 되면서 지금도 이스라엘은 방황하고 있습니다. 늘 쉬운 길은 얄팍합니다. 얄팍한 쉬운 길을 걷다가, 다 닳고 나면, 복된 인내를 다 놓친 우리들은 결국 원한과 냉소를 품게 되면서 나중에는 폭발하게 되면서 폭행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 터지는 riot를 보면 인내 대신에 쉬운 길을 찾던 자들이 일으키는 폭동인 것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보세요! 그 어떤 저항도 하지 않으셨다는 것이 아닙니까?

 

사53:7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을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이 예언의 이사야의 말씀 그대로 예수님은 그렇게 죽어주셨습니다. 그래서 다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기적의 그 목적이 예수님을 통하여 확실하게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끝까지 “그 어떤 고생에도 저항하지 않는다”에 초점을 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그 현장, 아픔과 고통과 상처가 가득한 그 한복판에서, 우린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롬8:36입니다. “기록 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성도의 현실도 주님께서도 그렇게 당하여 주셨듯이 도살 당할 양 같이 조용히 당해 주는 자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주님을 향하여 군중들을 보면, 그들은 호산나로 단지 외치면서, 받아야 되는 고난과 겪어야 되는 인내보다는 능력의 주님을 이용하여 쉬운 성공의 길을 택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기까지 하시면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상상할 수 없는 절규가 터져 나와야 했습니다. 상반된 반응입니다. 그러나 그 처절한 인내의 절규는 죽음의 사슬까지도 깨뜨리고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천하를 다스리시는 영광의 주가 되신 것입니다. 인내만이 주는 승리요 영광입니다. 이 승리와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기적을 보여주신 것이지, 쉬운 승리가 기적의 목적이 아닌 것입니다. 쉬운 승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우린 영원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로 끝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도구로 하여 우리들을 성장케 하시고 하나님과 더 가깝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 점을 깨달아 갈수록 우리들은 그만큼 고난을 부정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그 아픔, 고난을 내 계획의 방해 세력으로 보지 않게 되고 오히려 하나님을 더 경외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힘의 하나님이 아니라 기적을 통하여 인격의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자녀들을 철저하게 보살피시는 사랑이 가득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기적들로 이해가 되고 인정을 하셔야 합니다. 인격의 하나님으로 보이게 되시면, 모든 것을 다 맡겨버리고, 다 내려놓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왜요? 다들 가난하여 먹을 것도 없어 두 아들이 종이 되어야 했는데, 기름으로 해결하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젠 늙어 자식을 갖고 싶어도 불가능했던 가정에 자녀를 낳게 하시고 그 자식이 이유 없이 호흡이 끊어지자, 다시 살려 주시기까지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국에 독이 있음을 알고 그 독을 깨끗하게 해결하여 충분히 먹을 수 있게 하시고, 아주 작은 보잘 것이 없는 보리떡을 가지고 백여 명이 먹고도 남게 하십니다. 이렇게 가난하고 어려운 자녀들을 위한 하나님이십니다. 있는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없는 자들의 하나님이십니다. 힘의 하나님이 아니라 인격의 하나님이십니다.  

 

왜 나에게는 이런 기적이 없지? 왜 나에게는 이런 도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지? 라는 생각은 하나님을 모르는 무지요 죄입니다. 이미 우리들에게도 그 이상의 능력으로 지켜주셨기에 지금도 우린 여기에 오늘도 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소망과 원함이 어떤 목표를 향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달라집니다. 그래서 신앙의 목표가 하나님과 같은 방향으로 가지 않으면 바라던 자기의 그 응답은 영원히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조차도 듣지 못하게 됩니다. 

 

주님을 믿고 있으면서도 응답에 대한 감사와 기쁨이 없다면, 자기의 기도의 뜻과 삶의 방향이 어느 쪽으로 향하고 있는가를 먼저 점검해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결코 복잡하거나 어렵지 않습니다.

 

고후5:9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 우리의 기도의 방향이요 삶의 목적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가요? 

 

그 반대가 아니던가요? 죽은 자의 하나님을 찾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죽은 자의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아닌지는 자기가 바라는 목적과 과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목적이 순종과 이웃의 종 된 자의 삶이 아니면, 자기를 기쁘게 하려고 하나님을 찾고 있다면 그 교인들은 죽은 자의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결론입니다. 우린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자기의 일에 방해물이 끊이지 않는다고 항상 불평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 방해물들이 바로 자기의 귀한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달갑지 않은 사건, 힘겨운 순간, 예기치 못한 손해, 거기에는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놀라운 큰 잠재력이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롬8:18의 말씀처럼,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지금 나의 고난 속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잠재력이 숨겨 있다는 점을 잊지 마세요! 단지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 사실을 믿고 더 이상 어줍잖은 꿈과 환상에 불과한 쉬운 승리를 구하지 마시고 어려운 승리를 붙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적은 인내가 되고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고통의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항상 기억하는 습관을 갖지 않으면, 방심하거나 잠시 한눈을 파는 순간에, 기적의 하나님을 이용하여 쉬운 승리를 찾게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바울만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배우고 있는 욥기의 욥을 늘 마음에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무슨 잘못이 있다고, 당대의 의인이었던 욥에게 이런 있을 수 없는 재앙으로 죽여 달라는 그런 간구까지 해야 했는지를 말입니다. 욥의 그 고통은 결국 갑절의 복으로 마감합니다. 특히 욥의 신앙이 더욱 깊어졌다는 점이 더 중요합니다. 욥의 승리는 능력으로 쉬운 승리를 원했던 것이 아니라 끝까지 인내한 결과입니다. “그 어떤 고생에도 버티고 견딘 결과”입니다. 고통에 깊게 쌓여 힘겹게 서 있는 성도된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고난 받으신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를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현실의 고통의 한복판에서 살고 있는 이웃들에게 하나님의 고난의 사랑을 나누어 주라고 우리들을 계속해서 부르시고 계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고난이 되셔야 합니다. 왜요? 우리의 모든 고통은 현실과 비교할 수 없는 그 영광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